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선인장!

나의 선인장!

논리학에서는 인과관계나 모순관계를 나타내는 접속사들―그러나, 그러므로 등―을 사용한다. 이 접속사들은 항들의 관계를 종속적인 것으로, 즉 관계의 원인을 항들 내부 속에서 찾는다. 가령, “A 그러므로 B”에서는 A가 B의 원인이 된다든지, “A 그러나 B”에서는 두 항이 투쟁하여 하나를 제거하려는 경향이 있다든지, 아니면 B가 A를 근거로 새로운 관점으로 이탈하거나 반대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어느 모로 보나 두 항의 관계의 원인은 둘 내부―두 항들 중 하나―에 있고, 힘의 관계가 권력적이거나 종속적인 구조를 갖는다. 들뢰즈(Gilles Deleuze)는 유럽식 특히 프랑스식 사유를 “하나의 점을 찍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가령, 우리는 “비가 내린다” 혹은 “태양이 이글거린다”라고 말함으로써, 마치 “비”라든가, “태양”과 같은 하나의 점이 미리 존재하고, 그 점이 부슬부슬 내리거나 이글거리는 속성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마치 손을 뻗으면 당장에라도 만질 수 있기라도 하듯. 선분은 점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하듯이 말이다. 그런 식으로 점을 찍고 나면 모든 술어적 관계들이 종속적으로 배열되어, 근원 또는 기원이 생기고, 제1원인이 탄생한다. 문장에서 주어가 술어들의 주체이고 세대주가 되듯이 말이다. 다수의 실질적 원인들을 거꾸로 뒤집어서, 그 결과를 맨 앞에 세우고는, 마치 그 결과가 원인인냥, 주인인냥, 전도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거꾸로 내리는 비 혹은 타들어가는 태양이라도 된다는 듯이. 존재란 무엇인가? 자아인가? 감각인가? 물인가? 흙인가? 들뢰즈는 바로 이러한 종속적 사유를 관계판단의 논리로 은폐하는 영역이 바로 논리학이라고 말한다. 관계의 원인이 항들 내부에 배열되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주관하거나, 제1의 원리가 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러한 구조적 논리학을 넘어서 진정한 관계의 아상블라주를 위해 “등위접속사(그리고)”를 사용하라고 권한다. 등위접속사는 항들을 종속시키지 않고, 동등한 관계에서 공존하게 한다. 그것은 구조적 종속으로 관계를 판단하는 접속사가 아니라 파편들을 긍정하는 접속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롭게 등장하는 항들을 이전의 항에 대한(~ 에 의한, ~의) 관계로 배열하지 않기 때문이다. “A 그리고 B”에서는 관계의 원인이 항들 속에 있지 않다. 그어느 누구도 제1원인이 되지 못하며, 다만 선후 관계 속에서 어느 것도 훼손시키지 않고, 공존 속에서 관계를 만들어낼 뿐이다. 그들의 관계는 관계하고 있는 항들 밖에 존재한다. 등위접속사 “그리고”는 미리 기획된 전체도 가지지 않고, 관계하고 있는 존재들을 종속시키지도 않고, 그들이 근접해 있거나, 그들 간에 선분이 그어짐으로써, 어떤 효과로서 전체가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휘트먼(Walt Whiteman)의 “카탈로그”나 “행렬문장”과 같은 파편적 글쓰기가 예증해주고 있는 아상블라주(assemblage)이다. 그것은 하나이면서도 다수이고 다수이면서도 하나인, 결코 하나로 붙일 수 없는 것임에도 하나의 효과를 내고 있는 엠마(Emma Bovary)의 눈과도 같다.

그건 그렇다치고, 언젠가 내가 노트에 메모한 내용 중에, 바로 저 등위접속사를 “긍정의 접속사”라고 적으며, 그 예로 괄호 속에 이렇게 적은 것이 눈에 띄었다: “나 그리고 선인장!, 나의 선인장!” . . . 앞에 것은 이해가 되는데, “나의 선인장”은 왜 적었을까? 소유격 아닌가? 선인장은 나의 소유물이고, 나는 선인장의 주인이 아닌가? 긍정적 관계가 아니지 않은가?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저 메모를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물론 선인장을 소유하고 있다. 내가(더 정확히는 친구가) 비용을 지불하고 사들였기 때문에, 저 선인장은 내 소유로 된 방에 귀속되어 있고, 우리는 법적인 질서 혹은 여타 형태의 사회적 질서 속에서 소유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인장의 존재의 원인은 아니지 않은가? 물이 컵에 담겨 있다고 해서, 컵이 물의 존재의 원인이 아니듯, 관계의 위계를 표상(representation)하는 종속이나 소유 형식이 관계 자체의 본질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자연 안의 모든 관계는 본질적으로 이미 긍정의 접속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처럼, 자연은 다수의 종속적 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의 공존의 관계가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선인장”은 “나 그리고 선인장”이라는 긍정의 관계 위에서만 성립가능한 표상적 관계이다.

 

나의 선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