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화와 잠재성

정동영화와 잠재성

1. 정동은 “느껴지는 것”이다. 지각하거나 생각하기 이전에 어떠한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 직접성으로 인해 정동은 직관의 대상이다. 가령, 붉은색에서 느껴지는 “붉음” 그 자체는 붉은색을 말로 전달하거나 생각으로 떠올리기 전의 근원적인 실재성을 가진다. 그것은 ‘붉지 않다’라고 말할 때조차 느껴지는 1차적 실재성으로서의 ‘붉음’이다. 사람의 얼굴표정에서 느껴지는 생리 상태, 기분, 심지어 삶 전체의 느낌도 정동에 속한다. 표정은 얼굴 위에서 나타나는 정동의 표현이다. 그것은 얼굴 근육이나 이목구비의 움직임에서 나오지만 얼굴 자체는 아니다. 얼굴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은 각각이 자아내고 있는 특유한 정동이 있다. 어떤 나무는 삐쭉이 뻗어올라 날렵하지만, 어떤 나무는 우람하다. 그 ‘날렵함’과 ‘우람함’은 육체로서의 나무 자체와는 다른 나무의 정동이다. 들뢰즈의 용어를 빌자면, “칼끝의 날카로움”은 금속물질의 칼 그 자체와는 다른 수준의 “외-존재”(extra-being)이다. 그것은 물질도 정신도 아닌, 존재(Being)라고 말할 수도 없는 제3의 다른 양태이다. 정동은 물리적 차원도, 심리적 차원도, 생리적 차원도, 형이상학적 차원도 아닌, “표현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표현된 것”(the expressed)이다. 따라서 정동은 무엇보다도 예술의 대상이고, 예술적인 견지에서 논의해야 한다.

2. 정동은 사물의 “실체”(entity)이다. 자기 원인을 가지며 존재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의미에서 스피노자가 말한 본체(substance)가 아니라, 실질적이라는 의미에서 Entity이다. 가령, 붉은색에서 느껴지는 “붉음”(redness)이나 얼굴에서 느껴지는 “표정”은 그것을 떠올리기 위해 언어나 다른 수단이 필요치 않은, 그 자체로서 느껴지는 표현된 실체이다. 얼굴 표정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실체를 직접 느낀다. 어떤 사람의 ‘행위’나 ‘말’과 달리, 표정에서 느껴지는 “야비함”은 감출 수 없는 그의 실체를 드러낸다. 들뢰즈는 정동을 힘-질(power-quality)이라고 지칭했다. 힘은 운동하려는 경향성이고, 질은 그 운동이 일정하게 머물러 지속하려는 경향성이다. 그런 점에서 얼굴 표정이란 몸에서 흐르는 미세한 운동들이 얼굴이라는 근육으로 이루어진 부동판 위에서 일정하게 머무르며 질적 변화를 표현하고 있는 상태이다.

