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ré Bazin의 『영화란 무엇인가?』에서 발췌

André Bazin의 『영화란 무엇인가?』에서 발췌

바쟁, 앙드레. 『영화란 무엇인가?』. 박상규 역. 시각과 언어. 2001.
《 》표시된 부분은 주석 및 해설

Contents

조형예술의 본질: 외형의 보존과 그 영속성을 통한 시간의 극복

조형예술에 대한 정신분석을 해본다면 시체의 방부보존 관습이 조형예술 발생의 기본요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될 수가 있다. 회화와 조각의 기원에는 미이라 콤플렉스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었을 것이다. 이집트 종교는 죽음에 대항하여, 생존이라는 것이 육신의 물질적 지속성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해서 이집트 종교는 인간심리의 기본적인 욕구, 즉 시간의 흐름에 대한 방어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죽음은 시간의 승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신의 외관을 인위적으로 보존하는 것은 말하자면 지속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그것을 떼어내는 것, 곧 그것을 생명권 내에 안치시키는 일이다. . . . 조상 제작의 종교적 기원 속에서 그 최초의 기능, 즉 인간의 생명을 그 외관의 보존에 의해 구원한다고 하는 기능 . . . 《조형예술로의 진화》 . . . 그러나 그러한 진화도 시간이라고 하는 악마를 몰아낸다는 억제할 수 없는 이 욕구를 잠재우지는 못하고 시간과 우리의 관계를 합리적 사고의 대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을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모델과 초상화의 존재론적 동일성을 더 이상 믿지는 않지만 모델을 회상하는 것을 초상화가 돕는다는 것, 따라서 그 모델은 제2의 정신적인 죽음으로부터 구해내도록 한다는 것은 누구나 받아들인다. . . . 초상화(영상)의 제작은 온갖 인간 중심적인 공리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한 것이다. . . . 《거기서는 더 이상 사후영생이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모습에 이상적인 우주의 창조가 문제가 되는 것》 . . . 그러나 회화작품에 대한 인간의 더할 수 없는 찬탄 밑에서, 외형의 영속성을 통해 시간을 이겨낸다고 하는 이 원초적 욕구가 가려져 있음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회화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만일 조형예술의 역사가 단지 그 미학의 역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심리학의 역사라고 한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유사성의 역사, (혹 이렇게 불리기를 원한다면) 리얼리즘의 역사라고 해도 좋다.(13-14쪽)

정신적 실재를 표현하는 미학적 리얼리즘과 외부세계를 복제하는 심리적 리얼리즘

[. . .] 전 세계의 회화가 형태에 있어 상징주의와 리얼리즘 사이에서 다양한 밸런스를 실현시켜왔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5세기에 서양의 화가는 독자적인 방법에 의해 정신적인 리얼리티를 표현한다는 본래의 유일한 관심에서 방향을 바꾸어 그 정신적 리얼리티의 표현을 외부세계에 대해 다소간 완전한 모방과 결합하려고 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의심할 것도 없이 과학적이고 그래서 말하자면 벌써 기계적이라고 할 최초의 방식의 발명이었는바, 즉 투시화법이 그것이었다(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암실―카메라 옵스큐라―은 니에프스의 카메라를 예고했다). 이러한 일은 예술가에게 삼차원적 공간의 착각을 부여할 수 있도록 했는 바, 사물을 우리의 직접적인 시각 속에 놓인 것과 똑같이 착각으로서의 삼차원적 공간 속에 위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이래로 회화는 두 개의 열망에 의해 찢기었다. (1) 정신적 실재의 표현이라는 미학적인 열망(거기에선 모델의 외형은 상징성에 의해 초월되고 있는). (2) 외부세계를 그 복제로 대체한다고 하는 순전히 심리적인 바람. 《이 착각에의 욕구는 급속도로 조형예술을 침식》 . . . 그렇다고는 해도 투시화법은 형체의 문제를 해결했을 뿐 운동의 문제는 해결하지를 못했기 때문에 리얼리즘은 자연히 왜곡된 부동성(不動性) 속에 생명을 암시해 줄 수 있는 바로크 예술과 같이, 일종의 심리적인 제4차원인 순간 속에다가 극적인 표현을 구하기에 이르기까지 발전해가지 않을 수 없었다.(주1. 이런 관점에서 1890년에서 1910년에 이르는 삽화가 들어간 신문을 펴놓고, 사진기사와 소묘화와의 사이에 행해진 경합의 발자취를 추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소묘화는 특히 극적인 것에 대한 바로크적인 욕구를 충족시킨다. . . . 사진기록의 의미는 조금씩 점차적으로밖에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를 못했다. 게다가 일정한 포화상태를 넘어서 ‘라다르’형(型)의 극적인 소묘화쪽으로의 회귀가 확인되고 있는것이다.) . . . 착각에의 욕구는 16세기이래 회화를 내면적으로 괴롭혀 왔다. 이 욕구는 그 자체가 미학적인 것이 아닌, 순전히 심적인 욕구였는바, 마술적인 심리상태에서 밖에는 그 기원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되 매우 효력이 강한 욕구로서, 그 유혹은 조형예술이 지닌 균형을 근저로부터 파괴시킬 정도였다.
예술상의 리얼리즘 논쟁은 이러한 오해로부터 나온다. 즉 미학적인 것과(정신의 실재 표현) 심리적인 것(외부세계 모사)의 혼동. 이 세계의 구체적이면서도 또한 본질적인 의미를 표현하려하는 욕구에 다름 아닌 진정한 리얼리즘과 형체의 착각으로 만족하는 눈속임(혹은 눈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속이는)의 사이비 리얼리즘과의 혼동으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중세예술이 이와 같은 갈등에 시달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극히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고도로 정신적이었던 중세예술은 기술적인 진보의 결과로서 불러일으킨 이 같은 드라마를 알지 못했다. 투시화법은 서양화의 원죄였었다.(15-17쪽)

사진(과 영화) ― 유사성의 집념으로부터의 해방

니에프스와 뤼미에르는 그러한 원죄로부터의 구세주였다. 사진은 바로크 예술이 의도한 바를 완성함으로써 조형예술을 그 유사성의 집념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왜냐하면 회화는 우리를 착각시키도록 노력했어도 실제로는 그것이 헛도니 일이었는데, 이러한 착각이 예술에게는 충분한 것으로 여겨졌던데 반하여 사진과 영화는 리얼리즘에의 집념을 결정적으로, 그리고 그 본질 자체에 있어서 만족시키는 발견물이었기 때문이다. 화가가 아무리 능란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작품은 언제나 불가피한 주관성에 의해 저당잡혀 있다. 인간의 손이 개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화상(畵像)위에 어떤 의혹의 그림자를 던지게 한다. 실제로 바로크 회화로부터 사진으로의 이행에 있어 본질적인 현상은 (모방의)단순한 물리적 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색채의 모방이라는 점에서는 사진은 오랫동안 회화보다 열등한 채로 남을 것이다), (사진이) 인간을 배제한 기계적인 재현이라는 것에 의해 우리의 착각에의 욕구가 완전히 만족되어진다고 하는, 하나의 심리적 사실에 있는 것이다. 해결은 결과 속에서가 아니라 그 결과를 생기게 하는 과정 속에 있었다.
양식과 모델에의 유사성과의 사이의 갈등이 비교적 근대적 현상이어서, 사진건판(寫眞乾板)의 발명 이전에는 그 갈등의 흔적이란 거의 발견되지를 않는다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 . . 유사성의 콤플렉스에서 해방된 근대 화가는 그것을 대중의 손에 넘겨주었고 대중은 그 때부터 유사성을 한편에선 사진과, 또 한편에선 오로지 사실(寫實)에만 전념하는 류의 회화와 동일시하려고 했다.(17-18쪽)

