키노아이: 영화의 혁명가 지가 베르토프

키노아이: 영화의 혁명가 지가 베르토프

1. “전통적 내러티브라는 목적에 종속된 영화의 속성을 깨뜨리는 베르토프의 ‘키노-아이’ 원칙은 행동을 요구하는, 열정에 넘치는 호소다. . . . 베르토프는 신경제정책NEP 기간의 타협을 거부하고, 구체제 부패의 징후인 전통적인 영화 연출법을 제거할 것을 주장하면서, ‘영화인(Kinoki)’라는 일단의 동료들과 함께 소련 영화를 형식과 제작 면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체계화했다.”(첫 장)

2. […] 촬영기사는 낙하 전체, 즉 내 얼굴표정과 온갖 생각들이 보이게 촬영하라고 주문 받았다. 난 돌집의 가장자리로 올라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시늉을 하며 뛰어내리기를 발복했다. 필름에 나온 결과는 다음과 같다. 한 남자가 돌집의 가장자리로 다가간다. 얼굴에 공포와 망설임이 서려있다. 남자는 생각한다. ‘나는 뛰어내리지 않을거야.’ 그리고는 결정한다. ‘안 돼, 그건 창피한 일이야. 사람들이 보고 있잖아.’ 다시 한번 가장자리로 간다. 역시 주저하는 표정이다. 그 다음엔 그가 결의를 다지며 “반드시 해야 해”라고 혼잣말 하며 뛰어내리는 것을 본다. 그는 허공을 가르며 기우뚱하게 난다. 그는 혼자 힘으로 땅위에 두발로 착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몸을 쭉 펴고 땅에 접근한다. 다시 한번 주저와 공포의 표정이 스친다. 마침내 땅에 착지한다. 그 수간 든 생각은 그가 땅에 떨어졌고 그 다음엔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멋지게 뛰어내렸지만 공중그네를 어려워하는 곡예사처럼 q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엄청나게 쉬었다는 듯 공중에서 천천히 내려온다. 사람이 천천히 ‘떠다니는’듯이. 평범한 눈으로 보면 당신은 거짓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눈(Cinematic Eye, 특수한 영화적 수단의 도움으로, 이 경우에는 고속촬영)으로보면 당신은 진실을 봅니다. 만일 좀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의 생각을 읽어야 한다면(그리고 종종 우리의 관심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것이다), 그 기회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키노-아이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죠.(Dziga Vertov, Three Songs of Lenin and Kino-Eye, p,123 아래.)(15-16)

3.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 대한 당시 평자들의 견해(1931년 12월에 발행된 잡지 <클로즈업>에서 제이레이다가 쓴 글)

“베르토프 역시 자신의 사상을 실제로 증명하기 위해 재료와 도구들(현실과 영화카메라)을 가지고 격렬하고 열정적이고 필사적인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베르토프는 이 전투에서 패했다. 가장 교묘한 예술적 기교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에 이미 무성영화 시기에 실패했다. 다시 말해 시적인 조각그림으로 만들어진 곡예같은 대작들, 영화적인 연상으로 구성된 재기 있는 마술들, 그러나 결코 원숙한 작품도 아니었고, 끌끔하게 진행되지도 않는 작품이 되어버렸다. 베르토프는 세부와 관련하여 큰 노력을 들이는 바람에 전체적으로 호흡하지 못했다. 아라베스크풍 무늬는 기본 도안을 완전히 덮어버렸고, 푸가는 모든 멜로디를 파괴했다.” (Jay Leyda, Kino: A History of the Russian and Soviet Film(sbdyr, 1960), p. 251.)(17)

에이젠슈테인은 <영화의 원리와 표의문자>에서 슬로우모션(동작의 분석)을 언급하는 가운데, 가부키 극이나, 꿈의 재현등과 아울러 슬로우모션이 사용된 예를 베르토프의 영화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비판한다.

“에이젠슈테인은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형식주의자의 지푸라기 인형과 정당한 동기 없는 카메라의 장난’의 일람표이며, 느린 동작의 사용을 장 엡스텡의 <어셔가의 몰락.과 부정저긍로 비교하며 이것을 ‘카메라의 장난’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로 제시한다.”(18)

그러나 레이다의 또 다른 견해도 있다.
“그 영화의 분명한 목적은 카메라가 기록하는 능력의 정밀함과 폭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베르토프와 그의 동생이자 촬영기사인 마하일 카우프만은 영화의 임무를 단순한 어휘를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닷 ㅣ말해, 촬영기사는 당대 소비에트의 삶에 영웅적인 참여자가 된 것이다. 베르토프는 시퀀스를 크게 유형화시키면서 가장 유려한 몽타주 양식ㅇ로 촬영기사와 그의 촬영방식을 다뤘다. 그 구조는 관객, 노동의 나날, 결혼, 탄생, 죽음, 오락이라는 ‘주제’들의 연속인 <키노-아이>의 구조와 비슷한 것으로서, 각 구조는 급속도로 절정으로 휘몰아친다.”(19)

4. 키노아이
“베르토프는 1919년 현존하는 영화 전체에 죽음을 선언하면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베르토프는 영화의 소명을 ‘불완전한 눈’인 인간의 눈과 비교하여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눈’인 카메라라는 대용품을 통하여 ‘세상의 감각’을 잡아내는 것이라고 정언적으로 재정의했다. . . .
모방적인 것들에 대한 베르토프의 혐오, 부연과 폭로의 기술과 공정에 대한 관심은 그를 당대의 구성주의자 세대 중 한 사람이라 날인하는 것이다. 베르토프는 몽타주라는 급진적인 영화합성 기술을 수용하고 확인하는 자신의 신념을 역설적으로 포기하면서, 구성주의자들과 함께 인간을 완전하게 할 수 있는 대행자로서 예술의 역할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관심, ‘적나라한 진실의 세계’에 도달하리라는 확신, 의식의 변형을 생산하는 도구로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공유한다.
키노-아이(영화-눈)는 공간의 정복을 의미한다. 즉, 영화적이거나 연극적인 제시의 교환에 대한 반대로서 필름-기혹(film-document)인 가시적 사실의 끊임없는 교환에 토대를 두고 전세계 구석구석에 있는 사람들을 시각적으로 연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키노-아이는 시간의 정복(시간에 의해 분리된 현상을 시각적으로 연결)을 의미한다. 키노-아이는 삶의 과정을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임의적인 시간 순서나 속도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다.
키노-아이는 모든 가능한 촬영기술을 이용한다. 고속촬영, 현미경의 사용, 역동작, 애니메이션, 카메라의 이동,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역원근법의 사용 등 우리는 이 모든 기법들을 속임수 효과가 아닌 평범한 기법을 완전히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키노-아이는 몽타주 구성에 있어서 가능한 모든 기법을 사용한다. 임의의 시간 순서로 전세계의 모든 장소를 연결하고 비교하면서, 필요하다면 영화를 만드는 모든 법칙과 관습들을 깨면서 몽타주한다.
키노-아이는 주어진 주제에 대한 해답을 삶 속에서 찾기 위해, 주어진 주제와 관련된 수많은 현상들 가운데에서 합성력을 찾기 위해 혼돈스럽게 보이는 삶 속으로 뛰어든다. 편집을 한다는 것은 카메라를 통해 삶에서 가장 전형적이고 가장 유용한 그 무엇을 힘들여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삶으로부터 힘들여 캐낸 필름조각들을 의미있고 운율적인 시각적 순서와 ‘바는 본다’는 것의 본질인 의미있는 시각의 구절로 구성하는 것이다.(‘Kino-eye에서 Radio-eye로’)

베르토프의 몽타주는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와 대조적으로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 . . 에이젠슈타인처럼 베르토프에게 있어서도 영화제작의 함의에는 혁명의 과정으로 인도하는 힘이라는 착상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23-24)

5. 바쟁과 소비에트
“앙드레 바쟁은 훗날자신의 영화이론을 실존적 자유라는 존재론으로 실체화하면서 ‘몽타주라는 속임수’를 거부하고, 관객의 지각과 인식이 선택하는 장으로서 깊은 심도와 길게 찍기로 시공간을 보전할 것을 주장했다. 소비에트 영화의 주요한 이론가들에게 몽타주적인 사고는 ‘전제로서의 변증법적 사고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 됐다. 대립적으로 조직된 샷들로 구성된 몽타주 단위의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사유의 과정은 따라서 변증법이라는 3단 논법의 예행연습으로 실체화된다.

