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시카의 <자전거 도둑>과 잉여실재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과 잉여실재

바쟁(Andre’ Bazin)은 데 시카(Vittorio De Sica)의 『자전거 도둑(Bicycle Thief)』을 공산주의 영화라고 논평한 적이 있는데(주1), 그것은 그 작품이 사회적 환경(“도둑질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 속에 암묵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개인의 무의식적 요구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영화 어디에도 정치적 기치나 계급 혁명과 같은 공산주의적 테마가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그 환경을 조용히 목도하면서 이미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정치적 구호가 없이도 우리는 충분히 정치적일 수 있다. 거기에는 리얼리즘 특유의 정치-역사적 낙관(樂觀)이 있는데, 예컨대 작가가 명시적으로 의도를 표명하지 않아도, 사실적 이미지에 충실한 작품은 이미 역사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의식을 내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적 이미지는 역사적 필연이 발생하는 환경에 대한 하나의 목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그리 간단치는 않다. 사실적 이미지가 무엇인가? 또 그것을 어떻게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인가? 리얼리즘에서 실재성(reality)의 문제가 종종 실재적인 것(the real)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the mental)의 문제로 환원되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각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지각 자체의 환경이다.

사실적 이미지는 우선 일상적인 것들을 통해 나올 것이다. 예를 들면, <자전거 도둑>에서 아버지와 함께 로마 거리를 헤매며 자전거를 찾던 아들이 갑자기 골목길에서 잠시 동안 소변을 본다든지, 자전거를 찾아다닌다고 하는 줄거리 전체의 중심이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의해 중단되어야 한다든지, 소나기가 그치기를 기다리던 부자(父子)는 그들과는 무관한 퀘이커 교도들의 알아듣기 힘든 수다를 듣지 않으면 안 된다든지, 또는 <움베르토 D>에서 한 하녀가 아침에 일어나 기계적인 나른한 몸짓으로 청소를 한다든지, 물 속의 개미를 빠져죽게 한다든지, 커피 분쇄기를 들어올리거나, 발을 쭉 펴서 발가락으로 문을 닫는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이와 같은 사소한 사건들은 현실적 존재로서의 인물들이 불가피하게 겪게되는 우연성의 산물일 뿐이다. 만일 영화가 하나의 문학이나 드라마가 되기 위해서는 이 소소한 것들이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바쟁이 데 시카와 자바티니(Zavattini)를 위시한 네오리얼리즘을 새로운 형식으로 규정한 이유는, 우연적이고도 부수적인 사건과 같은 실재의 이미지가 스크린의 새로운 요소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자바티니는 네오리얼리즘을 “우연성의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사건과 사건간의 응집력은 느슨하고 산만하여, 예컨대 스타니슬라브스키나 푸도푸킨이 강조했던, 연출에 있어서의 ‘에너지 보존 원칙’은 존재론적 의미에서 영화적 현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인물들뿐 아니라 실재하고 있는 모든 존재의 행위에는 어떠한 초월성에 종속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들의 고유한 법칙에 따라서만 존재하는 표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들은 영화의 최종적 명제를 가시화 하는데 있어서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다. 하나의 중심으로부터 독립하여, 신체-기관들간에 서로 운동을 주고받는 이 내재적 행위들은(주2), 기능과 의미의 주변에 산발적으로 흩어져있는 여분이며 잉여이지만, 동시에 그 이미지들의 내재성 속에는 중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존재론적 연민 같은 것이 있다.