사진의 순수 객관성 ― 주관성으로부터의 해방

따라서 회화와 비교되는 사진의 독창성은 그것의 본질적인 객관성에 있다. . . . 인간의 눈을 대체하는 사진의 눈을 이루고 있는 일군의 렌즈는 바로 객관적인 것(l’objectif, 대물렌즈란 뜻도 있다)이라고 불리운다. 최초의 사물과 그 표현과의 사이에 또 하나의 사물(비생명적인 도구, 즉 렌즈 또는 카메라) 이외엔 아무것도 개재하지 않는 것은 이것이 초유의 일이었다. 엄밀한 결정론에 따라서 외부세계의 상(像)이 인간의 창조적 간섭 없이 자동적으로 형성되어지는 것은 이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진가의 개성은 피사체의 선택, 그것은 어떤 각도에서 잡는가, 또 그 사상(事象)의 교시능력이 어느 만큼 있는가 하는 데 의해서만 작동을 하는 것이다. . . . [사진가의 개성은] 화가의 개성과 똑같은 자격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 . . 모든 예술은 인간존재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하는 바, 오직 사진에서만이 우리는 인간의 부재를 향유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진은 한 송이 꽃이나 눈의 결정체와 마찬가지로 ― 그들의 아름다움이 식물로서 혹은 대지로부터 솟아나는 그 기원과 불가분의 것인 ― 자연현상으로서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다.
사진의 이러한 자동적인 형성은 화상의 심리학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다. 사진의 객관성은 모든 회화작품에는 결여되고 있는 신뢰성을 사진에 부여한다. . . . 우리는 표현된 것, 실제로 재현된 것 즉 시간과 공간 속에 제시되어진 사물의 존재를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사진은 사물로부터 그 재현물로의 실재성의 전이에 의해 이득을 얻고 있다.《위상학적 매핑, 함수 ⇒ 데카르트적)
. . . 우리의 무의식의 저 근저에는 사물에 대하여 그것을 대강 전사(轉寫)한 것이 아닌, 그 사물 자체의, 그러나 일시적인 우연성으로부터 해방된 그 사물 자체를 좀더 완전하게 무언가에 의해 대체시켜보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바, 이러한 욕구를 충분히 발산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사물의 화상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사진 렌즈밖에 없다. 사진의 영상도 . . . 《여러 과정을 통해 변질되기는 하지만》 . . . 역시 모델의 본체로부터 생겨난 것이므로 그것이 곧 모델 그 자체인 것이다. . . . 그것은 예술의 마술적인 효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정한 기계장치의 효과에 의해 자신의 시간 속에 정지되어서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생명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현존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진은 예술처럼 영원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대해 방부처리를 행하여 다만 시간을 그 자신의 부패로부터 지킬 뿐이기 때문이다.

사진의 객관성을 시간 속에서 완성시킨 영화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영화는 사진의 객관성을 시간 속에서 완성시킨 것처럼 보인다. 필름은 더 이상 . . . 과거 시대를 . . . 순간 속에 포장된 채 보존하는데 만족 하는게 아니다. 그것은 바로크 예술을 그것의 경련적인 강경증으로부터 해방한다. 이제야 비로소 여러 사물의 상(像)은 동시에 그것들의 지속성의 상이 되며 말하자면 변화의 미일, 미이라화된 변화가 되는 것이다.《이를 시간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적 영상의 특질을 규정하는 이같은 유사성의 범주는 . . . 회화의 미학과는 다른 사진미학의 특질 역시 규정한다. 사진 미학의 특성은 그것이 현실을 드러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 . . . 그것은 우리 자신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렌즈의 비정함만이 사물로부터 거기에 끼어 있는 관습이나 편견을, 온갖 정신적인 앙금을 깨끗이 제거 . . .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볼 수도 없었던 한 세계의 자연 그대로의 상을 보여주는 사진의 힘에 의해 자연은 결국 예술을 모방하는 이상의 일을 하고 있다. 자연은 예술가를 모방하기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이 문장은 좀 이상하다. 자연이 예술을 모방하는 이상의 일을 한다? 그리고 자연은 예술가를 모방한다?》
사진은 그 창조적 능력에 있어 예술을 능가할 수 있기까지 한다. 화가의 미학적 세계는 이 세계와는 이질적인 다른 세계이다. 그 구역은 실질적으로나 본질적으로 이 세계와는 다른 미시적 세계를 프레임 속에 에워싸고 있다. 사진에 찍혀진 사물의 존재는 그와는 반대로 지문과 마찬가지로 모델의 존재와 같은 성질을 띠고 있다. 그런 까닭에 사진은 자연의 창조물을 그것과는 다른 창조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연의 창조물 속에 덧붙여져 그 일부가 되는 것이다. . . . (중략)
그래서 사진의 출현은 바로 조형예술사에서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해방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완성이기도 한 사진은 서양회화가 사실에의 집념을 결정적으로 떨어버리고 그 미학적인 자율성을 회복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인상파의 리얼리즘은 그 과학성을 구실로 하여 마치 실물인 듯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눈속임 화법과는 정면으로 대립적인 위치에 섰다. 색채는 형체가 더 이상 모방이라고 할 만한 값을 지니고 있지 않을 때에야 그 형체를 침식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잔느와 더불어 형체가 다시금 캔버스를 점유하게 되었다고 해도, 회화는 어떤 경우에도 투시화법의 착각적인 기하학에 따르는 일이 더 이상 없었다. 사진의 기계적인 영상은 회화와 경쟁을 벌이며 바로크풍의 (이상야릇한) 유사성을 넘어서 모델과의 동일성에까지 도달하는데서 회화가 그 자신 쪽에서 한낱 사물로 바뀌어질 수밖에 없도록 했다.
사진 덕분에 우리는 한편으론 우리의 눈이 아직껏 사랑할 줄을 모르던 원본(자연의 사물)을, 그것을 재현한 영상 속에서 보고 감탄하도록 되고 또 다른 한편으론 자연을 참조하는 것을 자기정당화의 이유로 삼는 일을 그치는 하나의 순수한 사물을 회화 속에서 보고 감탄할 수 있도록 되었기 때문이다.(20-23쪽)