6. 몽타주 제작 단계
“베르토프는 키노-아이에 관한 이 두 번째 강의에서 몽타주 제작 단계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주어진 주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기록 자료들(원고, 다양한 오브제, 영화클립, 사진, 신문스크랩, 책)을 평가한다. 두 번째, 몽타주 합성 혹은 쇼트를 설계한다. 세 번째, 일반적인 몽타주인 카메라 혹은 기계의 눈으로 필름에 기록한 것들을 종합한다. ‘간격'(필름들이 서로 연결될 때 프레임 사이의 움직임과 이 필름 조각들의 비율)의 조직을 통한 구성을 논의함에 있어 베르토프는 각각의 프레임 조각들 내에서의 움직임의 관계, 명암의 관계, 기록하는 속도의 관계를 고려한다. 이 ‘간격이론’은 일찍이 1919년 ‘영화인'(키노키)과 그들의 선언문 <우리We>에서 시작되며 이 이론은 사실상 <열한 번째 해>와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서 가장 잘 설명되어 있다.“(28-29)

7. 카메라를 든 사나이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좌익 반대파가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트로츠키가 소련에서 추방된 다음해인 1929년에 개봉되었으며 형식과 구조 면에서 모든 면에서 전례 없이 복잡한 영화적 디자인으로 구체화한 맑스주의 기획의 종합적인 접합이다. 사운드를 갓 도입하고 자막을 배제하기 시작했던 과도기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산업생산의 영역 내에서, 어떤 도시의 여가와 노동의 주기를 새벽부터 일몰까지 인간의 삶의 주기와 결합시킨다. 이 작품은 영화 제작(그 자체가 일종의 생산적인 노동 과정으로 표현된다), 광업, 철강생산, 통신, 우편배달, 건설, 수력발전 설비, 섬유산업을 포함하며 이들을 이음새 없는 유기적인 연속체 안에 포함하고 있다. 이 연속체의 통일성은 시각적 유사와 압운, 운율적 도안, 평행편집, 다중노출, 빠른 동작과 느린 동작, 카메라의 운동–간단히 말해, 그 당시 가능했던 모든 광학적 장치와 촬영 전략–에 의해 끊임없이 옹호된다. 따라서 설정된 연속체 속에 있는 도시의 장면 안에서 산업 생산 체계에 의해 ‘자연스럽게’ 생성된 파편과 모순들은 리듬과 압운이 모두 꿰고 내몰아서 제거한다. 이 리듬과 압운은 사실상 산업화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분업과, 산업 생산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는 소유관계를 급진적으로 재편해온 사회주의 건설 사업에 필수불가결한 합리화 두 가지를 모두 유지하고자 하는 계획의 공동의 버팀목인 보편적 공동체의 형식적인 예시이다.
여기 편집대 위에 있는 모스크바, 키예프, 오데사로부터 합성된 거대한 도시 안에는 생산력 공동체가 ‘전적으로 의존해’ 일하면서 산다. 사실상 여기서의 ‘노동행위, 오고 가는 행위, 먹고, 마시고 옷을 입는 행위’와, 오락 행위들은 ‘삶 자체’의 물질적 생산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베르토프는 마치 노동으로서의 영화제작이 생산노동 과정의 보편적인 체계로 이해되는 방식을 보다 강조하고 설명하려는 듯, <독일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텍스트로 여기거나 재창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베르토프는 영화제작을 다른 특정한 분야, 즉 맑스와 엥겔스가 볼 때 물질 생산의 역사 안에서 전형적인 지위를 가진 섬유공업과 직접적이고 명시적으로 병치시켰기 때문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의 제조업의 증대를 다룬 부분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외국과의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던 초기의 이탈리아, 그리고 훗날의 플랑드르가 가진 원시적인 제조형태를 위한 조건들을 제공함으로서 작은 읍들 사이에 분업이라는 직접적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생각한다. 인구의 점진적인 도시집중(이미 살펴 본대로 시골에서부터 비롯한)과 직조의 증가에 따른 길드와 개인의 수준으로 자본의 집중. 이 직조가 ‘기계를 전제로 하는’ 최초의 산업이었으며 가장 발전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가정을 본거지로 한 소농계급의 일이 원래 가족 단위의 의복제조에 종사하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직조는 상업의 발달로 인해 이익을 본 최초의 산업이었다.
[. . .]

이후의 계속적인 직조 산업의 성장은 유동자본을 소유한 상인계급의 출현을 촉진하면서, 상대적으로 적은 기술을 요구하고 길드 조직의 속박에 저항하는 직업을 제공했다. 따라서 제조업이 이러한 방식으로의 성장은 재료 생산의 역사와 도시 지역을 분석하고 정치 경제학을 비평하는 데 핵심이 된다.
베르토프는 자신의 영화-텍스트의 초반 삼분의 이에 걸쳐 영화제작과 다른 산업 분야의 생산이 전반적으로 관련됐다고 구축한다. 즉, 영화 제작도구인 크랭크와 축 그리고 운송과 산업의 바퀴가 동시적으로 연결된 혁명이라 주장하고, 영화문법의 주기적이고 평행적 구조 안에서 영화를 생산품으로서 위치시킨다. 베르토프의 편집구조는 처음에서부터 삼분의 이 지점까지 산업노동(벽돌공, 도끼날 가는 사람, 봉제공장 노동자, 광부, 전화 교환수, 담배제조공)의 운동을 함께 묶는 에너지의 운율적인 맥박을 구축했다. 편집구조는 영화제작을 이제 경제적 생산에 있어 중심으로 간주되는 직조산업이라는 산업의 계열적인 형태에 직접적이고 명시적으로 연관시켜(영화전체를 통해 제작의 전반적인 과정, 즉 카메라 촬영 외에도 편집, 현상과정, 그리고 상영) 동일시하는 것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 작품의 편집 패턴은 면화공장에서 빠르게 회전하는 실패의 이미지들을 점점 강하고 빠르게, 광산과 수력발전 시설의 촬영에 몰두하고 있는 촬영기사의 이미지를 빠르고 집중적으로 교차시킨다. 광산과 수력 발전소는 제반 산업의 바퀴들과 공장의 실패들에 전력을 공급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지들의 빠르고 집중적인 교차를 정확히 영화의 구조적인 중심, 즉 여가시간이 시작되는 하루의 노동의 정점에 놓는다.
게다가 이런 교차는 촬영기사 자신의 이미지를 직물기계를 소중히 다루는 여성 노동자의 이미지에 시각적이고 과장 없는 다중노출로 쌓아 올리는 것으로 나아간다. 화면은 마치 소용돌이치듯이 두 배의 속도로 교차되고 회전하며, 촬영기사는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의 생산을 통해 급진적인 혁명의 속도에 맞춰 생산의 일반적인 동작을 기록하고 있다.
영화 만들기와 방직공장의 이러한 병치와 연속적인 다중노출은 분업체계에 의해 이전에 생겼던 ‘자연적인’ 불평등과 모순이 중지된 그 통합성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것으로 읽혀진다. 또한 여기서 발생된 유추적, 은유적 읽기의 전체 범위는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통일성인 산업의 운동 내의 공동의 함의와 공통의 목표, 즉 건설 중에 있는 신생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유재산의 완전한 양여라는 도취적이고 강화된 느낌을 의미한다. 따라서 만일 영화-노동이 직물공의 노동과 계열체적 지위를 공유한다면 그것은 베르토프에게는 사유재산의 폐기로 인해 눈은 진정한 ‘인간의 눈이 되었’고, ‘인간의 눈에 비친 대상이 인간에 의해 창조되고, 그리고 인간을 위해 예정된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각이 ‘사실상, 곧바로 이론’이 될 때, 눈은 진정한 키노-아이가 되는 것이다.”(35-38)