잉여실재의 총체가 스크린 위에서 일정한 지속을 이루고 있는 이미지를 바쟁은 날 이미지(fact-image)라고 불렀다. 네오리얼리즘 작가들이 다루었던 재료로서의 현실은, 가령 표현주의에서 보게되는 주관성의 질적 변형에 의한 지각이 아니라, 베르토프(Dziga Vertov)나 페소스(Dos Passos)가 추구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의 카메라-눈에 의한 지각, 그리고 순전히 베르그송적인 의미에서 양적으로 수축된 순수지각에 머물며, 이는 하나의 전체로 용해될 수 없는 단편적 속성을 띠고 있다. 현실은 더 이상 미리 준비된 주관적 기획에 의해, 특정한 하나의 관점으로 이루어진 이데올로기적 조형성으로 재현될 수 없다는 것, 혹은 모든 사안들이 연출가의 머리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거나, 마치 역사가 하나의 정신성을 갖기라도 하듯이, 모든 사건들이 주인공의 심리와 행동의 주변에 모여드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네오리얼리즘에 있어 문제는 두 순진한 부자(父子)가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을 것인가에 있지 않으며, 무산자(無産者)가 될 위기에 처한 안토니오와 브루노의 계급적 심리에 있는 것도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노동자의 구부정하고도 넓은 폭의 걸음걸이, 또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버지의 곁을 따라다니는 꼬마의 종종걸음 같은 것들이 문제인 것이다(주3). 그래서 저 인물들에게 동정을 갖고 사회적 불의에 맞서 분노하거나, 나아가 비교적 근본적인 사회 정치적 처방을 통해 그들을 해방시키거나 하는 문제는 이차적 결과일 것이다. 역사적 테마는 실재의 필연적 운동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인위적 변형을 전혀 가하지 않으려는 네오리얼리즘에 있어 잉여실재의 이미지가 중요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이때에 예술이 갖추어야 할 형식은 해석이나 표현이 아니라, 관찰(aim at) 그 자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연출가뿐 아니라 카메라의 태도와 관계가 깊은 이 개념은, 한마디로 정신의 몽따쥬가 아니라 형사의 시선처럼 실재를 면밀히 주시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만약에 네오리얼리즘 작품들이 관객에게 불가해한 모호성만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바로 관찰과 주시의 상황 속에서 불가피하게 설정된 지각의 환경상태, 즉 실재와 카메라간의 해소할 수 없는 거리에 있을 것이다. 카메라는 표현된 현실이 아니라 그 스스로 존재하는 현실 곁에 머물러야만 한다. 왜냐하면 실재성이란 오로지 존재하는 것들의 내재적 관계 양태들에 의해 발생하는 행위 외에는 어떠한 초월적 힘도 덧붙여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의 사건이 연출가의 스타일에 의해 변형되거나, 그의 특정 관점이 덧붙여져서 표현되지 않고도, 그 진실성이 충분히 드러난다면, 그 사건은 이미 스스로 강렬해 지면서 그 자신의 본질이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바쟁은 영화가 이데올로기의 심미적 형식인 표현에 감염되지 말 것을, 그리하여 자연을 왜곡하지 않을 것을, 아울러 문학성으로부터 단절할 것을 요청한다. 몽따주를 지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허구적 이미지들은 영화가 아닌 문학의 본질에 더 가깝기 때문이었다. 네오리얼리즘 작품을 논의하면서 연속쇼트(sequence shot)의 형식을 강조했던 것도, 그 형식의 도큐멘타리적 요소를 통해 몽따주를 지양하고, 나아가 문학이 아닌 영화 고유의 존재론을 확립하려는 데에 있었다. 그에 따르면 영화는 다만 자연이 스스로 강렬해 짐으로써 그 자신의 본질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일 때 이를 모방하면서 존재와 관계한다. 바쟁이 이를 모방이라고 부른 것에는 좀 유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방이 아니라 일종의 대면상태, 더 심오하게는 기다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연속쇼트(sequence shot)는 차분하고도 초연한 지각상태 속에서 존재의 내재적 강렬함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형식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바쟁이 말했듯이 이는 스타일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스타일을 넘어선다. 마찬가지로 이는 수동이 아니라 능동의 초과이다.

바쟁은 관찰이나 주시가 내포하고 있는 심오함을 보여주기 위해, 네오리얼리즘의 몇 가지 형식적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다(388-394). 그의 에세이들 중 가장 아름다운 구절의 하나인 이 논의에는, 예를 들어, 연기 관념이나 연출 관념의 소거(消去)와 같은 역설적 방법이 포함된다. 이 모든 논의들을 요약해보면, 그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중성적 투명성”이라는 용어에 나타나는바, 인간적 지각의 불순물에 의한 빛의 굴절이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392). 그리하여 자연에 어느 것도 덧붙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 심지어는 남겨진 모든 의심스러운 것들조차도 모조리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전거 도둑>에 관한 에세이에서 그가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심오한 ‘소멸’의 개념이다(주4). 작품 속에서 모든 연기자들의 연기 관념을 소거시키고, 아울러 연출이나 표현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을 그 한계로까지 소멸시킴으로써, 영화를 표현의 수준이 아닌 존재의 수준으로 밀고 나아가는 것이다.