완전모방에의 신화를 기원으로 하는 영화

[. . .《영화의 발전에 관한 간략한 역사 서술》. . .] 그러므로 영화의 발명을 이끌어가 가능케 한 신화는 사진으로부터 축음기에 이르기까지 19세기에 나타난, 현실의 기계적인 재현기술 일체를 막연하게나마 지배해온 어떤 신화의 완성된 모습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신화로서, 세계를 그 자체의 이미지로, 예술가에 의한 해석의 자유라는 가설이라든가 시간의 불가역성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짐을 지지 않는 이미지로 재창조할 수가 있다는 신화인 것이다. . . . 영화의 진정한 원초적 형태, 19세기에 십 수명의 사람들의 상상 속에만 아직 존재했을 뿐이었던, 그것은 자연의 완전한 모방을 겨냥했던 것이다. 그런고로 영화가 스스로에게 첨가해 가는 온갖 개량은 모두가, 역설적으로 말하면, 영화를 그 기원에로 근접케 하는 것일 따름이다. 요컨대 영화는 아직도 발명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인 발견들이나 산업적인 기술들은 영화의 발전에 있어 대단히 큰 위치를 차지하고는 있으나 그것들을 영화 발명의 제일 원인으로서 위치시킴은 적어도 심리학적인 견지에 서서 보면 인과관계의 구체적인 순서를 뒤집는 일이 될 것이다.《즉 영화에 대한 욕망을 기술이 실현시킨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기술은 조건의 충족을 만족시켰을 뿐이지 영화의 원인이 아니다》. . . . 이렇게 저 옛날 이카루스의 신화는 순연히 이념적인 플라톤적 세계로부터 내려오기 위해 내연기관의 발명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 내연기관은 인간이 최초로 새에 관해 생각한 때부터 모든 인간의 정신 속에 존재했던 것이다.(31-33쪽)

실제의 단일한 공간성이 아닌 추상화된 공간성을 조립하는 몽따쥬

[. . . <빨간 풍선>과 <특이한 요정> 두 영화를 비교하면서 . . .] . . . 좀더 본질적으로는 그 미학적 존재성과의 관계 속에서 다만 몇 가지 몽타주 법칙을 분석해보려 한다. . . . 이런 관점에서 <빨간 풍선>과 <특이한 요정>의 유사성은 . . . 서로 반대되는 의미에서 몽타주의 효과와 한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나는 장 뚜란의 영화(특이한 요정)로 시작하여 이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주킨의 클로즈업에 의한 쿨레쇼프의 저 유명한 실험의 놀랄만한 실례에 다름 아님을 증명하고자 한다.《모주킨의 클로즈업에 의한 몽따쥬는 무표정한 얼굴+ 여러 사물 = 그 사물의 정서에 따라 감정을 띤 얼굴로 느껴진다는 것을 실험에 의해 입증한 예이다》. 장 뚜란의 야심은 소박하게도 살아 있는 동물들을 가지고 디즈니 영화를 만들어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물들에게 부여하는 인간적인 감정이라고 하는 것이 (적어도 기본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의식의 투영이라는 것은 아주 자명한 일인 것이다. 우리는 동물들의 해부학적 구조나 행동에, 인간의 해부학적 구조나 행동과의 어떤 외견적 유사성으로부터 우리가 다소간 무의식적으로 동물들에게 부여하게 된 정신상태를 그저 읽을 수 있음에 불과하다. 오직 과학의 영역에서만 해로운 것이었다고 할, 인간정신의 이 같은 자연스런 경향을 우리는 물론 경시해서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된다. . . . 그러나 뚜란은 가장 낮은 레벨로, . . . 미학적으로도 동물의 인간에의 치환이 가장 서투르게 되었다고 . . .(중략 71-73쪽)
[. . .] 이와 같이 해서 배역들은 카멜의 시계(視界)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일도 하는 것이 없이, 복잡한(때로는 너무 복잡해서 줄거리가 혼잡스러울 정도인) 관계를 지닐뿐더러 다양한 성격이 주어진 많은 등장인물들에 의해 이야기 전체가 조립된다. 외관상의 행위와 사람들이 거기다가 부여하는 의미는 실제로는 영화에 앞서 존재했던 것이 결코 아니다. 일반적으로 각 쇼트를 구성하는 단편화된 장면의, 구분되어진 형(形) 속에서조차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 . . 이 영화의 필수라고 할 수 있는 비현실적 상태로 유지시켜 주는 것은 의미의 추상적인 창조자인 몽따쥬인 것이다.(73-74쪽)
<빨간 풍선>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몽따쥬에 힘입은 바도 없으며 그럴 수도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이것은 풍선의 동물화라는 것이 동물의 인간화보다도 훨씬 더 공상적인 것이므로 한층 더 역설적인 바가 있다. 라모리스의 빨간 풍선은 우리가 스크린 상에서 보는 그 움직임을 실제로 카메라 앞에서 수행한 것이다. 물론 거기엔 트릭이 있다. 하지만 그 트릭은 이런 종류의 영화가 보통 쓰고 있는 것 같은 트릭은 전혀 아니다. 여기서의 착각은 마술에서처럼 현실 자체로부터 생겨나고 있다. 그 착각은 구체적인 것이어서 몽따쥬의 실질적인 연장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결과가 같다면, 강아지처럼 주인을 따라갈 줄 아는 풍선의 존재를 스크린 상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가 있게만 된다면 그와 같은 것은 무슨 상관이겠는가고 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라모리스의 마법의 풍선이 우리를 현실의 세계로 되돌려보내는 데 반해 몽타주에 의한 마법의 풍선은 바로 스크린 상에서 밖에는 존재하지를 않는다고 하는 점이다. . . . 몽타주의 추상적인 성격이 적어도 심리학적으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 . . 몽따쥬도 처음의 그 소박한 단계에서는 하나의 기교로서 지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습관이 조금씩 관객의 감수성을 예민하게 해서 오늘날엔 대다수가 집중하면 현실의 장면과 몽타쥬만에 의해 암시된 장면을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 . . 중요한 것은 트릭이 눈에 뜨지 않느냐 어떠냐 하는 것이 아니라 트릭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마치 베르메르의 위작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그 진본을 능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듯이.
[. . .] 라모리스의 풍선 조작에도 트릭은 물론 있다. . . . 그러나 <빨간 풍선>은 영화에 의한 꽁트요 정신의 순수한 창조물인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이야기가 바로 본질적으로는 하등 영화에 빚지고 있지를 않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것을 영화에 빚지고 있다는 것이다.《즉, 몽따쥬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더 영화적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바쟁은 영화를 실재의 모방, 재현이라고 보기 때문에》
하나의 문학적인 이야기로서의 <빨간 풍선>을 상상해보는 것도 확실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상상할 수 있는 한에서 아무리 아름답게 쓰여졌다고 하더라도 그 책은 도저히 영화에 다가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영화의 매력은 문학의 매력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같은 이야기가 아무리 교묘하게 영화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스크린 상에선 책 이상의 실재성(réalité)을 지닐 수는 없는 것이다.《바쟁은 영화의 본질은 몽타주가 아니라고 본다. 몽타주는 일종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바쟁에 따르면 몽따쥬는 그 존재론적 의미에서 영화적이지 않다. 흔히 몽따쥬를 영화의 본질이거나 영화의 해방이라고 말하지만, 몽따쥬는 영화의 본질이 아니라 문학의 본질. 바쟁은 그래서 몽따쥬를 신뢰하지 못함》 [. . .]
이 공상적인 기록영화라고 하는 표현은 궁극적으로는 라모리스의 의도를 가장 잘 규정하고 있는 표현인 것처럼 생각된다. 라모리스의 의도는 <시인의 피>에서, 말하자면 상상력(또 다른 명칭으로는 꿈)에 대한 기록영화를 창출한 꼭토(Jean Cocteau)의 의도와 유사하면서도 그것과는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일련의 패러독스에 빠져들게 된다. 즉 몽타주는 영화의 본질이라고 자주 되풀이해 말해지고 있지만 그 몽타주는 이 같은 영화의 경우에는 문학적인, 특히 반영화적(反映畵的)인 방법이 되고 있다. 이번엔 순수한 상태에서 본 영화적 특질은 몽타주와는 반대로 공간의 단일성에 대한 전적인 사진적 존중 속에서 발견되어지게 된다.《예로, 대역을 쓰는 경우, 똑같은 말이나 풍선이 아니라, 여러 필의 말과 여러개의 풍선을 쓰는 경우엔 어떠한가? 동일한 것이 아니므로, 이것도 어떤 점에서는 몽따쥬라고 말해야하지 않을까? 그러나 바쟁은 몽따쥬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이러한 트릭의 문제가 아니라, 몽따쥬 자체가 가지고 있는 추상적인 공간화와 운동에 대한 문제였다. 따라서 저 경우에는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는 것이다》.
[. . .] 그 작품의 신뢰성은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의 기록적인 가치와 연결지어져 있다. 그 영화가 표현하는 사건들은 부분적으로는 정말 있었던 일들이다. <백마의 갈기>에서는 카마르그의 풍경과 말 사육자들이나 어부들의 삶 그리고 떼지어 다니는 말들의 습성 따위가 이 이야기의 토대, 이 신화의 부정할 수 없는 견고한 받침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같은 현실 위에 <백마>를 대신하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흥미진진하게 상징되어진, 상상세계의 변증법이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백마>는 카마르그의 소금기 묻은 풀을 지금도 뜯어먹고 있는 진짜 현실의 말임과 동시에 영원히 폴코 소년의 벗들로서 헤엄치고 있는 꿈 속의 말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 영화적 사실성은 기록적 사실성 없이는 성립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만 그 기록적 사실성이 우리의 상상력의 진실성(vérité)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일단 스스로를 파괴한 뒤 현실 그 자체 속에 다시금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영화의 변증법: 실제의 것과 상상의 것이 동시에 들어와 있는 것?》
[. . . 《현실에 대한 영화적 트릭이나 기술적 변형은 있었지만 이는 몽따쥬와는 전혀 다름. . .] 상상적 세계에다가 현실을 통합시킴과 동시에 그 현실을 대치하도록 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이야기의 논리에 필요한, 트릭이라는 가두리의 술 장식, 계책이라고 하는 여백의 부분인 것이다. . . . 이 영화가 미학적으로 완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가 사건을 트릭에 의한 것으로 알면서도 그러고도 그러한 사건의 실재성을 믿으려고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관객에게는 거기에 서너 필의 말이 있었다거나 말머리를 적시에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나일론 실로 콧구멍을 꿰어 끌어당겨야 했다거나 하는 것을 분명히 알 필요는 전혀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관객이 자신을 향해 이 영화의 소재는 진짜이구나 하고 말할 수 있음과 동시에, 허나 이건 영화다라고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에 스크린은 우리의 상상력의―스스로가 대신하기를 기획하고 있는 현실로부터 영양을 흡수하고 있는 상상력의―간만(干滿)을 복사해낸다. 즉 이 이야기는 상상력이 현실의 경험을 초월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75-79쪽)
[. . .] 상상의 세계는 스크린 상에서는 현실의 공간적 밀도를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몽따쥬는 일정한 한도 내에서밖엔 이용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영화에 의한 이야기의 존재성 그 자체를 침해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연출가가 한 행위의 같은 순간에 있어서의 두 국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하는 난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일정한 위치에서의 촬영과 그 역 위치에서의 촬영을 동시에 감행하는 방법을 취하는 일은 여기서는 허용되지를 않는다.《shot-reverse-shot를 말하고 있다》 . . . 말과 소년과 사냥감이 상상 동일한 쇼트 속에서 동시에 잡히고 있는 토끼 사냥의 시퀀스 . . . 이 시퀀스의 마지막에서 말이 속도를 늦추고 멈춰섰을 때 카메라가 말에 대해서도, 소년에 대해서도 실물과는 신체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내게 보여준 것에서는 거북스러움을 느꼈다. 그는 파노라믹이나 후퇴 이동촬영 같은 것을 활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 . 뒤에 올 쇼트 전체를 진실한 것으로 할 수가 있었을 텐데, 그 후에 이어지는 폴코와 말의 두 쇼트는 이 에피소드의 순간에 오히려 풀기 쉽게 된 장애를 교묘하게 속여 감춤으로써 액션의 아름다운 공간적인 흐름을 깨뜨려버리고 말았다.(79-81쪽)