3. 정동이 실체라는 것은 “시간의 현시”라는 의미이다. 정동은 그냥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또는 시간을 머금고, 몸체 안에 축적된 힘-질의 표현이다. 데카르트가 말했던 시계를 생각해보자. 시계는 내부에서 보이지 않는 태엽의 미세하고 강렬한 운동들이 번호가 새겨진 부동판 위에서 돌아가는 바늘들로 표현운동을 한다. 인간의 몸체도 시계태엽처럼 시간 속에서 축적된 미세한 떨림과 이행들의 집단적 요동을 함축하고, 이러한 요동은 피부나 얼굴 위에 특정한 표정으로 드러난다. 분노와 우울의 표정, 심지어 피부에 퍼지는 알레르기 반응은 몸체의 정동적 변화의 표현운동이며, 표현의 지속은 몸체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남는다. 정동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맨 드 비랑(Maine de Biran)은 “삶의 일반적 감정”(le sentiment général de la vie)이나 “직접적 정감”(les affections immédiates)이라고 부르는 특정할 수 없는 막연한 감정 상태를 언급했다. 즉 의식의 의지적인 지향성(응축, 대상지향, 초점 등)이 결정되기 이전의 불특정한 정동을 말한다. 가령, 일시적인 반신불수 환자의 마비된 신체 부분에 자극을 가할 때 그가 느끼는 특정할 수 없는 막연한 통증이나, 감각과 자아의식이 일시적 중단 상태인 수면 중의 꿈이나 몽유병처럼 내적인 정념으로 나타나는 생리 현상이나,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간혹 보는 광기의 비전들(황금색 벌판이나 사자머리 형상 등)은 지향성이나 시-공간적 좌표로 정향된 의식(심리) 이전에 삶의 바탕이 되는 순수하고도 일반적인 정동이 있음을 예증한다. 그것들은 위치나 장소를 지정할 수 없는, 시각적 결정이 일어나기 전의 몽롱한 상태의 어렴풋한 그림자나 빛의 덩어리처럼, 그냥 막연히 ‘~있다(there is~)’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일차적 감정이며, 의식적 삶의 배후에서 수동적인 잠재태로 고여 있는 무의식적 삶의 느낌이다. 이러한 불특정성은 몸체에 내재하는 “과거일반”(pastness)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의식에 떠오르는 과거의 특정 사건이나 장소가 아니라, 구체적 경험들이 잠재화되어 몸체에 내재하는 시간 전체의 기운(힘-질) 같은 것이다. 기억, 사유, 상상, 그 모든 주관적 능력들은 자신들의 재료를 바로 이 과거일반으로 뛰어 들어가 길어 올린다. 즉 과거일반으로서의 정동적 잠재성은 주관성의 토대이다. 뒤프렌(Mikel Dufrenne)은 이것을 경험의 근원적 ‘토대’나 ‘근거’로서 주관과 객관에 잠재하고 있는 “정동적 아프리오리”라고 불렀다. 또는 그것은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가 “살결”(la chair)이라고 말했던, 경험의 질료적 ‘토대'(fondement)이다. 어쨌든 정동을 실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시간의 표현”이라는 의미이다.

4. 영화에서 정동을 가장 잘 드러내는 형식은 물론 클로즈업이다. 정동이 특히 얼굴표정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클로즈업은 단순히 사물을 가깝게, 크게, 자세히 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기능적 절차들이 필요하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클로즈업의 본질은 사물로부터 감정의 차원을 추출하고, 사물을 실체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것은 헝가리 영화학자 벨라 발라즈(Bella Balázs)의 생각이다. 클로즈업으로 제시된 얼굴은 그 자체 충만하고 완전하다. 그것을 지각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좌표도 필요치가 않다. 실제 사물은 지각되기 위해 자신의 좌표(공간, 시간, 사회, 역사 등)를 가진다. 가령, 사진으로 찍은 증거물의 크기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다른 물건(담배, 지폐 등)을 같이 찍어야 한다. 크기의 지각은 그것을 상대화할 수 있는 비교대상을 필요로 한다. 지각 가능한 것은 좌표를 가지며, 그 좌표들은 사물을 규정해줄 근거나 기준 같은 것이다. 그러나 클로즈업된 얼굴을 볼 때 우리는 공간을 지각하지 않는다. 공간의 감각이 제거되는 것이다. 클로즈업에는 좌표가 없다. 비교하거나 객관화 할 좌표를 잃은 독단적 대상, 즉 감정의 수준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증거사진과는 반대로 광고사진에서는 객관성을 지우고 상품의 감정을 최대화하기 위해 주변의 다른 사물들은 배제한다. 한마디로 클로즈업은 육체와 공간으로부터 정동을 ‘탈영토화’한다. 클로즈업은 ‘미소 짓는 고양이’로부터 ‘미소’ 그 자체만을 추상하는 효과를 달성한다.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물체’로부터 ‘운동성’ 그 자체가, 질료를 감싼 ‘형상’으로부터 ‘질’ 그 자체가, ‘얼굴’로부터 ‘표정’이, 지시-기능 체계로서의 ‘육체’로부터 ‘실체’가 그 자신의 영토를 빠져나온다. 앱스탱(Jean Epstein)이라는 프랑스의 영화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도망치는 겁쟁이의 저 얼굴은 우리가 그것을 클로즈업으로 보자마자, 그의 ‘비겁’을 직접 보게 된다. ‘느껴지는 것’, 즉 실체를 본다.”