8. 베르토프의 주장과 열망에 가까운 동시대인은 모흘리-나기와 엡스탱이다.
“모흘리-나기는 ‘고유의 법칙과 독특한 성격에 맞추어 각각의 작품을 창조’할 필요성을 올바로 인식하기를 요구한다. . . .
눈의 ‘보충물’로서의 카메라와 카메라의 ‘보완’으로서 촬영의 과정은 우리를 회화적 코드가 부과한 ‘연상적 양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객관적 시각’으로 접근하도록 도와줄 도구들이다. 모흘리-나기는 확대와 현미경 사용을 통해 ‘동물, 식물, 광물의 형태’의 형성과 구조와 움직임의 연구에서처럼, 카메라 기술이 이미 ‘몇몇 과학적 실험에 적용되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이러한 실험들은 상호관계가 확립되지 않은 독립적인 현상으로 남아 있다.’고 진술한다. 모흘리-나기는 베르토프처럼 카메라가 지금까지 ‘보조적’으로 사용되어왔던 사실을 강좋나다. 그는 사진이라는 매체와 기술들을 명확하게 측정하고 이해할 것을 주장하면서, 이 도구의 특유한 능력을 충분히 사용하지 않고 ‘극적인 연기’를 재생산하는 것에 대해 공격한다. . . .
이 도구를 위해 렌즈와 필름의 특수성이 개발된다면 이 도구의 잠재력을 최대한 현실화할 수 있을 것이다. 모흘리-나기는 빠른 속도로 운동의 역동성을 재현하는 ‘소리가 나오는 영화신문’을 제안한다. . . .

 
우리는 1백 년의 사진의 역사와 20년의 영화의 역사를 통해서 이러한 측면에서 어마어마하게 풍부해졌다. 우리는 세계를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모든 결과는 시각적 백과사전 정도의 성취일 뿐이다.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체계적으로 생산하기 원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는 일은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Laszlo Hoholy-Nagy, Painging, Photography, Film, trans. Janet Seligman(Cambridge, Mass., 1969), p.29.
 

장 엡스텡은 이 매체의 출현으로 인한 초기의 경이로운 느낌, 즉 20년대 내러티브 코드의 강도 높은 발전에 의해 소멸할 위기에 놓였던 경이로움을 보존하고 설명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 . . 엡스탱은 느리거나 빠른 움직임, 또는 역동작이 주는 시공간적 경험의 조절은 현상계의 진정한, 숨겨진 본성으로 새롭게 다가가는 길을 제공하게 될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한 접근에 의해 얻는 지각과 판단의 수정은 과학적 발견을 뒷받침하고 인식론적 질문을 새로운 방향으로 바꿀 것이다. 엡스탱은 베르토프처럼 양자물리학의 발전과 상대성 이론에 매혹된 세대의 한 사람이었다. . . .

 
[…] 그 누구도 영화적 이미지가 무시무시한 것에 대한 경고를 전한다는 사실과, 우주의 운명에 대해 엄청난 노력을 들여 상상했던 합리적인 질서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은밀한 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Jean Epstein, Ecrit sur le cinema(Paris, 1973), pp. 257~63

그리고 그러한 ‘이성적’ 질서의 전복은 과학 자체의 발전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발견이란 항상 사물들이 우리가 믿어왔던 대로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더 많이 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이미 확립된 지식에 대한 가장 분명한 확신을 버려야 한다. 확신하지는 못할지라도 우리에게 관습과의 놀랄만한 부조화인 이상한 도착행위로서, 그리고 화면에서 움직이는 이미지에 결핍과 일탈처럼 보이는 것이, 파스퇴르의 실용주의마저도 위협하는 ‘사물의 끔찍한 이면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도록 도와줄 수도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 . . 이제 영화촬영기술은 화살에 관한 제논의 유명한 역설인 거짓 명제를 평가하기 위해, 그리고 정지 상태에서 움직임으로, 속이 빈 것에서 가득 찬 것으로, 연속에서 비연속으로의 미묘한 변형을 분석하기 위한 신비한 기계작용으로 보이며, 생명이 없는 원소에서 생명이 발생하는 것과 같은 놀라운 변화인 것 같다.(앞의 책)
 
느린 동작은 실제로 드라마 투르기에 새로운 영역을 가져왔다. 극적으로 확대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힘과, 영혼의 정직한 움직임이라는 지시에 있어서의 확실성은 당시의 모든 비극적 양식을 확실하게 뛰어넘는 것이다. 만일 조사받고 있는 피고인을 고속으로 촬영한다면, 진실은 명료하고 훌륭하고 그럴 듯하게 쓰인 피고인의 맹세 너머에 나타날 것이다. 다시 말해 기소나 변호사의 변호 연설, 이미지의 깊이가 제공하는 것 이상의 증거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확신한다. 또한 <어셔가의 몰락>을 본 사람들도 모두 그럴 것이다. (Jean Epstein, “Une Conversation avec jean Epstein”, L’Ami du peuple, May 11, 1928.)

엡스텡과 모흘리-나기는 영화카메라 안에서 ‘몸짓의 정신분석학’을 발견한 벤야민과 공유하는 진실 기계로서 영화카메라의 이러한 개념은 사회적 혹은 계급적 결정론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영화는 생산을 위한 물질적 조건에 종속되는 생산 형식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40-44)

9.
“베르토프에게는 반대로 느린 동작, 빠른 동작, 역동작, 분할화면, 다중노출 등 영화 특유의 분리와 긴장, 움직임을 위한 특수한 영화적 공정의 특수성에 대한 체계적인 발전은 사실상 폭로의 기능으로 이용된다. 하지만 이러한 폭로는 계급구조와 계급의 이익의 동일시와 떨어뜨려서는 생각할 수 없는 사회적 텍스트로서 세계를 읽기 즉, 세계에 대한 공산주의적 해석인 것이다. 모흘로-나기의 ‘새로운 관계의 창조’에 관한 총체적 지령을 베르토프는 ‘노동자 상호간의 관계를 명확히 해줄’ 혁명적 영화 기획이라는 언어로 다시 고쳤기 때문에, 이 도구의 인식론적 힘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 . . 계속

”’베르토프에게 있어 카메라 지각은 양적인 역량의 강화를 의미. 그리하여 진실 뿐만 아니라, 모든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 것. 진실이 나와야 한다면 이러한 역량에서 보다 진실된 것. 그는 에피쿠로스적이다. 왜냐하면 속임수 조차 자연의 한 이미지이기 때문에. 모든 이미지의 긍정이라는 이미지 윤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플랑세캉스, 몽타주의 구별이 큰 중요성이 없음. 몽타주 역시 실재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진실은 이미지 내재적이다. 해답을 이미지 속에서 찾는 것이다. 따라서 몽타주는 현실 내재적 창조. 이는 바쟁이 말했던, 몽타주가 외재적 창조라는 말과는 다른 생각이다.”’

결국, 이들이 말하는 카메라 진실이란, 벤야민이 말한 무의식이다. 휴머니즘의 관점에서의 진실이 아니다.

 

 

우리 — 선언서의 이문

심리적인 것(혹은 인간적 지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베르토프는 미래파와 유사한 어조로 기계의 지각을 주장한다.

 
“우리는 망령과 유아기의 기억에 억눌려 있는 심리적인 러시아-독일의 영화-극을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한다.”(63)

베르토프는 “역동적인 미국 모험영화”와 미국의 “핑커턴”(Pinkerton)류의 각색을 칭찬하지만, 이들은 정확한 동작연구에 토대가 없으며, 심리극 위에 얹혀 있는 행동들일 뿐. 진부함, 모방의 모방.
베르토프는 연애소설을 바탕으로 하는 옛날 영화, 연극적인 영화, “극영화(cinematography)”, 나쁜 색상들, 로맨스, 심리소설, 불륜연극 등을 거부한다.