실제의 단일한 공간성(화면구성)을 보여주는 한 예

[. . . 평범한 영국영화 <독수리는 이제 날지 않는다 Where No Vultures Fly>중에 잊을 수 없는 한 시퀀스가 있다. . . .] 여기서 잠시 서술을 멈추자. 여기까지는 모두가 소년과 사지를 대응시킨 몽타쥬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런 지극히 소박한 서스펜스도 가장 상투적인 것처럼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여기서 돌연히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연출가가 그 때까지 이 드라마의 주역들을 떼어놓고 있던 분리되어진 쇼트들을 내던지고 양친과 아이와 사지를 동일한 원사(遠寫) 속에서 dans le me^me plan général 동시에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어떠한 트릭도 생각되어지지를 않는 이같은 단일한 화면구성이 돌연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것에 선행하는 아주 평범한 몽따쥬까지도 진실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 . . 물론 이 시퀀스도 그저 이야기로서만 본다면 . . . 몽따쥬나 스크린 프로세스와 같은 비속한 편이수단을 이용해 촬영된 의미밖엔 가지지 못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몽타쥬와 스크린 프로세스의 어느 경우에라도 장면(신)은 카메라 앞에선 그것의 물리적, 공간적 현실을 통해 전개되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각개의 영상의 구체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장면은 이야기로서의 가치밖엔 지니지를 못하고 현실적 사건으로서의 가치를 지니지는 못한다. 그럴 경우에는 영화의 한 시퀀스와, 꼭같은 가공적 사건을 이야기하는 소설의 한 장(章)과의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란 존재하지를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의 에피소드의 극적, 정신적인 가치는 분명 지극히 평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그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음을 암시하는 최종적인 화면구성은 우리를 단번에 영화적 감동의 절정에로 이끌어간다.《몽따쥬는 영화를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함. . . 예로, 트뢰포의 <아메리카의 밤>에서 고양이 씬을 찍는 시퀀스를 상기해 보자. 바쟁에게 영화적 감동이란 가공적이고 허구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 사건을 통한 감동을 의미한다》. 물론 이 장면은 그 암사자가 반은 길들여져 있었고 영화 촬영 이전에 그 가족과 친밀해져 있었다고 하는 사실에 의해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것은 상관없는 일이다. 문제는 소년이 거기서 표현되어지고 있는 것 같은 위험을 실제로 겪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표현이 사건의 공간적 단일성을 존중하는 그런 것이었다고 하는 점이다. 여기에서 리얼리즘은 공간의 동질성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우리는 몽타쥬가 영화의 본질을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그 부정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있음을 보는 것이다. 동일한 장면이 몽타쥬로 처리되는가 전사(全寫 plan d’ensemble)로 처리되는가에 따라, 되다 만 서툰 문학이 되기도 하고 훌륭한 영화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81-82쪽 각주 2번)