5. 정동은 본성적 차이의 근거이다. 베르그송은 고대철학자 제논(Zenon)의 잘 알려진 아킬레스와 거북의 달리기의 역설을 해설하면서, 운동을 동질화된 공간으로 이해한 사유방식에 그의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아킬레스와 거북의 운동은 각각 질적으로 다른 운동성, 즉 운동의 질 자체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데 제논은 이들이 같은 공간에서 동질적인 운동을 한다고 부적절하게 이해했기 때문에(동질적 공간인 직선 위의 점들을 통과하듯이) 아킬레스의 추월가능성을 부정했다는 것이다: 경향성으로서의 운동과 공간(또는 운동체)의 혼동. 따라서 베르그송은 동질적인 공간에서의 이동행위라는 부적절한 관념으로부터 본성적으로 다른 경향성 또는 운동성을 추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정동이론에 해박한 마수미(Brian Massumi)에 따르면 정동은 ‘집단적'(collective)이다. 여기서 집단적이란 정동이 단일한 단위가 아니라 다중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운동-이행이라는 뜻이다. 가령, 사자가 먹이를 찾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 그것은 직선위의 공간적 점을 통과한 것으로 환원할 수 없다. 그의 운동에는 대기의 변화, 근육의 수축과 이완의 변화, 허기 상태의 변화, 심리적 변화 등, 중층결정 수준의 변화와 이행들을 겪는다. 따라서 사자의 운동과 사슴의 운동, 아킬레스의 운동과 거북의 운동은 본성적으로 다르다. 같은 종류의 사물조차 정동적 뉘앙스로 구분되는 질적 차이, 뉘앙스의 차이, 시간의 차이를 구별하고 나누는 것은 들뢰즈의 예술 비평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어쨌든 정동은 본성적 차이의 근거이고, 나아가 존재를 시간 속에서 긍정하는 단초이다. 베르그송주의가 인식 방법으로서 변증법이나 실증적 과학이 아닌 ‘직관’을 주장했던 이유는, 바로 실질적인 것, 실체적인 것,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정동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6. 정동영화라는 장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정동영화의 기본적인 근간은 클로즈업이다. 영화에서 클로즈업을 논의해야 한다면 칼 드레이어(Carl Dreyer)의 편집방식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잘 알려진 <잔다르크의 수난>(The Passions of Joan d’Arc)은 대부분의 장면이 얼굴클로즈업으로 이루어진다. 이 작품의 내용은 잔다르크가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화형을 당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사건의 전개는 없고, 대부분이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의 얼굴만 보여준다. 사건의 사실적 전개(행동) 이면에 재판에서 드러나는 정동을 드러냄으로써 잔다르크가 겪는 수난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이 작품에는 얼굴클로즈업 뿐만 아니라, 드레이어 자신이 명명한 “절단화면”(cutting montage)과 “탈프레임”(deframing) 기법들이 등장한다. 간단히 말해, 인물이나 사물의 형태 또는 그들이 위치해 있는 공간의 구도를 비정상적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프레임을 사선으로 혹은 수평선으로 예상치 못하게 잘라버리거나, 얼굴이나 공간의 특정 부분을 크게 확대하는 식이다. 이로 인해 인물들이 재판정의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절단화면과 탈프레임을 통해 드레이어는 사물과 공간의 유기성을 박탈하고, 행동성을 제거함으로써 도출되는 정동(절망에 빠진 잔다르크)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7. 절단화면과 탈프레임처럼 공간의 유기성을 이탈시켜 정동을 추출하는 이러한 방식을 들뢰즈는 “불특정 공간 구성”이라고 불렀다. 불특정 공간을 구성하는 드레이어의 또 다른 특이한 편집방식 중에 “흐름편집”(flow montage)이 있다. 이것은 주로 <오데트>(Odette)와 <거트루드>(Gertrude)라는 작품에서 두드러지는데, 카메라가 물 위에서 미끄러지듯이 공간을 흘러 다니는 느낌을 자아낸다. 카메라는 인물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움직임을 따라다니거나(<거트루드>), 인물들의 좌우 움직임을 수평으로 패닝 한다(<오데트>). 그리고 표준렌즈를 사용해서 화면 심도를 지우고 평면적인 이미지를  유지한다. 원근감이 사라진 화면은 엷은 색조와 함께 꿈이나 망상에 사로잡힌 듯한 분위기를 낸다. <오데트>는 종교적 정념에 사로잡힌 한 가족의 닫힌 삶에서 열린 구원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고, <거트루드>는 세 명의 남자들(관료, 시인, 음악가)과의 사랑에 한계를 느껴 자신만의 절대적 침묵으로 칩거한 여성에 관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Gertrude는 Ibsen의 Nora를 변형시킨 인물처럼 보이는데, 침묵으로 들어간 사람의 정동을 추출하는 것이 이 작품의 목적처럼 보인다. 이 작품들은 모두가 삶의 재발견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중요하게도 그 계기를 정동의 해방과 관련 짓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흐름 화면은 남성들이 지배하는 원근법적 공간을 물의 흐름 같은 비-원근법적 잠재성으로 대체한 이미지를 통해 여성의 감정을 해방한다. 드레이어에 따르면 원근법 같은 공간 재현은 지적이고 분석적인 체계에 기반을 둔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행동성의 공간을 조성하고, 따라서 정동의 말살을 초래한다.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는 카메라를 흐르게 하고, 인물들을 평면적인 단조로움 속으로 밀어 버린다. 흐르는 카메라 속에서 세계와 인물들은 지적인 대상이 아니라 느껴지는 존재로 재탄생하게 된다.

