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적 접속과 자율

정동적 접속과 자율

Utopia의 작가 토머스 모어(Thomas More)에게 한 학자가 물었다. “유토피아가 존재합니까?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합니까?” 그러자 모어가 말했다. “당신 혼자서는 불가능 합니다!”

고립과 니힐리즘 또는 그 반대에 관한 구절 하나가 눈에 들어와 옮겨본다.

“직업을 가지는 것이 우리를 자율적이게 한다는 느낌을 가지기는 점점 어려워집니다. 직업을 가지게 되면 우리에게 떨어지는 아주 많은 통제 메커니즘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면면이 이들 메커니즘과 연관이 있습니다 — 일일 스케줄, 옷, 그리고 미국에서는 특히 정기적으로 마약 검사 같은 침해성 절차 같은 것까지 겪어야 하죠. 직업을 가지고 있을때나 안 좋은 경제 속에서 — 고용 안정성이 거의 없고, 얻을 수 있는 직업의 종류도 빨리 변해버리는 상황 — 그것을 지키고 싶을 때 생기는 불안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직업이 없을 때도 끊임없이 자신의 판매가능성에 대해, 그리고 다음 일자리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유 시간을 자기 개발이나 몸을 관리하는데 쓰기 시작합니다. 그래야만 건강과 기민함을 유지하고 최상의 상태에서 일을 수행할 수 있거든요. 그렇게 해서 일하는 시간과 일하지 않는 시간의 차이가 불분명해지고, 공적인 기능과 사적인 기능의 구분이 사라지게 됩니다. 실업상태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시도와 제약 그리고 통제를 창출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영향력의 상실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일을 하지 않거나(unemployed) 능력 이하의 일을 하는(underemployed) 사람들이 창조적인 일을 많이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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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어떤 명령 같은 것이 존재합니다. 직업을 가져야 하고, 더 많이 더 잘 소비해야 하고, 직업을 위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주고 판매 가능성을 증대해주는 경험들을 소비해야 한다는 명령 말입니다. 참여하라는 명령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낙인이 찍힙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가장 지나가고 싶은 검문소를 지나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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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은건, 총체적인 의미에서 볼 때 누군가의 삶에서 완전한 자율이라든가 전면적인 통제 같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직업이 있든 없든 말이지요. 서로 다른 일련의 제약 조건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 얘기했듯이, 자유는 항상 제약으로부터 발생합니다 — 자유는 제약의 창조적 전환입니다. 제약으로부터 유토피아적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일말의 가능성은 존재합니다. 여지는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여지들은 회색지대에 있습니다. 당신이 정동적으로 감염되기 쉬운, 또는 퍼뜨릴 수 있는 흐릿한 얼룩 속에 있습니다. 그 결정은 결코 전적으로 개인의 힘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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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었다는 의미에서의 자율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만일 일자리를 잃는다면 고립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힙니다. 비생산적이고, 사회의 일원이 아니라는 식으로요.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많은 분야의 사회적 서비스와 치안 기능들과 접촉을 합니다. 이건 바로 제가 사회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 그러나 저는 사회 안에서 불평등과 궁지라는 특정 관계 속에 있는 것이죠. 사회 안에서 나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고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하나의 독립된 실체로서 나 자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어떠한 자리 — 모든 것에서 약간 물러서서, 뷔페음식 고르듯이 선택하는 자유계약자 개념 같은 — 가 존재한다는 것은 허구입니다. 저는 자율의 다른 개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다른 움직임들과 어떻게 접속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접속들을 증대하고 강렬하게 하기 위해 어떻게 변조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연관된 자율 말입니다. 따라서 정동적으로 내가 누구인가는 사회적 분류 — 부자냐 가난하냐, 고용인이냐 실업자냐 — 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러한 분류들을 가능케하는 하나의 기능으로서, 그러나 항상 관계라고 하는 열린 장 속에 있는, 내가 가진 가능한 연결과 움직임들의 집합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즉 나의 잠재력은, 내가 따로 떨어져서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나의 ‘접속되어 있음’, 즉 내가 어떤 방식으로 접속되어 있느냐, 얼마나 강렬하게 접속되어 있느냐에 의해 규정됩니다. 자율은 항상 접속의 성격을 가집니다. 떨어져 있음이 아닙니다. 들어와 있음, 나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주는, 또는 생성의 힘, 발생의 힘을 주는 소속된 상황 속에 있음 입니다. 어느 정도의 자유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 자유가 직접적으로 어디로 이어질 것인지는 사회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분류될지 — 남성인가 여성인가, 어린이인가 어른인가, 부자인가 가난한가, 직업이 있는가 실업자인가 — 에 따라 전혀 다르겠지요. 그러나 이 조건들이나 규정들이 한 개인의 가능성을 완전히 담아내는 상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가 가격을 매기지 않은 범주에 속한 사람에게 동정심을 가지거나, 그들을 대신해서 도덕적 분노감을 표현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면 반드시 도움이 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정이나 도덕적 분노는 그 범주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단지 그 가치 기호(value sign)를 부정에서 긍정으로 전환시킬 뿐이거든요. 그것은 일종의 신앙심, 즉 권선징악 성격의 접근입니다. 정동적으로 보면 그것은 실행적(pragmatic)이지 않습니다. 신분 정체성에 기반한 구분  자체는 문제삼지 않은 것입니다.”(Brian Massumi, Politics of Affect, Cambridge: Polity Press, 2015, pp. 38~41.)

정동적 접속과 자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