영화의 미학적 원칙: 몽타쥬의 금지

[. . .] 다음과 같은 원리를 미학적 법칙으로 정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원리란 ‘한 사건의 본질이 행위(액션)의 둘, 혹은 그 이상의 요인의 동시적 제시를 필요로 할 때는 몽타주는 금지된다’고 하는 것이다.《즉, 몽따쥬가 설득력이 있으려면 원사를 한번쯤은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무리하게 원 쇼트=원 시퀀스(plan séquence)로 되돌려야하고, 여러 가지 풍부한 표현수단이나 쇼트를 변화시키는 편이적인 수단을 포기해야 한다고 하는 뜻은 결코 아니다. 여기서 우리의 고찰은 이야기의 형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성격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요,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야기의 성격과 형식의 어떤 상호의존성을 대상으로삼고 있는 것이다. . . . 《오손 웰스의 <The Magnificent Ambersons>, <Mr Akadin>, 그리고 히치콕의 <Rope>의 예 . . .》 . . . 사건의 공간적 단일성은, 그것의 파괴가 현실적 사건을 단순한 가공적 표현으로 변형시켜버릴 때에는 반드시 존중되지 않으면 안 된다. . . . 플레허티가 . . . <루이지애나 스토리>에서 단 한번의 파노라믹 촬영에 의해 왜가리를 잡는 악어를 찍은 원쇼트=원 시퀀스만은 경탄할 만하다. 그러나 그 역도 참이다. 즉 이야기가 실재성을 다시 획득하기 위해선 적절히 선택된 그 쇼트들 가운데 하나라도 그 전에 몽타주에 의해 조각났던 그 요소들은 다시 결집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 .] 마지막으로 소설이나 희곡과 병행하는 순수한 이야기(서술적) 영화의 경우에서도 어떤 유형의 행위(액션)는 그것의 완전한 전개를 위해선 몽타주의 사용을 허락지 않을 수가 있다. 구체적인 지속의 표현은 몽타주의 추상적인 시간에 의해 분명히 방해를 받는다(이와 같은 일은 <시민케인>이나 <위대한 앰버슨가>같은 작품에서 잘 예증되고 있다). 그러나 특히 어떤 상황은 그 공간적 단일성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만큼은 영화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해질 수가 있다. 특히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에 근거한 희극적인 상황의 경우는 그러하다. 그런 경우에는 <빨간 풍선>에 있어서처럼 온갖 트릭이 허용된다. . . . 초기의 희극(Burlesques: 특히 버스터 키튼의 그것 같은)이나 채플린의 영화는 이 점에서 많은 교훈을 담고 있다. 우스꽝스런 희극이 그리피스와 몽타주 시대 이전에 성공을 거둔 것은 그 개그의 대부분이 공간의 희극에, 사물과 외적 세계와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속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 . <서커스>에서, 채플린과 사자, 이 양자는 함께 스크린의 프레임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82-85쪽)

영상(적 표현)의 두 가지 분류: 조형성과 몽따쥬

[. . .] 나는 1920년에서 1940년까지의 영화계에는 영상을 신봉하는 연출가와 현실을 신봉하는 연출가라고 하는 두 개의 커다란 대립적 경향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싶다.
영상이라고 하는 말의 뜻을 나는 그 스크린 상에서의 표현(expression)이 거기에 표현되어지고 있는 것(the expressed)에 덧붙여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뜻한다.《즉, 표현하는 행위 및 표현 그 자체가 표현의 대상에 덧붙여져서 다른 어떤 의미를 추가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아마도 객관적 현실에다가 주관적 구성을 추가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 .] 이를 두 가지 그룹으로 집약할 수가 있을 것이다. (1) 영상의 조형성에 관련되는 것《독일식 표현주의를 의미한다. 하나의 쇼트를 마치 조형적 형상물로 치환하여 이해하는 방식》. 영상의 조형성에 관련되는 것 중에는 무대장치와 분장의 양식이, 또 어느 정도까지는 연기의 양식까지도 포함되며 거기엔 물론 조명과, 구도를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화면구성이 첨가된다. (2) (시간 속에서의 영상의 구성에 다름 아닌) 몽따주의 기법에 관련되는 것. 그리피스의 걸작들로부터 주로 생겨난 몽타주에 관해서는 앙드레 마를로(André Marlraux)가 그의 『영화심리학』속에서 ‘예술로서의 영화를 탄생시킨 것은 몽타주였다. 결국 이 몽타주가 사실상 영화를 단순히 움직이는 사진으로부터 구별시켜, 요컨대 하나의 언어를 창조해낸 것’이라고 쓰고 있다.(88-89쪽)

몽타쥬의 종류

(1) 초기 몽따쥬 ― 눈에 띄지 않게 사용될 수가 있는 전전(戰前)의 고전적인 미국 영화에서 흔했다. 거기에선 쇼트는 장면의 구체적 논리나 극적인 논리에 따라 사건을 분석한다는 유일한 목적에 의해 분할시킨다《구성되고 있는 사건을 자연스러운 연속으로 만들기 위해 편집화면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것은 화면구성을 자연적 지각에 따라 분할하면서, 분석되고 편집되고 있음을 지각할 수 없도록 만드는 방식》.
(2) 몽따쥬의 발전 ― 몽따쥬의 가능성은 평행 몽따쥬(montage paralléle), 가속 몽따쥬(montage accéléré), 그리고 견인 몽따쥬(montage attraction)라는 세 방식 속에서 구현됨. ① 평행 몽따쥬: 그리피스에 의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행위의 동시성을, 각개 행위를 표현하는 두 개 쇼트를 번갈아 연속시킴으로써 설명하는 일에 성공했다《평행교차 편집. Intolerance에서 그리피스는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지역의 사건들을 서로 교차해서 보여 주고, 동일한 방향으로 두 사건이 수렴해 가는 방식의 편집을 사용한다》.
② 가속 몽따쥬: 또한 아벨 강스(Abel Gance)는 <차륜> 혹은 <철도의 백장미 La Roue>에서 진짜 속도를 나타내는 영상에 의지하지 않고(왜냐면 모든 차륜을 한 곳에서 돌릴 수가 있었기 때문), 다만 쇼트의 길이를 점점 짧게 줄여 그 수를 늘여 가는 것만으로 기관차가 점점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주고 있다.
③ 견인 몽따쥬: 에이젠슈타인에 의해 창출된 이 몽따쥬는 설명하기 쉽지 않은 것인데, 반드시 같은 사건에는 속하지 않은 다른 영상과 접근시킴으로써 한 영상의 의미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대체적으로 정의할 수가 있다. [. . .] 견인에 의한 몽따쥬는 그 창출자에 의해서조차 극단적인 형태로는 이용되는 일이 흔치 않지만, . . . 침대 발치에 놓인 의자 위에 던져진 스타킹이라든가, 넘쳐 흘러나오는 우유라든가 하는 것 같은, 생략, 비교 또는 은유 등의 훨씬 더 일반적인 방법과 매우 가까운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물론 이 세 가지 몽따쥬의 다양한 결합물도 존재한다.(89-90쪽)

