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아포리즘

니체와 아포리즘

니체만큼 자신을 위해 글을 쓴 사람이 있을까? 자신이 느끼기에 이토록 쉽게, 즐겁게, 통쾌하게 책을 쓴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섬광의 대가이며, 섬광의 어버이이며, 섬광의 벌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에 관한 아포리즘으로 성을 쌓고 싶어 한다. 정념을 냉각시키지 않고도 가장 고상하게 토로할 수 있는 형식은 아포리즘이 제격이다. 아포리즘은 논증이 아니므로 구차한 논리적 이성에 호소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제청하고 박수치고 손사래를 칠 수 있는 의지와 직관의 육중한 무게를 배가한다. 아포리즘은 논증처럼 감산(減算)이 아니라, 더하기, 모임, 회합, 동호회, 말하자면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젊은 굿맨 브라운(Young Goodman Brown)이 한 밤중에 “숲”에서 목격했던 바로 그 무시무시한 악마적 집회와도 같은 것이다. 아포리즘은 촉각적이다. 피부를 파고드는 금속의 탄두처럼, 우리는 읽는다기 보다는 폭격을 당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자신 안에 아포리즘이 이미 있었음을 깨닫는다. 아포리즘은 공통하는 육체, 관념, 실재의 합창이며 코러스이다. 그래서 아포리즘은 출발이 아니며 과정도 아니다. 말하자면 갈무리이다. 혹은 다음을 기약하며 우렁차게 외치는 끝 인사이다. 읽히는 글, 읽기 좋은 글, 읽기에 쾌적한 글,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친절하고 이기적인 글, 그래서 우리를 머무르지 못하게 하는 글이 있다. 그러나 다른 집회도 있는데, 거기에는 쓰게 하는 글, 쓰고 싶어지게 하는 글, 오만하고 불친절한 글이 있다. 똑같이 오만하고 불친절한 대응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우리의 오기를 자극하는. 니체의 섬광들은 우리의 근성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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