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광 없는 예술

열광 없는 예술

NY

영국 런던에서 시작한 Affordable Art Fair라는 미술 전시회가 있다.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저렴한 미술 전시회>쯤 될 것이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저렴한 값에 미술품을 감상하고 구입할 수 있도록 마련된 전시회이다. 1999년도에 처음 런던에서 열렸고, 그 후로 일년에 두 차례씩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전시회를 한다. 2015년에 서울에서도 개최를 하였고, 일정에 따르면 올해(2016) 9월에 다시 한번 서울에서 열린다고 한다.

예술작품을 거래하는 가격이 어느 정도로 저렴한가 하면 최고 3천 파운드에서 최저 수십 파운드에 이른다. 참여하는 갤러리도 행사 지역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백여개 안팍이고, 행사기간 동안 수만 명의 관람객들이 방문하여 작품을 감상하고 구매한다. 좀 더 자세한 정보는 행사 홈페이지(www.affordableartfair.com)를 참조 하시길.

예술작품을 저렴하게 판매하고 구매하는 관행은 예술의 생산과 유통과 보존 그리고 향유하는 전 과정의 민주화에 있어 중요한 단초이다. 재력과 권력을 쥔 소수가 예술을 독점하여 어두운 금고 같은 곳에 보관을 하고는 아는 사람들끼리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는 예술의 신비화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술을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신비로운 어떤 것으로 만드는 장본인들은 주로 예술 관련 지식인들과 예술 상인들 그리고 재력의 소비자들이다. 이들은 명성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예술이 아닌 그 명성에 열광하기를 원한다. 열광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필요치 않으며(오히려 방해가 된다), 평론가나 상인들이 선전하여 배출한 베스트셀러 작가 몇 몇이면 충분하다. 예술에의 열광은 예술가들을 소멸하게 한다. 열광의 본질은 신비화이고, 신비화는 무지의 소산이므로, 이는 예술에 대한 사람들의 냉소만을 환기할 뿐이다.

예술은 인생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인간이 만든 유일한 수단이다. 어른이든 아이든 예술을 접하지 못한 인생은 악착같고 반복적인 생존만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예술은 숙명적인 것처럼 보이는 완고한 삶의 굴레를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고 단절할 수 있게 한다.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낯설고도 이질적인 어떤 인생이 액자에 담겨져 놓여있을 때, 혹은 인쇄된 활자로 적혀 있을 때, 우리는 어느 순간에 홀연한 깨달음 혹은 가벼운 홀가분함을 안고 우리 자신의 인생을 다르게 바라볼 가능성이 높아진다. 삶에 이토록 평화로운 혁명을 줄 수 있는 수단은 별로 없다.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술복제 때문에 생긴 서구 예술의 변화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했다. 우선 종교와 계급에 의해 신비화되었던 예술이 그 신비를 벗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술품을 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예술은 특정 계급이나 교회의 배타적 보호로부터 해방되어 대중적이고 민주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예술이 흔해빠지게 되고, 원본의 권위와는 무관하게 어느 누구든지 변형하고 왜곡할 수 있게 되면서, 예술의 가치가 저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으로 예술이 이용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해지게 되었다. 나치정권과 파시스트들이 정치를 심미화했던 경우가 좋은 예이다.

요컨대, 예술품의 기술적 복제는 예술을 종교와 계급으로부터 해방시켰지만, 대신에 예술을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예술의 이러한 무가치함 속에서 또 다시 신비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원본작품에 대한 열광이다. 원본작품은 예술작품이기 보다는 골동품이나 유적 혹은 물적 재산의 가치를 갖는다. 모든 사람들이 향유하는 대상이 아니라, 재력과 권력과 사회적 수완을 상징하는 소유물이 된 것이다. 뉴욕 미술시장에서 유명한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계층은 주로 펀드매니저라든가 부동산 업자라는 사실은, 단지 예술 애호 층이 변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예술품이 개인의 소장품 목록에 오르게 되고, 특정 장소의 밀실에 갇히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벤야민은 “예술을 정치화”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술의 정치화란 정치의 설득력을 주는 도구로 예술을 활용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에술을 민주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술의 가치가 모두에 의해서 부활할 수 있도록, 예술을 심미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수준에서 다루어야 함을 뜻한다. 판권, 재산권, 배포권, 저작권처럼 예술에 있어 이러한 법적 용어들이 나오게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소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사회가 그에 합당한 문화를 조성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열린 광장, 열린 시장, 열린 전시회 같은 공간이 필요해진다.

자세히 관찰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보기에 저 전시회에는 예술적 신비화가 없어 보인다. 예술 공간 전반에 열광적 명성이 없다. 단지 즐겁고 유쾌한 향유 만이 있을 뿐이다. 관객은 더 이상 이유도 모른 채 신비화된 명성으로 작품을 감상하지 않고, 순전히 자신의 취향과 기억과 심미적 능력으로 그 작품들을 대면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가 왠지 끌리는 작품 앞에서 더 오랫동안 머무를 것이고, 그 작품에 더 머무르고 싶다면 기꺼이 돈을 지불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작품에 대해, 작가에 대해, 혹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홀연한 깨달음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예술이다!

열광이 없는 예술에서의 관람객들은 굉장한 규모의 재력으로 작품에 비싼 값을 치르는 특정 소비자가 아니므로, 예술가들이 큰 돈을 벌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한 두 명의 베스트 셀러 작가 외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신비화된 문화에서의 예술활동에는 비할 바가 못될 것이다.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큰 돈이 아니라(큰 돈은 상인에게!), 자신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향유할 수 있는 관객(열광은 속물에게!), 그리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예술활동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약간의 돈이면 충분하다. 그들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직업은 사업이 아니라 예술이다.

 

열광 없는 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