8. 드레이어의 정동편집은 ‘공간과 심도의 소거’로 요약할 수 있다. 입체적 공간(3차원)의 재현에서 평면(2차원)으로의 추상은 지각을 일차적인 정동으로 이끈다. 브레송(Robert Bresson)은 드레이어와는 반대로 불특정 공간을 구성한다. 그는 공간과 심도를 소거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파편으로 만들어 “재공간화” 한다. 가령, <사형수 탈출하다>(Un condamné à mort s’est échappé)에서는 공간을 전체가 아닌 파편으로 제시한다. 문고리, 창문, 바닥, 벽, 침대… 수감자가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손으로 더듬어대는 모든 대상들을 조각난 형태로 수용하고, 이 정동적 파편들의 축적을 통해 폐쇄된 감옥 전체가 정신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소매치기>(Pickpocket) 역시 소매치기의 손이 닿는 사람들의 주머니, 신문, 지갑,.. 등, 그의 활동무대인 리옹역 전체가 손의 정동에 의해 구성되는 촉각적 공간이 된다. 이것은 장님이 사물을 더듬으면서 공간 전체를 느끼는 것과 유사한 과정의 정동적 클로즈업으로 간주될 수 있다. 드레이어의 탈공간화와 달리 파편들의 종합에서 얻어지는 이미지를 들뢰즈는 “정신적 정동”(spiritial affects)으로 규정한다. 이미지 파편들은 손으로 직접 만져서 느껴지는 것에 상응하는 촉각적 가치를 가진다. 그것들은 전체(형태)를 지향하는 시각에 의해 구성되는 광학적 대상이 아니라, 닫힌 공간을 빠져나가기 위해 더듬는 정동적 파편들이다. 들뢰즈가 “파편화”(fragmentation)라고 명명한 이 정신적 정동의 구성은 이미지를 벽돌처럼 쌓아올려 일관된 유기적 전체를 만드는 쿨레쇼프(Kuleshov)식의 유기화가 아니다. 오히려 파편화는 유기적 재현에 빠지지 않기 위한 브레송의 탈유기적 시도라고 보아야 한다. 재현(representation)은 유기적 전체에 대한 욕망에서 나온다. 또 전체란 미리 주어진 것이다. 미리 주어진 전체에 대한 욕망, 그에 따르면 이것이야 말로 파시즘이며, 그의 파편화 편집은 파시즘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공간과 사물을 고립시키고 그 부분들을 떼어내어 그로부터 상관적 좌표를 소거하면, 그 파편들은 실제적이고 기능적으로 규정되었던 일치 조화된 연결성을 벗어나, 마치 시멘트를 바르지 않은 돌담처럼, 엉성하고 불안한 관계로 잠재화 된다. 관계의 잠재화는 새로운 리듬과 새로운 질적 조건들에 의해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강화한다. 이것은 사운드를 다루는 방식에도 해당된다. 배우들의 연기와 분리된 단조롭고 중성화된 발성(백색 발성), 보이스 오버, 후시 녹음 등, 사운드는 이미지를 보조하거나 이미지와 호흡을 맞추지 않고, 마치 이미지로부터 따로 떼어낸 것처럼 별개로 구성된다. 브레송에 의하면 자연스러운 연기와 발성은 관습적 관계를 불러온다. 익숙한 관행의 재현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요소들을 파편화하여 다른 어떤 이미지와도 연결될 수 있도록, 사운드와 발성 그리고 연기까지도 중성화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삶에 새로운 종속을 부여하는 것이다.