 
“심리적인 것은 인간을 초시계만큼 정확하지 못하게 만들며, 기계와 닮으려는 인간의 욕망을 방해한다.”(65)

심리적 인간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무질서한 경솔, 소극성, 타락한 무력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 때문에 우리는 당분간 인간을 영화의 주체에서 배제한다.

우리의 길은 기계의 시학을 통해 서투른 시민에서 완벽하게 전기적인 인간으로 인도한다.”(65)

기계의 영혼, 기계 노동에 창조의 기쁨, 사람과 기계의 관계, 새로운 인간, . . .

 
“멋있고 솜씨 좋은 새로운 인간은 가볍고 정확한 기계의 움직임을 갖게 될 것이며, 우리 영화의 만족스러운 주제가 될 것이다. . . . 영화의 느슨해진 신경에는 정확한 운동으로 구성된 엄밀한 체계가 필요하다.”(65)
 
“영화의 장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들은 쇼트의 좌표축과 더 나아가 우주의 좌표축(세 개의 차원+네 번째 차원인 시간)에 대해 정확한 위치뿐만 아니라 운동의 유형, 박자, 빠르기를 연구하고 고려해야 한다.”(66)
 
“흥미로운 이미지의 연속을 통해 뽑아낸 운동의 기하학적 추출물이 바로 몽타주가 요구하는 것이다.”(66) <<운동-이미지의 기계적 추출. 이것이 몽타주의 과정이다>>
 
“키노체스트보는 오브제의 꼭 필요한 운동들을 공간 안에서 운율적인 예술적 전체로 조직하는 예술이다. 그리고 각각의 오브제가 지닌 내적 리듬과 물질적 속성과의 조화 안에서 조직하는 예술이다.

간격(interval, 하나의 운동에서 다른 운동으로 이동)은 재료(필름 푸티지, 즉 좔영된 필름)이고 움직임의 예술의 요소지만, 결코 그 움직임 자체는 아니다. 그 움직임을 동역학적 분해로 이끄는 것은 바로 간격이다.”(66)

즉, 베르토프가 말하는 간격은, 운동 자체 사이에서 운동을 멈추고, 이어주고, 방향을 틀어주고, 움직임의 양태를 바꾸어주고, 운동에 전체라고 하는 시간적 개념을 집어넣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물질이 예술로 전화되는 재료이다.

 
운동의 조직이란 운동의 요소 또는 운동의 간격을 구(句)로 조직한다는 말이다. 각 구에는 (다양한 단계로 표현되는) 상승, 정점, 하강의 운동이 있다. 구가 운동의 틈(간격)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문은 구로 이루어진다.”(66)
 
“점, 선, 면, 부피의 경주인 역동적 기하학 만세 !

빠르게 휘몰아치는 기계의 시 만세! 강철로 만든 지레, 바퀴, 날개의 시 만세! 움직이는 강철의 외침 만세! 눈을 멀게 하는 뜨겁고 벌건 쉿 물의 눈부심 만세!”(67)

 

 

3인 회의

베르토프는 이 글에서 키노-아이의 기계적, 양적, 유물론적 최대화의 수단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나아가 카메라를 인간의 지각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으로서의 키노-아이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영화가 문학과 연극을 훼손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를 모든 지식분야에서 이용할 것을 전적으로 찬성한다. 하지만 이런 기능들은 영화의 부속물 즉, 부차적 파생물로 정의한다.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은,
영화를 통해 세상을 감각적으로 탐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간을 채우고 있는 혼돈스러운 가시적 현상을 탐구하기 위해 인간의 눈보다 더 완전한 영화의 눈인 키노-아이로서 카메라를 사용할 것을 출발점으로 한다.
키노-아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고 움직인다. 키노-아이는 인간의 눈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인상들을 모으고 기록한다. 카메라에게는 관찰하는 동안 불가피하게 제한 받는 우리 몸의 위치나, 우리의 지각이 주어진 순간의 가시적 현상에서 몇 가지 특징만을 인식하는 것과 같은 제한이 없다. 왜냐하면 카메라는 완전해졌기 때문에 더 많이 그리고 더 잘 지각한다.

우리는 인간의 눈을 개선시킬 수는 없지만 카메라라면 끝없이 완벽하게 할 수 있다.

. . .
지금까지 우리는 영화 카메라를 모독하고 우리 눈이 하는 일을 모방하라고 강요해 왔다. 모방을 잘 할 수록 좋은 촬영이라 여겼다. 그러나 오늘부터 우리는 카메라를 해방시키고, 카메라가 모방과는 먼 반대의 방향으로 작업하도록 할 것이다. <<베르토프가 말하는 모방이란 인간적 지각의 모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의 눈이 가진 약점은 명백하다. 우리는 움직임의 혼돈 속에서 고유의 운동의 결과를 발견해가는 키노-아이를 지지한다. 우리는 자기 확인이라는 도달점을 향해 그 능력과 잠재력이 자라고 있는 고유의 시공간 차원을 가진 키노-아이를 지지한다.”(74-75)
 
“나는 관객에게 다양한 가시적인 현상을 내가 제시하는 것과 가장 잘 조화되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관객들의 눈은 카메라의 의사에 복종하고, 카메라의 의사에 의해 영화 구를 가장 정확히 보여주는 행위의 연속적인 점으로 가장 간명하고 생생하게 인도된다.
 
예: 권투시합촬영. 관중의 시점에서가 아니라 링 위에서 선수들의 연속적인 움직임(강타들)을 촬영한다.
예: 무용단 촬영. 춤추는 무용단을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의 시점이 아니라 관객 앞의 무대 위에서 촬영한다.
결국 발레를 구경하는 관객은 뒤섞인 무용수들, 임의의 개별적인 모습들, 누군가의 다리 등 관객 제각각 다른 일련의 분산된 지각들을 혼란스럽게 따라간다.
. . .
카메라는 관객의 눈을 팔에서 다리로, 다리에서부터 눈 등 가장 알맞은 순서로 ‘나르고’ 그 세부들을 순서 정연한 몽타주로 면밀히 구성한다.”(75-76)

이렇게 해서 베르토프는 카메라가 세계의 감각적, 공간적 해방을 논의했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기체적 지각(gaseous perception)의 구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베르토프는 시간적 해방에 대해 말한다.

 
“당신은 1923년 오늘 시카고의 어느 거리를 걷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1928년 페트로그라드 거리를 걷고 잇는 볼로트라스키 동지를 만나게 하고, 그 동지는 당신의 인사에 화답한다.
 
다른 예: 국민영웅들의 관이 무덤 속으로 내려간다(아스트라한에서 촬영, 1918). 그 다음 무덤이 메워진다(크론슈타트, 1921), 축포(페트로그라드, 1920). 기념식, 모자를 벗는다(모스크바, 1922). 이런 장면들이 함께 연결된다. 심지어 이런 목적을 위해 특별히 촬영된 것이 아닌 출처를 모르는 푸티지일지라도 함께 연결한다. 레닌 동지를 환영하고 있는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촬영된 군중과 기계들의 몽타주가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76)

이제 베르토프는 키노-아이의 구성능력에 대하여 언급한다.

 
“나는 키노-아이다. 나는 건설자다. 나는 내가 오늘 창조한 당신을, 역시 방금 전 내가 만들어내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특별한 방에 집어 넣었다. 이 방 안에는 세계 여러 곳에서 촬영한 열두 개의 벽이 있다. 나는 벽 쇼트들과 세부 쇼트들을 함께 모아서 마음에 드는 순서로 구성했고, 간격으로, 정확하게는 그 방인, 필름구로 쇼트를 구성해냈다.<<베르토프는 푸티지를 재료단위처럼 언급하면서, 이들의 간격에 의한 구성이 쇼트가 된다고 말한다>>
. . .
나는 어떤 한 사람에게서 가장 강하고 기술을 가진 손을 취한다. 또 다른 사람에게서는 가장 빠르고 가장 균형 잡힌 다리를, 세 번째 사람으로부터는 가장 아름답고 표정이 풍부한 머리를 취한다. 그런 다음 나는 몽타주를 통해 새롭고 완벽한 사람을 창조한다.”(76-77)

그리고 다시 키노-아이의 유물론적 팽창과 기체적 지각에 대한 언급한다.