몽따쥬의 다양한 종류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공통적 특징 혹은 정의

[. . .] 즉 그 특징이란, 영상들이 객관적으로는 내포하고 있지 않은 하나의 의미, 오직 그들 영상 상호 간의 관계로부터만 나오는 한 의미의 창조라고 하는 것이다. 모주킨의 동일 쇼트에 의한 쿨레쇼프(Koulechov)의 저 유명한 실험, 모주킨의 미소가 그 바로 직전에 놓였던 영상에 따라 그 표현의 의미를 바꾸어놓는 것 같이 보이게 한 그 유명한 실험은 몽타쥬의 특질을 완전히 요약해 보여주고 있다《즉, 몽따쥬는 객관적인 것이 아닌, 상호 주관적인 의미의 창조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에이젠슈타인은 영화를 문학과 동일시하고, 의미의 구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 . . 사건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기서 암시해 주는 것이다. . . . 필름의 의미는 그 구성요소의 객관적인 내용보다는 이들 요소의 구성 자체 속에 훨씬 더 많이 존재하고 있다. 이야기의 주제는 개개의 영상의 사실성이 어떤 것이건, 본질적으로는 이들 영상들 간의 관계로부터 생겨나고 있다(미소짓는 모주킨 + 죽은 아이 = 연민처럼), 즉 그것은 구체적인 요소들의 어느 것도 처음에는 포함하고 있지 않았던, 하나의 추상적인 결과인 것이다《몽따쥬는 하나의 추상화라고 말할 수 있다》. . . . 은유나 연상의 중개에 의해 어떤 관념을 암시한다고 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시나리오, 즉 이야기의 궁극적인 목표와 (가공되지 않은) 생(生) 이미지(영상) 사이에는 하나의 보조적인 중개자, 일종의 미학적인 변압기가 삽입된다《목적(대상)과 이미지 사이에 매개적 장치가 몽따쥬이다》. 의미는 영상 속에 있지를 않고 그것은 몽따쥬에 의해 관객의 의식 평면에 투사된 영상의 그림자 속에 담겨 있다.
요약해보기로 하자. 영화는 몽따쥬의 여러 기법들에 의해서와 마찬가지로 영상의 조형적 내용에 의해서도 표현된 사건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관객에게 강요 . . . [무성영화 말기에 성행] . . . 소비에트 영화가 한편에서 몽따쥬의 이론과 실천을 그 궁극적 결론에까지 밀고 나갔다면, 독일영화는 무대장치와 조명이라고 하는 영상의 조형요소에다 가능한 모든 폭력을 휘둘렀다. 만일 주어진 현실에 대해 영화의 조형성과 몽따쥬가 덧붙여줄 수 있는 일체의 것 속에 영화예술의 본질이 있다고 한다면 무성영화는 완벽한 예술인 것이다. 소리는 고작해야 시각적인 영상의 수반 선율로서 종속적이고 보충적인 역할밖엔 하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90-91)

몽따쥬나 표현주의와는 다른 방식의 고찰

[. . .] 무성영화 시대부터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이나 무르나우 혹은 플래허티 등의 감독들은 [이 몽따쥬에] 암암리에 의문을 제기 . . . 몽따쥬는, 그들의 영화에서는 너무도 풍부한 현실성 내에서 불가피한 제거를 위한 몽따쥬, 다만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몽따쥬를 빼고는 실제로 어떠한 구실도 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동시에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은 적어도 스스로가 보려고 택한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1) 바다표범을 잡는 나누크 . . . 플래허티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나누크와 바다표범의 관계, 즉 기다리는 시간의 실제 길이이다. 몽따쥬를 사용해서도 시간을 암시할 수야 있다. 그러나 그는 그 기다리는 시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만으로 그친다. 잡는 시간의 길이야말로 영상의 실질 그 자체요, 영상의 참된 목표인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는 이 에피소드가 단 하나의 쇼트만으로 촬영되지 않으면 안 된다.
(2) 무르나우는 시간보다도 극적 공간의 현실성 쪽에 좀더 흥미를 지니고 있다. . . . [몽따쥬는 결정적인 역할 하지 않고, 조형성의 표현주의 역시 피상적일 뿐이다] . . . 그 영상의 구성은 전혀 회화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다가 아무것도 첨가하고 있지를 않으며 현실을 변형시키지도 않는다. 그것은 반대로, 현실 속에서 심층적인 구조를 끄집어내어 현실 속에 선재해 있는 관계들을―이것들이 곧 드라마의 구성요소가 되는데―드러내놓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3) 영상의 표현주의와 몽따쥬의 트릭 모두에 가장 강한 반대를 표하는 이는 바로 스트로하임이다. 그의 영화에서는 현실은 마치 형사의 지칠 줄 모르는 심문에 시달리다가 자백하고 마는 용의자처럼 그 의미를 드러내놓는다. 그의 연출 원리는 간단하다. 그것은 이 세계가 그 잔혹성과 추함을 이윽고 노정 할 때까지 거기에 아주 가까이 접근해서, 그리고 아주 집요하게 그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 . .] 몽따쥬가 관여하고 있지 않으면서 표현주의적이지도 않은 영화적 요소가 있음 . . . 이와 같은 영화언어에서 영상은 그것이 현실에 대하여 무언가를 덧붙여주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현실 속에서 무언가를 드러내놓는 것에 의해 우선 평가되어지는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의 영화에 있어서는 무성영화는 사실상 불구의 영화에 불과했다. 즉 거기서의 현실은 그 몇몇 요소 중의 하나(소리)를 빼버린 현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드라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과 마찬가지로 <탐욕>(스트로하임의 24년작)도 이미 실질적으로는 발성영화에 다름 아니다.(91-93쪽)

발성영화 발생 전후로 한 간단한 영화 역사

(94-98쪽)

