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서

은행에서

은행에 가면 사람과 기계의 소음으로 복잡하고 분주해 보이지만, 가만히 앉아 지켜보고 있으면, 단순한 동작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고객은 번호표를 뽑는다. 그런 후에 그냥 자리에 앉아 차례를 기다린다. 이 절차는 입구에서 의자까지 나있는 직선코스를 따라 움직이면 된다. 어떤 곳엔 실제로 선까지 그어져 있다. 갈짓자로 걷거나, 두리번거리거나, 암묵적인 규칙이 우리의 심리에 그어놓은 선을 벗어나 사선으로 이동하거나, CCTV의 외화면(offscreen)으로 빠지거나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래야 별 탈이 없다. 은행에선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을 필요도, 그럴 만한 일도 없다. 그냥 넘어가는 디지털 번호판만 지켜보고 있다가, 자신의 번호가 찍히면 직원에게 다가가 사무를 보면 된다. 그 사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고지서에 적힌 금액과 지불한 현금의 기계적인 산술을 넘어서지 않는다. 수학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고민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직원들의 대부분의 업무에는 계산기가 따라다닌다.

직원이 예상한 결과와 계산기가 내 놓은 값이 일치하지 않아 머뭇거리는 사고가 간혹 일어나긴 한다. 그러나 그런 사고는 있어서는 안 되므로, 곧바로 수정하거나 배제해 버릴 것이다. 은행에서 우연한 사고란 “존재”해서는 안 되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사소한 일들을 제외하면 은행원들은 온종일 숫자들을 반복해서 두드릴 것이다. 머리가 복잡해지면 정확함이 생명인 은행업무를 망칠수 있기 때문에 머릿속을 비워 놓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계산하고 산출하고 다시 계산하고 지불하고 수금하고 다시 계산하고, . . . 계산기를 두드리는 여직원의 희고 고운 손등과는 대조적으로 그 아래쪽 손마디에는 움푹 패인 골이 시커멓게 나 있어, 그 동안의 기계적인 몸짓이 자유롭던 영혼에 새겨 놓았을 만행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그 흔적의 증거일까? 고객이 다가가면 왜 왔는지 궁금해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아니면 그 흔적에 대한 시위일까?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는다.

모든 일들은 서류로 처리되고 그 서류에는 고객들의 얼굴색이나 표정과는 무관하게 약속된 기호들(주로 숫자)로 연산되어 기록된다. 통장이나 카드의 계좌 안에는 그가 모아두거나 사용한 돈의 액수가 잔뜩 들어있다. 고객의 얼굴을 직접 보지 않아도 직원은 그의 신상이며 위상을 대충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고객은 자신이 지나치게 평준화되어 다루어지는 것에 불쾌하지만, 그렇다고 문제를 제기하거나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은행에 사람들이 방문하는 첫 번째 목적은 모든 의심과 불안을 제거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머뭇거리거나 의구심이 드는 모든 행동을 배제함으로써 우리는 인생에서 편안한 안도감을 취한다. 편한 삶이란 안정된 자연수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삶이다. 그런 삶에서 무리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에 있어 우리는 모두가 피타고라스주의자이다. 안도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서로의 시선 속에서 특별한 것은 경련만 일으킬 뿐이다. 은행에 가는 두 번째 목적은 단순해지기 위해서다.

은행의 광경은 악몽과 같다. 악몽을 감지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채, 그 안에서 우리의 감각은 계산기처럼 굳어간다.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행해지는 모든 관례들,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수순들, 위험 없는 예측된 동작들, 사선과 빗금의 부재 또는 거부, 다소간의 권력에서 비롯된 다소간의 우쭐함, 또 그에 적당히 만족하며 살아가는 샛노란 냉소에 깃든 새하얀 권태, 무성의하게 팽개처진 일상. . . . 번호를 기다리는 몇 십분 동안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지만 시선을 끄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넓은 창으로 난입한 빛이 너무 눈이 부셨기 때문인지, 실내의 군상들은 새 하얀 빛 속에 휘감겨 부드러운 윤곽선을 남기며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안의 맹수가 세끼니 제공되는 토끼를 보며 느끼는 권태 만큼이나 나른한 시간이 그 잠시 동안 밀려와 나는 하마터면 잠이들뻔 했다. 그들 역시 질서 정연하고도 공허한 시선의 궤도를 그리며 백야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인가를 많이 만들어 내야 했던 시절엔 저렇게 과묵해 보이는 모습이 미덕일수도 있었다. 아버지 세대의 미간에서 종종 그와 같은 미덕을 본다. 그러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과묵은 그 시절의 집단적 침묵과는 달라보인다. 이 악몽 속에서, 반동적인 충동조차 그 자신의 일부분으로 용해시켜버리고 마는 이 권태와 냉소는 이미 그 시절부터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은행이나 기업, 또는 그 밖의 공공 기관에 예술 작품이 있다는 것은 (그들이 예술의 주요 고객임에도) 이례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술 작품이 장식으로 이용되면 그 공간은 그럭 저럭 고급스럽고 세련된 분위기로 연출된다. 하나의 장식은 주변 경관이나 실내의 다른 장식들과 어우러져 용해된다. 두드러져 보이거나 특이한 시선을 끄는 장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이한 시선을 끌 때조차 튀면 안 된다. 아름다움, 일치된 감정, 합목적성, 개별적인 것과 전체 분위기의 유기적 통일성, 이러한 것들은 바람직한 장식을 해명해주는 고전적 심미이다.

공공 건물에 세워진 조각상이나 그 벽에 걸린 액자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한 동안 감상을 하거나 주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경비원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놓인 원래의 목적과 상충하기 때문이다. 전체의 분위기 속에서 평균화 되어 돌출될 위험이 거의 없는, 고유함이나 고통이 없는, 은행원과 고객의 시선에 깃든 부드러운 빛과도 같은 편안함을 주는 예술작품. 한마디로 말해 전체의 상관적 좌표 위에서 버림받는 것이다.

그러다가 은행 안 구석에 놓인 한 조각상을 유심히 바라본다. 어린 아이의 두 팔을 꼬아 놓은 듯한 약간 비틀어진 모양, . . . 뫼비우스의 띠 같기도 한 보통 크기의 조각상이 선반 위에 다소곳 놓여 있다. 조각상을 주시하는 잠시 동안 나는 어떤 경련을 느낀다. 왜 저렇게 비틀어 놓았을까? 저게 무슨 형상이지? 형상이 아니라 특질 자체를 세워놓은 건가? 대리석인지 플라스틱인지 부드럽지만 다소 무거워보이는 저 검은 색감은 내가 언젠가 꾸었던 꿈 속의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어째서 존재는 비틀어진 위상 속에서만 본질적일까? 저 생소한 광경은 내가 지적인 질문을 던지기 이전부터 내 안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신경 세포들에 경련을 일으키며 무엇인가를 끄집어내고 길어 올리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해석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나는 애매모호한 감정 속에서 경련을 느낀다. 이 경련은 순간적으로 내 삶 전체, 내 존재와 시간을 거대한 무게로 느끼며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주파수 밖에서 울리는 파동처럼 희미한 동물 소리를 내며 몸부림치는 노력처럼 보인다. 경련과 아울러 나는 온전한 하나의 독신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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