 
“나는 키노-아이다. 나는 기계의 눈이다. 기계인 나는 당신에게 나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을 보여준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는 나 자신을 인간의 부동성에서 해방시킨다. 나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사물에 가까이 갔다가 다시 멀어진다. 나는 그 사물들 밑을 기어 다니고 그 위로 기어 올라간다. 나는 질주하는 말의 재갈과 함께 움직인다. 나는 군중 속으로 전속력으로 뛰어 들어가고, 달리는 병사들을 추월한다. 나는 비행기 위에 누워 비행기와 같이 상승한다. 나는 활공하고 요동치는 동체와 함께 활공하고 흔들린다. 이제 나, 카메라는 비행기들의 합성력에 내 몸을 맡긴 채 날아다니며 움직임을 기록하며, 혼돈스런 움직임 속에서 카메라를 조종하고 가장 복잡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움직임을 시작으로 한다.

1초에 16~17개의 프레임의 법칙에서 자유로워져,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게, 어디서 촬영을 했던 상관없이 나는 이 세상에 있는 어느 곳이라도 함께 연결한다.
나의 길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지각을 창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나는 당신이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한다.”(77-78)
 
“시각적 인상들의 하루가 지나갔다. 하루의 인상들을 어떻게 하나의 효율적 통합체인 시각의 연구로 구성하는가? 만일 누군가 자신의 눈이 본 모든 것들을 촬영한다면 그 결과는 뒤범벅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만일 촬영된 필름을 솜씨 있게 편집한다면 그 결과물은 좀더 명확해질 것이다. 만일 성가신 찌꺼기들을 버린다면 훨씬 더 나아질 것이다. 우리는 평범한 눈이 받은 인상들을 정리한 비망록을 얻게 되는 것이다.

. . . 인간의 눈을 거부하는 기계의 눈인 카메라는 움직임에 의해 이끌리거나 밀려나면서, 그 안에서 독자적인 길을 탐색하며, 시각적 사건들의 혼돈을 뚫고 자신의 진로를 더듬어 찾는다. 카메라는 시간을 확장하고, 운동을 잘게 나누고, 혹은 반대로 몇 해를 꿀떡 삼켜버림으로써 시간을 흡수하고 보통의 눈으로는 불가능한 오랜 기간의 과정을 체계화하는 실험을 한다.

. . .
해방되고 완전해진 카메라와 감독하고 관찰하고 측정(판단)하는 인간의 전략적 두뇌가 조화를 이뤄 작업한 결과, 가장 평범한 사물이라도 대단히 신선하고 흐미로운 양상으로 표현하게 될 것이다.”(79)

다음으로 베르토프는 연극의 한계에 관하여 언급한다.

 
“사람들은 단조로움으로부터, ‘평범한’ 삶으로부터 도망 다닌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연극은 거의 항상 비천한 인생을 비천하게 모방한다. . . . 어떤 연극계의 대가들은 연극을 그 내부에서부터 파괴시키고, 낡은 형식을 깨뜨리고, 새로운 연극을 위한 슬로건을 진행시키고 있다. . . . 하지만 전체적으로 연극에서 나온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연극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연극은 종합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통의 혼합물도 아니다.<<연극은 파편의 요약일 뿐이며, 조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연극에서는 몽타주, 종합, 시간과 공간의 구성이 없기 때문이다.>>
. . .
무대는 작다. 제발 삶 속으로 나오라.
이 곳, 삶이 우리가 일하는 곳이다–영상의 전문가들, 가시세계의 조직자들인 우리는 어디에나 동시에 존재하는 키노-아이로 무장했다. 삶, 여기는 말과 소리의 전문가, 가청세계의 가장 유능한 편집기사가 일하는 곳이다. . . .
. . .
라디오-뉴스 몽타주는 . . . 카메라에 의해 해독된 가시적 사건들의 신속한 통람이며, 간격을 통해 연결된 현실의 에너지 조각들이 몽타주라는 기술에 의해 구축적인 통일체이다.
. . .
이제부터 영화에서 심리극이나 탐정극은 필요없다.
. . .
혼돈스런 삶 속으로 의연하게 들어가라.

1. 키노-아이는 인간의 눈이 보는 대로 세상을 재현하는 것에 도전하며, 인간의 눈 고유의 ‘내가 보는 것’을 제공한다.
2. ‘영화인’-편집기사는 최초로 이런방식으로 보이는 삶-구조의 순간들을 구성한다.”(80-81)

 

 

<영화의 눈(Kinoglaz)>으로 알려진 영화에 대하여(98-99)

베르토프는 영화-눈이 어째서 혁명의 도구가 될 수 있는지, 어째서 카메라 지각, 인간적 지각을 넘어서는 물질-기계의 지각이 혁명을 이끌어내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배우와 미술가, 감독 없이, 그리고 스튜디오, 세트, 의상을 사용하지 않고 영화-오브제를 만들려는 세계최초의 시도, 모든 등장인물들이 평소 실생활에서 하던 대로 행동한다.
현재의 영화는 카메라로 우리의 현실을 공격하는 것을 의미하며, 일상과 계급모순에 대항한 창조적 노동의 주제를 준비하고 있다. 카메라는 물건과 빵의 기원을 폭로하면서, 증거를 통해 노동자가 이 모든 것들을 창조했고, 따라 이 모든 것이 노동자들의 소유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우리는 농탕치는 부르주아 여인들과 거만한 부르주아 남성들의 가식을 벗기고, 음식과 물건들을 그 생산자인 노동자와 농민에게 돌려주면서,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진실을 볼 기회와, 기생 계급들을 먹이고 입힐 필요성에 대해 질문할 기회를 주고 있다.

그러니까 베르토프는 영화-눈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진실, 사실)을 보게 해주고, 그 현실을 직접적 감각으로 경험하게 해 줌으로써, 인간의 지각이 보지 못했던 진실, 편협한 지각이 파악하지 못했던 착취구조, 노동자의 현실, 우주의 진실에 도달함으로써, 현재의 왜곡된 상황에 비판과 공격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실을 본다는 것이 어째서 혁명으로 나아가는지 좋은 지적이다. 결국, 베르토프의 생각에는 현재의 우리가 인간적이고 편협한 지각 속에서 혹은 이데올로기 안에서 실상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소외효과를 통해 브레히트가 말하고자 했던 것도 이와 비슷한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환상적, 인간적 지각으로부터 벗어나는 두 방법: 낯설게 함으로써, 그리고 진실을 보여줌으로써. 후자는 폭로이고, 전자는 훼방이다.

따라서 베르토프의 영화-눈은 모든 노동자들을 단결하게 한다. 진실을 보게 해 줌으로써, 그동안 잘못 알았던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동등한 위기에 처한 노동자들이 함께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만일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독립적인(내용과 형식의 탐구 두 가지 면에서) 이 영화는 국제적인 영화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의 서문 역할을 할 것이다. . . . 정치적으로 공산주의 강령에 토대를 두고 있는 ‘3인 회의’는 레닌주의가 깔려있는 사상을 가진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성공한 배우들의 표정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노동과 사상에서 나온 지극히 심오한 내용에 투자하고자 애쓰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술적인 토보로 인해 우리의 실험이 어려워졌다. 기술적으로 무장해제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아홉 번에 걸친 <키노 프라우다>의 어려운 실험에 의존하면서, 우리는 이 첫 번째 작품을 시작으로 해서 카메라가 해석한 사회적 현상들과 시각적인 현상들 간의 연관관계(키스나 탐정물이 아닌)에 대중들이 눈을 뜨기를 바란다.
‘영화인’은 재료에서 영화-오브제를 만들어감에 있어(영화-오브제에서 재료로가 아니라), 작업을 시작할 때 소위 시나리오라는 것을 제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문학적 구성품으로서의 시나리오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비연기 영화의 중요성에 관하여(100-103)

베르토프는 영화-오브제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영화-오브제는 영화의 뼈대라고 할 만큼 중요하고, 본질적 요소라는 것이다.