발성영화 이후 데쿠파주의 진화

1938년에는 거의 같은 종류의 데쿠파주가 발견됨 . . . 이제 영상의 조형성과 몽타주의 기교에 토대를 둔 무성영화의 유형을 다소 관습적인 표현을 빌어 표현주의적이라든가 상징주의적이라든가 하는 말로 부른다면, 새로운 이야기 전개의 형식을 분석적이라든가 극적이라는 말로 부를 수가 있겠다. . . . 1936년에는 다음과 같은 데쿠바주가 사용됨
1. 배우와 식탁을 동시에 화면 속에 담는 원사.
2. 경탄과 욕망이 뒤섞인 표정을 보이는 얼굴의 클로즈업으로 마무리된 전진이동촬영(travelling avant).
3. 음식물에 대한 일련의 클로즈업.
4. 화면 내에 전신을 담은, 등장인물의 원사에로의 복귀. 그 인물은 천천히 카메라 쪽으로 걸어나온다.
5. 통닭의 날갯죽지를 움켜쥐는 배우의 플랑 아메리깽(plan américain, 전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상체를 찍는 쇼트)이 가능하도록 서서히 카메라를 후퇴이동(travelling arrière)시킨다.
이러한 데쿠바주의 공통적인 특징
1. 공간의 박진성. 클로즈업되어서 무대장치가 제거되어버린 경우조차도 등장인물의 위치는 항상 그 공간 내에서 결정된다.
2. 데쿠파주의 의도와 효과는 오로지 극적 내지는 심리적인 것이다.
[. . .] 카메라의 시점의 변화는 여기에 아무것도 덧붙여주지를 않는다. 그것은 우선 현실을 보다 더 잘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리고 나서 다음으론 그 현실 속에서 보다 더 잘 볼만한 것을 강조함으로써 좀더 효과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제시해 줄 따름이다.《즉 쿨레쇼프의 모주킨 실험에서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몽따쥬로 조작하여 감정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세히 보여줄 뿐이다) . . . 반대의 예로 <성 페테르스부르크의 최후>(1927, 푸도푸킨)에 나오는 돌 사자상들의 몽타주를 보자. 교묘하게 접근시켜놓은 일련의 사자상 쇼트는 떨쳐 일어난 민중처럼, 한 마리의 같은 사자가 일어서는 듯한 인상을 준다《이때의 몽따쥬는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조작하고 있다》. 이처럼 경탄할 만한 몽타주의 신발견은 1932년 이후의 영화에서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분노 Fury>속에서 프린츠 랑은 1935년인데도 역시, 잡담을 늘어놓는 여인들을 담은 일련의 쇼트 뒤에 가금 사육장에서 꼬꼬댁거리는 암탉들의 영상을 삽입한다. . . . 견인 몽타쥬의 잔존물로서, 당시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안겨줌 . . . 오늘날에는 아주 이질적인 것으로, . . . 이중인화와 같은 그런 가시적인 트릭이, 특히 미국에서는 클로즈업까지도 거의 완전히 소멸 . . .(중략)
이렇게 하여 1938년 경에는 거의 예외 없이 똑같은 원리에 의해 편집되었다. 스토리는 쇼트의 연속에 의해 서술되었는데 그 쇼트 수도 대개 600정도, 비교적 변화의 폭이 작았다. 이 데쿠파주의 특징적인 기술은 일정 위치로부터의 촬영과 그 역위치로부터의 촬영(le champ contre champ, shot/reverse-shot)에 의한 방법이었다. 즉 그것은 가령, 대화의 장면에선 텍스트 순서에 따라 대화자 각자를 번갈아 가며 촬영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98-100쪽)

몽따쥬의 지양 (1): 공간적 깊이에 의한 화면구성

위에서 말한 류의 데쿠파주는 1930년에서 1939년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적합했던 방법이다. 이에 도전하고 나온 것이 오손 웰즈와 윌리엄 와일러에 의해 도입된 공간적 깊이에 의한 데쿠파주이다. <시민케인>에서는 . . . 공간적 깊이 덕택에 장면 전체가 카메라를 전혀 움직이게 하지 않고 단 한번의 쇼트로 처리해버리고 있다. 그 이전엔 몽따쥬에 의존했던 극적 효과들이 여기에선 모두 한번 결정적으로 선택된 화면구성 내에서 배우들의 이동에 의해 산출되고 있다. . . . 영상에 있어서의 소프트 포커스도 몽따쥬와 더불어 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다만 쇼트들의 접근이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에서 오는 기술상의 필연적 결과일 뿐 아니라 몽따쥬의 논리적 결과, 혹은 조형적 등가물이기도 했다. 만일 행위의 어느 순간에 연출가가 클로즈업을 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그는 렌즈의 초점을 그 대상에 맞도록 함으로써 그것을 공간 내에 고립시키는 결과가 되고 만다. 따라서 배경의 소프트 포커스는 몽따쥬의 효과를 확증해주는 바 그것은 다만 사진 양식의 부수적인 결과일 뿐이요, 본질적으로는 이야기 전개의 양식에 속하는 것이다. 장 르누아르는 1938년에, . . . “나는 내 자신의 기술이 전전되면 될수록 화면에 깊이가 있는 연출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된다. . . . 카메라 앞에 두 사람의 배우를 마주앉게 해서 보통 사진에서처럼 얌전히 위치를 잡게 하는 것 같은 구도를 포기하게끔 해 간다”. . . . 르누아르의 영화에서는 깊이 있는 영상 구성의 탐구는 실제로 몽따쥬의 부분적 폐지 . . . 몽따쥬는 빈번한 파노라믹 촬영과 화면 내에로의 인물의 등장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이러한 공간적 깊이의 탐구는 극적 공간의 연속성과 그리고 물론 그 지속의 연속성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 . . <위대한 앰버슨가>에서의 웰즈의 원 쇼트 원 시퀀스는 결코 동일한 화면 속에서 촬영된 한 행위의 수동적인 기록이 아니다. 오히려 사건을 분할하여 드라마의 장(場)을 시간 속에서 분석하는 일을 웰즈가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더 적극적인 작업을 의도하는 것이며, 그 결과는 고전적인 데쿠파주에 의해 산출될 수 있던 효과보다도 뛰어난 것이었다.《즉 공간적 깊이의 데쿠파주는, 클로즈업으로 대상을 강조하거나 교차편집으로 이야기의 효과를 최대로 하는 것과 같이, 몽따쥬의 극적 효과를 조형적인 수준에서 표현하는 것이다. 다만 몽따쥬가 시간과 공간의 현실적 지속을 제거해 버리고 극적 효과에만 주목한 것이라면, 공간적 깊이의 화면구성은 그러한 효과를 현실적 지속 안에서 직접 표현하려는 노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쟁은 이것이 몽따쥬의 부분적 폐지이며, 지속의 연속성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 . . [따라서 1910년대에 만들어진 쇼트와 웰즈나 와일러에 의해 만들어진 쇼트의 공간적 깊이를 비교해보면, 모두 동일하게 한 쇼트 한 시퀀스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둘은 서로 화면 구성이 다르다] . . . 1910년 영화의 화면구성은 실제로 연극무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네 번째 벽과 대등하지만 . . . 후자의 구성법에서는 그 무대장치와 조명, 그리고 카메라 앵글이 전자와는 전혀 다른 해독법을 보여준다. 연출가와 카메라맨은 하나도 빠짐없이 세부에 이르기까지 정확히 계획된 드라마의 장기판을 스크린 표면에다가 조립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예로 와일러의 <작은 여우들 The Little Foxes>, . . .(중략) . . . 《공간적 깊이의 화면구성은 우선 입체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무대장치나 카메라 초점 등을 철저한 계획 하에 잡는다. 단순히 초기 영화의 자연적 지각을 복사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나 극적 효과를 최대로 하기 위해 일종의 평면적 입체화, 몽따쥬화, 3차원화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와일러의 벤허를 보면, 메살라와 벤허가 논쟁하는 장면을 한 쇼트로 촬영하지만, 두 사람의 논쟁의 구도에 따라 혹은 힘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카메라의 위치와 앵글을 변화시키고 있다》.
달리 말하면 현대 연출가의 공간적 깊이에 의한 원 쇼트 원 시퀀스는 몽따쥬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몽따쥬를 자신의 조형적 요소의 하나로 통합하고 있는 것이다.《몽타주를 운동이라고 한다면, 몽타주에 의해 표현되었던 시간에서는 시간이 운동에 종속되었지만, 공간적 깊이의 화면구성에서는 반대로 운동이 시간에 종속된 예라고 할 수 있다》 웰즈나 와일러의 이야기는 . . . 시간 속에서의, 그리고 공간 속에서의 영상의 단일성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특수한 효과를 조금도 포기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존포드의 이야기보다 우월하다. 사건이 몇 개의 단편들로 쪼개져 분석되었는지, 혹은 그 물리적인 단일성을 지닌 채 표현되었는지 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을 그런 문제가 아니다. [몽따쥬에 의해 획득된 진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진보는 또한 영화적인 다른 가치들을 희생시킨 대가이기도 하다]. . . .
현실을 분석하는 데 있어 몽따쥬는 그 본성상 극적인 사건이 지닌 의미의 단일성을 가정한다. 물론 다른 방식도 가능하기야 하지만, 그럴 때엔 그것은 아주 다른 영화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요컨대 몽따쥬는 본질적으로, 본래적으로 표현의 애매성과는 상반한다. 쿨레쇼프의 실험은 바로 그런 것을 귀류법에 의해 증명한 것이라고 보는 바, 즉 그는 (가령 모주킨의) 얼굴 표정에 몽따쥬에 의해 매번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 서로 배타적인 세 개의 해석을 계기적으로 가능케 한 것은 다른 아닌 그 표정의 애매성이었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공간적 깊이는 영상의 구조 속에, 필연성으로서는 아니라 해도(윌리엄 와일러의 작품에는 애매하다고 할게 거의 없다) 적어도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애매성을 다시금 도입한다. . . 우리가 이 작품의 정신적인 열쇠에 대해 혹은 그 해석에 대해 언제까지나 계속 지니는 그 불확실성은 무엇보다도 우선 영상의 구도 그 자체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웰즈는 몽타쥬의 표현주의적 방법에 호소함을 일체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 깊이에 의한 원 쇼트 원 시퀀스들 사이에 때때로 삽입해 이용 함으로써, 바로 그 방법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주고 있는 것이다. 몽따쥬는 이전엔 영화의 재료 그 자체, 시나리오의 조직을 이루는 것이었었다. <시민 케인>에서는 이중인화의 연속이 이야기 전개의 명확히 추상적인 또 다른 하나의 양상에 다름 아니다. 원 쇼트만으로 표현되는 원 신의 연속과 대립되고 있다. 가속 몽따쥬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트릭을 쓰기도 하지만 웰즈의 가속 몽따쥬는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그것은 대조적으로 스스로를 응축되어진 시간으로서, 예컨대 프랑스어의 반과거형이나 영어의 반복동사와 같은 것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해서 발성영화가 10년래 쓰지 않고 있던 가속 몽따쥬나 견인 몽따쥬, 이중인화 등이 몽따쥬 없는 영화에서의 시간상의 리얼리즘을 위해서도 가능한 사용법을 재발견해냈다.(101-106쪽)