9. 불특정 공간 구성을 통해 정동을 도출하는 또 다른 예는 이벤스(Jorge Ivens)라는 네덜란드 감독이다. 비의 현상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작품인 <비>(Regen)에서 표현한 비는 전체 윤곽이나 외형을 파악할 수 없는, 그 자체가 이미 쏟아져 내리고 있는 과정(becoming)으로서 제시된다. 여기서 비는 “사물의 상태”(the state of things)가 아니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관점들의 시각적 인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뭇잎에 부딪치는 비, 웅덩이에 고여 파장을 일으키는 비, 우산에 떨어지는 비, 창가에서 무늬를 내며 창밖의 풍경을 머금고 있는 비, 아스팔트의 굴곡진 표면에 따라 도시를 반사하는 비… 정동적 파편으로서의 비는 실제적인 사물도 추상적인 관념도 아니다. 그들은 창문에 맺힌 빗방울들 각자에 깃들어 있는 세계들만큼이나 다양한 면들로 나뉘고 부서지고 흩어지며 현존하는 특이성들의 집합이다. 그의 작품 <다리>(De Brug)에서도 금속과 철근덩어리로 된 거대한 교각은 사물의 상태가 아니라 비물형적 이미지, 즉 무한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포착된 ‘프레임’ 속으로 흩어져서 잠재화되는 불특정 공간으로 제시된다. 그 교각의 이미지는 그것을 설계한 엔지니어의 이데아가 드러난 것도, 그가 의도했던 교각의 실제 기능이 실현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물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순수특질 또는 정동적 효과들의 낯설고 불특정한 계열들로 이루어진 “시각적 변이들”이다.