 
모든 영화는 단지 영화-피부로 감싼 문학적인 뼈대일 뿐이다. 기껏해야 약간의 영화-지방과 영화-살이 그 피부 밑에서 자란다(외국 성공작의 예에서와 같이). 그러나 우리는 결코 영화-뼈대를 볼 수 없다. 우리의 영화는 단지 사시나무 막대에 꿴 거위 깃으로 만든 작가의 펜인 ‘뼈없는 살’인 것이다.
 
요약하면 우리는 영화-오브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연극과 문학, 음악, 누구든, 무엇이든, 언제든, 얼마건 함께 동거하는 영화-삽화일 뿐이다.

. . .

우리는 영화-오브제를 “내가 보는 것”의 몽타주로 정의한다.
영화-오브제는 기본적으로 시공간 안에서 실험하는 카메라가 존재하는 모든 광학 기구들을 이용하여 정확해지고 깊어진 절대 시력으로 완성한 습작이다.
시야는 삶이다.
몽타주 구성을 위한 재료도 삶이며,
세트도 삶이고,
배우도 삶이다.

. . .

따라서 두 가지의 극단적인 입장이 존재한다. 하나는 ‘영화인’의 입장으로서 실제의 삶을 조직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감상적인 경험과 모험의 선전-예술극을 지향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키노-아이는 현실의 구성이고 조직화이지, 경험에 대한 기억, 감상, 상상의 구성이 아니다. 영화 그 자체가 이미 현실의 구성이다.

 

 

<영화의 눈(Kinoglaz)>

(6부로 구성된 뉴스릴)
. . .

키노-아이의 진실의 힘이 무엇을 되찾게 해주나? 베르토프는 이렇게 말한다.

 
1부는 턱없이 부족한 우리의 장비를 고려했다. 스튜디오 용으로 제작된 장비는 우리 작업에 부적합하다. 이 부분에서 카메라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을 선택한 후 삶 속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카메라를 둘러싼 가시적 환경에서 형세를 살핀다. 2부에서는, 카메라의 수를 늘려 관찰 분야를 확대할 것이다. 전 세계의 다양한 지역과 각양각색의 삶의 조각들의 비교를 통해 가시 세계가 점진적으로 탐구될 것이다. 이어지는 각 부부는 현실을 더욱 명료하게 이해하도록 할 것이다. 이를테면 아이들과 어른들, 교육받은 사람 뿐 아니라 교육받지 못한 어른들의 눈이 난생 처음으로 열리고 있는 것이다. 시력을 되찾은 수백만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세계의 구조를 지탱해 주어야 할 필요성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영화-전쟁에 단 한 삶의 감독이나 배우, 미술감독만을 고용하고 있지는 않다. 우린 스튜디오의 편리함을 거부하며 세트와 분장, 의상을 쓸어서 내다버린다. 이제 막 선포된 전쟁의 전투를 미리 묘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화 캠페인을 위한 시나리오도 미리 쓸 수 없다. ”’ “영화인”은 필름-오브제에서 재료로가 아니라, 재료에서 영화-오브제로 만들어가면서, 문학적 시나리오로 된 예술영화의 마지막 요새(가장 완강한)를 접수하고 있다. 매혹적인 단편 소설 형식이건, 소위 사전 편집 게획표의 형식이건 간에 영화와 관계없는 요소인 시나리오는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

기존의 극영화, 예술영화들은 시나리오, 각색, 세트, 분장, 의상 등의 필름-오브제들을 만들어 놓고 이것으로 현실 즉 재료를 구성한다. 그러나 베르토프는 반대로, 현실 즉 재료, 즉 가공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재료로 하여, 이들을 조직화하고, 의미화하는 과정의 결과로서 영화-오브제를 만든다는 것이다.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1만 피트의 필름이 우리영화의 ’10월’이 될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가장 강력한 무기와 최고의 기술이 유럽과 미국의 영화-부르주아의 수중에 있다. 인류의 사분의 삼이 부르주아 영화-극이라는 아편에 마비되어 있다.
대중의 눈을 멀게 만드는 것에 대항한 전투, 시력을 위한 전투는 영화-무기가 국가의 수중에 있는 소련에서만 시작할 수 있고 시작해야만 한다.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름으로 세상을 보고 보여주는 것–이것이 ‘영화인’의 가장 기본적인 신조이다.
 

 

키노-아이의 탄생

베르토프는 키노-아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언급하고, 그 가능성과 혁명성을 언급한다. 키노-아이는 우선 환상소설에서 출발하고, 속기록 편집, 축음기 녹음, 그리고 다큐멘터리적인 소리 녹음, 실험을 위한 열정으로. . . .

 
“소리를 묘사할 것이 아니라 사진처럼 찍고 녹음할 장비를 반드시 구해야 . . .이 소리들은 시간처럼 빠르게 지나가버린다. . . . 들리는 세계가 아닌 보이는 세상을 구성한다. 아마도 이것이 타개책이 아닐까?
 
‘나는 하면 위에 나오는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내게 들었던 생각들, 즉 주저함, 동요, 굳은 결의(내 안에서의 싸움), 그리고 무엇보다 승리의 기쁨이 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가면 없이 인식된 세계, 있는 그대로의 진실(진실은 숨길 수 없다)이 키노-아이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다.’
 
현미경의 눈은 내 영화카메라의 눈이 볼 수 없는 곳까지 꿰뚫어 본다. 망원경의 눈은 나의 육안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멀리 떨어져 있는 세상까지 본다.
 
키노-아이에 대한 생각들, 키노-아이는 빠른 속도의 눈으로서 생겨났으며 키노-아이의 개념은 나중에 확장된다.
영화분석으로서의 키노-아이
‘간격이론’으로서의 키노-아이
화면 위의 상대성 이론으로서의 키노-아이 등.

. . .

키노-아이는 ‘사람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으로서 이해하며,
시간의 현미경과 망원경으로서
시간의 네거티브로서
거리나 제한과 상관없이 볼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영화카메라의 원격 제어로서
망원-눈으로서
X-선의 눈으로서
‘부지불식간에 포착한 삶’ 등으로서 이해된다.

. . .

 
‘부지불식’ 그 자체를 위해 ‘부지불식간의 삶을 찍는 것’이 아니라, 가면을 쓰지 않은, 화장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의 눈을 통해 사람들이 연기하지 않는 순간을 포착하고, 카메라에게 들킨 생각을 읽기 위해서다.
 
키노-아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명료하지 않은 것을 명료하게, 숨겨진 것을 명백히 밝히고, 위장된 것을 드러나도록, 연기된 것을 연기하지 않는 것으로, 즉 거짓을 참으로 변화시키는 가능성이다.
 
키노-아이는 세계를 공산주의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전투를 촉진시키기 위해 뉴스릴과 과학의 동맹이며, 화면 위에 진실–영화–진실을 보여주려는 시도이다.
 

 

키노-아이의 본질

우리의 기본적이고, 강령에 따른 목표는 각각의 억압받는 개인과 노동자 계급 전체가 그들을 둘러싼 삶의 현상을 스스로 노력해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기록된 사실을 선택하는 것은 노동자나 농부에게 꼭 필요한 결단을 제시하는 것이다.
. . .
우리의 이러한 목표를 우리는 키노-아이라 부른다. 삶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 사실들을 이용해서 노동자들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것.
 
우리가 Radio-Ear라 부르는 것, 즉 가청적 세계의 조직은 소리의 영역에서 키노-아이와 똑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렇게 영향을 주는 일이 연기나 춤, 싯구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실들을 통한 것이기 때문에, 소위 예술에 우리가 관심을 거의 갖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 .

 
우리는 연극이나 영화-극과 같은 삶의 대용품들 대신 노동자 자신들의 삶과 노동자들의 적대계급의 삶 모두에서 주의깊게 선택되어 기록되고 구성된 크고 작은 사실들을 노동자들의 의식에 제공한다.
 