결국 중요해지는 것은 실재, 실재의 지속, 그리고 카메라의 기다림과 같은 것인데, 이 모든 것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영상으로부터 모든 명시적인 것들을 소멸시키고 익명(匿名)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존재론적 객관성을 영화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지각의 환경이란 바로 이 익명에 있다. 그 때문에 배우는 <자전거 도둑>에서의 노동자와 꼬마처럼, 혹은 비스콘티(Luchino Viscontie)의 <대지는 흔들리다>에서 실제 어부들처럼 익명의 존재가 아니면 안 되며, 연출 역시 투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 때의 익명이란 모든 이름(identity)들과 그 의식을 넘어서는, 그리하여 지각 불가능한 상태까지 나아가는 초월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바쟁은 배우 관념의 소멸이 연기 스타일의 초월의 결과이며, 마찬가지로 연출의 소멸 또한 서사 스타일에서의 진보의 결과라고 지적한다(392). 이것은 장 미트리(Jean Mitry)가 말했던 공존재(Mitsein, being-with)의 개념(확인되지 않은 누군가의 눈)과도 다른 것이다(주5). 왜냐하면 공존재란 함께 움직이거나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에 의한 지각이지만, 소멸된 익명의 지각이란 오히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말한 바 있는 순수현존, 가령 “There is…”와 같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이후의 “존재하지 않는 존재(existence without existents)”,  나아가 존재를 넘어선 존재의 지각에 가깝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상징계로 포위되지 않은 산만한 잉여실재가 초과하여 차라리 진공상태라고 해야할 것이다. 진공상태의 지각이란 범신론적 의미에서의 신의 지각, 모든 인간주의적 의식이 완전 연소된 상태의 지각, 바로 초인(overman)의 지각이 아닐까?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가 『윤리학』에서 논증한 유일 실체로서의 신도 따지고 보면 절대적 권능이 무한해 질수록 소멸해 가는 역설적 신이 아닌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익숙해진 의식이 아니며, 하나의 관점에의 종속도 역시 아니며, 저편에 대한 적대적 승리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반대로 그 모든 것들로부터의 해방이 아니겠는가? 맑스(K. Marx)에게 있어 근본적인 문제가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반 테제가 아니듯이 말이다.

<자전거 도둑>이나 <움베르토 D> 그리고 <대지는 흔들리다>와 같은 영화들을 공산주의적 영화로 정의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데 시카나 자바티니 혹은 비스콘티 등이 노동자나 어부들의 계급의식의 발생을 다루어서가 아니며, 자연과 부르주아지에 대한 역사적 투쟁의 암시 때문도 아니다. 도덕적이고도 정치적인 범주 내에 있는 제 조건들과 관계하는 개인을 제시하고, 그 내용으로부터 필연적으로 파생하는 감동적이고도 낭만적인 메시지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중요한 것은 예술에 의한 특정한 의식의 계도가 아니라, 그 보다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카메라-지각 자체의 환경을 제시하거나 창조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적 인간의 지각 혹은 미래적 인간의 지각. 그 영화들을 공산주의적 영화로 이끄는 것은 바로 이 요소들이다.


(주1) 바쟁, 앙드레.『영화란 무엇인가?』. 박상규 역. 서울. 시각과 언어. p. 382. 이하 본문에 쪽수만 표기하겠음.

(주2)들뢰즈(G. Deleuze)는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이와 같은 잉여실재의 이미지에 대해, 베르그송의 용어를 빌어와 “감각-운동적 도식(sensory-motor schemata)”이라고 부른바가 있다(Deleuze, Gilles. Cinema II. Minneapois, 1994. p. 2). 이는 신체나 물질들간의 작용과 반작용이 정신적인 기획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들 자체의 질서에 따라 도식적이고도 기계적인 관계(반사작용과 같은)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잉여실재의 이미지에서 보게되는 소소한 사건들과 몸짓들은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그 자체 내재성을 갖는 행위들로 이루어진다.

(주3) 바쟁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잉여실재를 재료로 다루는데 있어 유사한 두 작가임에도, 로셀리니(Roberto Rosellini)와는 대조적으로 데 시카의 연출에는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나 연민이 지배적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로셀리니의 사랑은 인간들끼리의 교류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적인 의식으로써 그들을 감싸는 반면, 데 시카의 그것은 등장인물들 자신으로부터 방사된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그들이지만, 데 시카가 그들에 대하여 품고 있는 애정에 의해 내부로부터 비춰진다”(바쟁, 같은 책, 399).

(주4) 참고로, Deleuze는 그의 책 Cinema I 전체를 할애하여 이 소멸개념을 끝까지 밀고 나간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지각 자체를 소거하여 물질-빛이라는 운동-이미지의 상태로 나아가는 문제라든지, 지각에 있어서도 역시 고체적 지각에서 액체적 지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기체적 지각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명시적인 것들(주관성과 객관성 같은)의 양극단 사이에서 왕복운동을 하거나, 점점 정신성에서 물질성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었다.

(주5) 예를 들어, 무르나우(Murnau)의 『마지막 웃음(The Last Laugh)』의 첫 시퀀스를 보면, 카메라는 특정 인물을 따라가거나, 화면 틀 속에서 특정한 사건을 제시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마치 사람들 틈에 있는 익명의 어떤 사람처럼, 내려가고 있는 승강기 속에서 승강기 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 트랙킹 쇼트에 의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승강기 밖으로 미끄러져 빠져나간다. 카메라는 더 이상 인물과 세트에 제한되어 있거나 종속된 것이 아니라, 마치 화면 안에 배치된 요소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장 미트리는 이와 같은 카메라의 지각이 “공 존재(being-with)”를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더 이상 인물과 뒤섞이지 않고, 인물들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물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영화적인 공존(Mitsein)이다. 혹은, … 인물들 사이에서 확인되지 않은 누군가의 익명의 관점이다.”(Deleuze Gilles, Cinema I, Minneapolis, 1986. p. 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