10. 이밖에도 불특정 공간을 통해 정동을 추출하는 많은 감독과 유파들이 있다. 그 중 20년대의 독일 표현주의는 빛과 어둠을 이용해 공간과 사물의 정동(특히, 어둠과 싸우는 공포)을 추출한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연초점(soft focus) 편집의 대가로 잘 알려진 슈테른베르크(Joseph von Sternberg)의 서정적 이상화(lyrical idealization) 역시 정동 영화의 좋은 모델이다. 그는 인물을 순수한 백색 공간에 가두어 놓고 재현적인 윤곽선을 잃어버린 순수한 표정이나 정동의 효과를 이상화 한다. 서정적 추상화를 통해 잠재적 질이 해방되는 과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11. 정동영화가 정동적 잠재성을 구현하는 양상의 특징은 이미지의 ‘탈유기화’, ‘비재현성’, ‘탈공간화’로 요약할 수 있다. 정동영화는 유기성과 기능성을 추상적 지대(어둠, 백색, 파편화, 흐름, 불특정 공간 등)로 변형시켜 그로부터 정동을 추출한다. 정동영화가 이미지를 잠재화할 때, 그 이미지를 접한 우리는 사물과 공간에 대해 이전의 현실과는 다르게 지각한다. 역설적으로 정동영화의 탈기능화는 삶의 ‘필요’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오히려 삶의 ‘실상'(실체)에 접근하는 역량을 가시화 한다. 생명체는 생존을 위해 세계를 공간화하고, 유기화하고, 재현적 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가령, 사냥을 하려면 사슴의 운동을 점들의 궤적으로 환원해야 한다. 사슴에 관한 다른 것은 필요 없다. 사슴의 운동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한한 잠재성의 변화를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염소가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는 풀밭 전체의 푸른색을 식별하는 것 외에 다른 능력은 필요 없다. 삶의 필요로부터 초연한 예술가였다면, 가령, 휘트먼(Walt Whitman)의 시에서처럼, 작은 풀잎 하나에도 깃들어 있는 무한한 정동적 힘에 주목했을 것이다. 비물형(incorporeal)의 힘-질은 현실화하기 위해 공간을 점유해야 하고, 유기적 기능을 부분들에 배분해야 하고, 물화되어 형태를 모방해야 한다. 이 현실화 과정은 실체로서의 정동을 말살하는 경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유기체 전체를 유지하려면 그것을 이루는 개별적 요소들은 자율성을 빼앗긴다. 제논의 아킬레스와 거북의 운동에서 보았듯이, 운동의 공간화는 본성적 차이를 무화시키고 동질화한다. 베르그송의 유머러스한 비유처럼, 아킬레스와 거북이 아니라 두 마리 거북의 운동인 것이다. 세계를 동질화된 운동으로 설명하려는 물리학적 관점에서는 시간조차 공간으로 환원되어 설명된다(상대성이론). 현실을 가장 효율적으로 설명한다고 자처하는 과학기술(주의)의 실상은 ‘수’와 ‘공간’의 관점에서 자연을 제한하는 체계이다. 물론 과학기술은 삶에 필요한 기능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 역사적으로 볼 때) 삶의 배후로서의 정동과 잠재성을 말살하는 방식으로 발달했다. 그럼으로써 물질과 공간의 예측 가능한 결정론적 체계 속으로 삶을 닫아버린다. 결정론적 체계를 가장 극대화한 것으로 보이는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이 잠재성을 여는 쪽으로 가리라고는 아직은 생각하기 어렵다. 오히려 잠재성의 포획과 삶의 수축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우리의 삶은 기능과 효율을 최대의 가치로 수용하는 과학기술-자본주의에 정향되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서 생명은 양적인 체계를 구성하는 개별화된 단위로서, 퍼스(C. S. Peirce)의 용어를 빌자면 이자성(Secondness)의 지시체계 내 상대적 항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효율성의 강요에 직면한다.

12. 그러나 기능과 효율의 내부 또는 그 이면에서는 그것의 붕괴를 예고하는 반테제의 움직임들이 아우성을 치며 잠재한다. 예컨대, 예술가들은 이러한 잠재적 징후를 읽어낼 줄 아는 집단이라 할 것이다. 정동영화가 다양한 형식적 유희를 통해 이미지를 잠재화할 때, 즉 사물의 기능을 고의로 정지시키고, 소통에 필요한 재현적-서술적 요소들을 파편화하고, 습관적인 도식이 보장하는 온전한 형태의 이미지를 해체하여, 공간으로부터 정동을 빼내기 위해 시도할 때, 그 이미지에 연루된 일체는 이미 확립된 현실적 관계의 유효성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지각, 새로운 권리, 새로운 정당성, 나아가 관계의 새로운 구성을 요구받게 된다. 이러한 예술적 실천은 삶의 위상을 재점검 하려는 일종의 인문학적 비평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한, ‘인문학적’이란 현실적 필요와 유용성에 삶을 종속시키는 일체의 상대적 체계들을 비판하고, 현재 필요한 정보를 재빠르게 수용하고 처리하는 기능을 넘어, 사물의 드러나지 않은 이면으로서 과거와 미래를 투시하고, 삶의 조건들을 통찰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결론으로 윤리적이거나 정치적인 의미를 언급해야 한다면, 정동영화는 간단히 말해 정동의 해방, 즉 삶을 효율과 기능에 종속시키는 모든 결정론적 체계에 대하여 비결정론적 지대의 구성을 통한 예술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비교문학> 제73호에 실린 논문 <정동영화가 추구하는 잠재성의 인문학적 가치>를 요약한 것이다.

정동영화와 잠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