세계를 공산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강령에 근거하여 모든 민족과 국가의 프롤레타리아간의 시각적(키노-아이)이고 청각적(라디오-이어)인 계급동맹을 구축하는 것–이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키노-아이(133-154) 중에서

베르토프는 이 글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논의한다. 그러면서 예술 영화, 상품으로서의 영화와 키노 프라우다를 비교한다.

 
[. . .] 일반적인 예술 드라마가 고정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은 습관적인 담배가 흡연자에게 끼치는 영향과 같다. 영화-니코틴에 중독된 관객은 민감한 곳을 간질여주는 스크린에 거머리처럼 붙어있다. 뉴스릴 푸티지로 만들어진 영화-오브제는 이 관객들이 중독에서 깨어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 . 외국의 영화 모델들을 모방하면서 우리나라의 감독들이 자신들의 작품에 붉은 딱지를 붙일 때 이들이 입증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 . . 그들은 중독된 관객들에게 오염된 상품들을 팔며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품을 혁명적 외관과 향기로 치장하고, 적당한 지점에 붉은 깃발을 꽂아 차르주의자들의 상품이라는 것을 떠올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 . .
 
예술 드라마의 본질은(연극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관객 앞에서 낭만적이고, 탐정의, 사회적인 ‘동화’를 설득력 있고 능숙하게 실연하며, 관객을 충분히 납득시켜 중독상태로 밀어 넣고, 어떤 사상이나 견해 등을 관객들의 무의식 속으로 억지로 밀어 넣는 것이다. . . . (본당 회중석에 모여 기도하는 신앙심 깊은 사람들의 슬픔에 잠긴, 단조로운 톤의 성가, 후덥지근함, 향냄새, 연기 나는 초의 심지, 가까운 숨결–이 모든 것들은 무엇보다도 기독교 신자들의 가난한 마음을 물리적으로 마비시키기 위해 특별히 맞춰진 것이다.)
 
예술-드라마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본 수단인 마취와 암시는 종교가 사용하는 수단과 관련이 있으며 사람을 일시적으로 흥분된 무의식의 상태로 유지시킨다. 우리는 직접적인 암시(최면)와 여성이 남편이나 애인을 흥분시킬 때 어떤 생각이나 행위를 연상하게 하는 성적인 암시엔 익숙하다.
특히 음악적, 연극적, 그리고 영화-연극적 재현들은 저항하는 관객의 의식을 완벽하게 기만하면서 그들의 잠재의식에 작용한다.

베르토프는 이제 의식과 잠재의식을 언급하면서, 키노-아이가 계급의식이 분명한 상태 속에서 깨어있는 의식의 지각임을 밝힌다.

 
우리는 ‘마술사로서의 감독’과 마법에 빠진 대중의 공모에 반대한다.
오직 의식만이 모든 형태의 마법의 지배력과 싸울 수 있다.
[. . .]
우리에겐 스쳐지나가는 아무 제안에도 순종하는 의식 없는 대중이 아닌, 의식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건전한 계급의식 만세.
키스, 살인, 비둘기, 요술의 향기로운 베일, 속임수를 멀리하라.
계급의 시각만세!
키노-아이 만세!

결국 베르토프에게 있어 키노-아이란 세계의 실상을 보는 문제이고, 이것은 바로 공산주의 혁명과 계급의 문제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키노-아이의 원칙
국제적인 관계들을 공산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강령 위에 만국의 노동자들 사이의 시각적이고(키노-아이), 청각적(라디오-이어)인 계급의 동맹을 구축하는 것.
삶을 있는 그대로 해석.
노동자의 의식에 작용하는 사실들의 영향력.
연기나 춤, 싯구가 아닌 사실들의 영향력.
이른 바 예술을 의식의 주변부로 추방시키는 것.
사회의 경제구조를 관심의 중심에 놓기
삶의 대행자들(연극공연, 영화드라마 등) 대신, 노동자 계급의 적들의 삶 뿐 아니라 노동자들 자신의 삶에서 주의 깊게 선택되고, 기록되고 구성된(중요하거나 사소한) 사실들.
 
키노아이 집단의 임시 강령
1. 서론
우리의 눈은 아주 조금 그리고 매우 불완전하게 본다. 그래서 인간은 비가시적인 현상들을 보기 위해 현미경을 고안해냈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의 세계를 보고 탐험하기 위해 망원경을 발견했다. 영화카메라는 가시적인 세계를 보다 깊이 꿰뚫어 보기 위해, 시각적인 현상을 탐색하고 기록하기 위해 발명됐다.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미래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을 우리가 잊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카메라는 불운을 겪었다. 카메라가 발명되었던 시대는 모든 나라에서 자본가 계급이 정권을 잡았던 시기였다. 부르주아들은 이 새로운 장난감을 대중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사용하려는 사악한 생각을 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노동자들의 관심을 노동자의 기본목표인 고용주에게 대항한 투쟁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함이다. 실업자들인 다소 배고픈 프롤레타리아는 영화극장의 전기적인 최면 하에서 강철 주먹을 펴버렸고 고용주의 영화의 부패한 영향력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종했다. 극장은 비싸고 좌석은 적었다. 따라서 고용주들은 부르주아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얼마나 고통 받는지, 얼마나 노동자들을 ‘위하는지’, 그리고 보다 높은 존재인 귀족계급이 비천한 인간들(노동자, 농민들 등)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연극적인 작품을 만들어 유포시키도록 카메라를 강요하고 있다.
혁명 전 러시아에서도 고용주들의 영화들이 바로 이런 비슷한 역할을 했다. 10월 혁명 이후 영화는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어려운 과업에 직면했다. 차르 시대의 공무원 역할을 맡았던 배우들은 노동자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대저택의 귀부인들을 연기했던 배우들은 이제 소비에트 식으로 고통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연기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런 모든 연기를 볼 때, 부르주아 기법과 연극 형식의 틀 안에 남아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현대연극의 적이며, 동시에 현재의 영화형식을 열정적으로 찬양하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뉴스릴과 몇몇 과학영화를 제외하고는)비(非)극영화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은 아직 거의 없다.
모든 연극공연과 모든 영화는 완전히 똑같은 방식 즉, 극작가 혹은 시나리오 작가, 그 다음엔 연출가와 영화감독, 그 다음은 배우들, 리허설(총연습), 세트, 그리고 공개상영으로 구성된다. 연극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는 연기이며 시나리오와 연기에 의해 구성된 모든 영화도 연극적인 재현이다. 따라서 서로 미묘한 차이를 가진 연출가들이 만든 작품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경향이나 연출에 관계없이, 그리고 그러한 연극과의 관계 없이도 연극에 해당한다. 이 모든 것은 영화카메라의 진정한 목적인 삶의 현상의 탐구바깥에 존재하는 것이다.
<키노 프라우다>는 연극 밖에서 혁명과 보조를 맞춰 작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키노-아이는 <키노 프라우다>로 시작하여 공산주의 소비에트 영화를 창조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143)
 

 

키노-아이에서 라디오아이로 (‘영화인’의 입문서에서)

들뢰즈는 베르토프의 간격이론에 대해 짧게 언급하면서, 베르토프에 있어 간극(interval)의 의미는, 빈공간이나 혹은 나중에 정신에 의해 채워지는 어떤 빈 곳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라고 언급한다. 그에게 있어 몽타주는 “간극을 물질에 되돌려 준다는 것”이라는 것이다(Deleuze, cinema1, 81쪽).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이에 대한 대답이 될만한 구절을 베르토프의 글에서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이다.

 
‘Kinoglaz(영화의 눈)’ 혹은 ‘kinooko’, 여기에서 ‘Kinoglazovtsy’ 혹은 ‘Kinoki(영화인)’이 나왔다. ‘영화인’의 입문서에는 키노-아이를 공식 ‘키노-아이=사실들의 영화-기록’으로 짧게 정의한다.
 
키노-아이=키노-보기(나는 카메라를 통해 본다) + 키노-쓰기(나는 카메라로 필름 위에 쓴다) + 키노-구성(나는 편집한다)
 
키노-아이 방식은 가시적 세계를 다음에 근거하여 탐험하는 과학적인 실험방식이다.
a. 삶에서 일어나는 사실들은 필름 위에 체계적으로 기록 한다.
b. 필름에 기록된 다큐멘터리 재료를 체계적으로 조직한다.
따라서 키노-아이는 단지 영화노동자 집단의 이름만이 아니다. 단지 한 영화의 이름(<영화의 눈> 혹은 <모르는 중에 포착된 삶>)일 뿐 아니라, 소위 예술적 경향만도 아니다(좌익이냐 혹은 우익이냐). 키노-아이는 허구의 인상이 아무리 강해도 허구를 통한 영향력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사실을 통한 영향력을 위해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운동이다.(164-165)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허구를 통한 영향력이 아니라, 사실을 통한 영향력이라는 점이다. 몽타주는 실재하지 않는 효과를 만들어내기 보다는, 사실들의 연결을 통한 구성. 따라서 그것은 물질 내재적 구성이고, 현실 안에서의 조직화이다.(여기서 엡스탱과의 차이가 있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키노-아이는 가시세계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비가시 세계 모두에 대한 다큐멘터리적이고 영화적인 해독이다.
 
키노-아이(영화-눈)는 공간의 정복을 의미한다. 즉, 영화적이거나 연극적인 제시의 교환에 대한 반대로서 영화-기록의 가시적 사실인 끊임없는 교환에 토대를 두고 전 세계 구석구석에 있는 사람들을 시각적으로 연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키노-아이는 시간의 정복(시간적으로 분리된 현상의 시각적 연결)을 의미한다. 키노-아이는 삶의 과정을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임의의 시간 순서나 속도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키노-아이는 모든 가능한 촬영기술을 이용한다. 고속촬영, 현미경의 사용, 역 동작, 애니메이션, 카메라의 이동,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단축법의 사용 등 우리는 이 모든 기법들을 속임수 효과가 아닌 평범한 기법을 완전히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한다.(165)

키노-아이는 속임수가 아니라, 물질적 변형을 통한 물질의 다양성의 포착이다. 간격 안에 정신을 집어넣어, 어떤 상상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물질적이고 사실적 필름푸티지들을 연결시키고 구성하여,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게 하는 것이다. 가령, 슬로우 모션을 생각해보자. 슬로우 모션이 보여주는 근육들의 움직임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세계이지만, 그것은 물질적이고 실재적인 것으로서, 사실이다. 인간적 지각으로 볼 때에는 새롭게 보이는 이 물질적 실재들을 몽타주 함으로써, 세계가 전혀 다르게 구성되는 것이다. 간격을 정신(회상, 기억, 등)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물질화시키고, 물질적 관계들로 채우는 것이다.

 
키노-아이는 몽타주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가능한 모든 기법을 사용한다. 임의의 시간 순서로 우주의 모든 장소를 연결하고 비교하며, 필요할 경우 영화를 만드는 모든 법칙과 관습들을 깨면서 몽타주한다.
 
키노-아이는 할당된 주제에 대한 해답을 삶 속에서 찾기 위해, 주어진 주제와 관련된 수많은 현상들 가운데에서 합성력을 찾기 위해 혼돈스럽게 보이는 삶 속으로 뛰어든다. 편집을 한다는 것은 카메라를 통해 삶에서 가장 전형적이고 가장 유용한 그 무엇을 힘들여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삶으로부터 힘들여 캐낸 필름조각들을 의미 있고 운율적인 시각적 순서와 ‘내가 보는’ 것의 정수인 의미 있는 시각의 구절로 구성하는 것이다.(166)

다음으로 베르토프는 몽타주 과정에 대한 모호하고 난해한 단계들을 설명하고 난 후, ‘ 간격 ‘에 관하여 언급한다.

 
키노-아이 집단은 영화-오브제를 쇼트들 사이의 운동인 ‘간격’ 위에, 다시 말해 쇼트들 상호간의 시각적 상관관계 위에, 하나의 시각적 자극에서 다른 자극으로의 이동 위에 구성할 것을 요구한다.
키노-아이에 따르면 쇼트들 간의 운동, 즉 쇼트의 시각적 상관관계인 시각의 ‘간격’은 복잡하다. 간격은 다양한 상관관계의 총합인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항들로 구성되어 있다.
1. 평면들 간의 상관관계(클로즈 업, 롱 쇼트 등)
2. 단축법의 상관관계
3. 프레임 내의 움직임의 상관관계
4. 빛과 그림자의 상관관계
5. 촬영속도의 상관관계
 
이러한 상관관계를 이런 저런 방법으로 조합해나가면서 작가는 다음을 결정한다. (1) 변화의 순서, 연속하는 조각들의 순서, (2) 각 변화의 길이로(피트, 프레임), 즉 각각의 개별 이미지가 보이는 시간인 영사시간을 결정한다. 더욱이 쇼트들 사이의 움직임(간격) 이외에도 ㅇ니접한 쇼트들 간의 시각적 관계와 각각의 개별 쇼트와 시작되고 있는 ‘몽타주 전투’에 복무하는 모든 다른 개별 쇼트들의 시각적 관계를 고려한다.
이러한 모든 상호작용 즉, 쇼트들의 상호 인력과 척력 가운데에서 관객의 눈을 위한 가장 적절한 ‘여정’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수많은 ‘간격'(쇼트들 사이의 운동)을 단순한 시각적 평형상태, 즉 가장 좋은 방법으로 영화-오브제의 기본적인 주제를 표현하는 시각의 공식으로 축소시키는 것, 이것이 작가-편집자의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임무이다.
‘간격이론’으로 알려진 이 이론은 ‘영화인’이 1919년 작성한 ‘우리’라는 선언문의 이문에서 제안된 것이다.
간격에 관한 키노-아이의 입장은 <열한 번째 해> 그리고 특히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서 가장 명확하게 설명된다.(168) <<베르토프가 말한 열한 번째 해와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영화 작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에 있는 글을 말함>>
 

 

<레닌에 관한 세 개의 노래>와 키노-아이

베르토프는 이 글의 초반부에 다시 키노-아이의 기능에 대해 소개한다(즉, “키노-아이는 강령이 아니라 수단이다”). 여기서는 카메라가 인간의 지각 이상의 것, 가령, 표정에서 보이는 두려움이나, 망설임, . . . 같은 무의식적 요소들까지도 볼 수 있다는 점 등에 관하여 자신의 예를 통해(205쪽)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키노-아이에 대해 정리한다.

 
평범한 눈으로 보면 당신은 거짓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눈(특수한 영화적 수단의 도움으로, 이 경우에는 고속촬영)으로 보면 당신은 진실을 봅니다. 만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의 생각을 읽어야 한다면(그리고 종종 우리의 관심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것이다), 그 기회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키노-아이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죠.
키노-아이라는 수단을 이용하여 인간의 가면을 제거하고 키노 프라우다 한 조각을 얻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영화계에서 내가 걸어갈 길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바로 이러한 진실을 드러내는 일입니다.(206)

다음으로 베르토프는 그 진실이 무엇인지를 몇 가지 예를 통해 설명하고 있음(206쪽 이하, 영화의 예에서 그가 들었던 예들을 참고할 것. 그리고 뒤에 가면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에 관하여>에서도 나옴). 그것은 연기라든가 사전에 준비된 의식적 행위가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포착된 삶, 즉 무의식적 삶을 의미한다. 이것이 행동과 말과 생각이 일치되는 순간인데, 이는 삶이 물질적 운동 속에서 포착된 삶이다. 무의식이란 물질 내재적인 운동에 따라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한 진실이란 있는 그대로의 삶이 아니라 인간이 보지 못하는 방식의 삶이라는 것이다.

(지가 베르토프 지음, 이매진, 2006) 에서 발췌

키노아이: 영화의 혁명가 지가 베르토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