몽따쥬의 지양 (2):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 . .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파이자 Païsa>와 <독일 영년 Allemania Anno Zero> 그리고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에서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은 모든 표현주의의 포기와 특히 몽타주에 의한 여러 가지 효과의 완전한 결여에 의해 영화적 리얼리즘의 이전 형식들과 대립하고 있다. 웰즈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양식상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네오리얼리즘은 현실의 애매성이 갖는 의미를 영화에 되돌려주고자 한다. <독일 영년>에 나오는 소년의 얼굴에서 . . . 로셀리니의 관심은 모주킨의 클로즈업에서의 쿨레쇼프의 관심과는 정 반대이다. 로셀리니에게 그 소년의 얼굴이 지닌 신비함을 그대로 간직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 . . 로셀리니와 데 시카의 방법(데쿠파주 기술)은 미국영화처럼 장관은 아니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몽따쥬를 무효화하고 스크린 상에다가 현실의 참된 연속성을 옮겨놓고자 했던 것이다. 자바티니의 꿈은 바로,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한 인간의 생애를 90분짜리 영화로 찍는 것이었다! 네오리얼리즘의 감독들 중 최고의 심미주의자였던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의 영화에서까지도 거의 원 쇼트 원 시퀀스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영화 <대지는 흔들리다 La Terra Trema> . . 에서는 사건의 전체를 포착하려는 배려가 공간적 깊이와 한없이 길게 이어지는 파노라믹에 의해 표현되었던 것이다.(106-107쪽)

미술영화에서 회화와 영화의 관계

(1) 미술영화는 회화를 왜곡하고 변질시킨다는 관점에 대해 ― . . . 영화적 종합을 목적으로 작품을 이용하는 미술영화는 때때로 화가들과 많은 미술비평가들 사이에 하나의 커다란 이의를 제기시킨다. . . . 이 이의는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귀착한다. 즉 회화를 이용하기 위해 영화는 회화를 배반하고 있으며 그것은 모든 면에서 그렇다고 하는 것이다. 영화의 극적, 논리적인 통일성은 때로는 시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매우 떨어져 있는 작품들 간에 연대기나 허구적 관계를 설정한다. . . . 그러나 영화작가는 미술사의 기지(旣知)의 사실을 면밀하고도 세심하게 존중함으로써, 역시 그의 작업을 미학적으로 부자연스러운 조작 위에다가 근거시킨다. 그는 처음부터 종합적인 작품을 분석하고 그 작품의 통일성을 파괴하여 화가가 생각하는 종합과는 다른 새로운 종합을 이룬다《즉, 알려진 사실만을 종합할 뿐이며, 이미 결정된 담론과 견해만을 스크린에 옮길 뿐이다. 관객은 결국 동어반복에 의해 왜곡된 그림만을 접하게 될 것이다》. . . . 거기엔 좀 더 중대한 문제가 담겨져 있다. 즉 배반당하고 있는 건 화가 이상으로 회화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면 관객은 본래의 회화를 극도로 성질을 바꾸어놓는, 한 조형 시스템에 따라서 그것을 지각하도록 강요되고 있는 터에, 자신이 본래의 회화를 눈 앞에서 보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선 흑백에서 그러한데《이 시기에는 흑백영화가 지배적이었으므로》, 천연색 영화라고 해도 만족스런 해결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어느 색채도 충실하게 재생되지를 못했으며 그림의 모든 색채의 조화가 그들 색채의 하나하나의 색조에 깊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그림의 시간성은(그림의 시간성이 인정되는 한에서) 지질학적으로 깊이의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대해서, 몽따쥬는 지리학적이고 수평적인 방향으로 전개되는 시간적 통일성을 재구성한다. 마지막으로 특히 중요한 것인데(가장 중요한), 스크린은 회화공간을 근본적으로 파괴한다는 것이다. 연극이 풋라이트와 무대의 건축구조에 의해 현실세계와 대립되듯이, 회화는 실제로 그 회화를 둘러싸고 있는 프레임에 의해 현실세계 그 자체와, 특히 그 회화가 표현하는 현실과 대립된다. 사실상 그림의 프레임에서 단순히 장식적, 수사적인 기능밖에는 보지 못한다는 건 안될 말이다. 그림의 구도의 강조는 프레임의 이차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보다 본질적으로 프레임은 회화적인 소우주와, 그림이 자리하기에 이른 자연의 대우주와의 이질성을 창출한다고는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그것을 강조한다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다. 그림과 그 벽 사이에, 즉 회화와 현실 사이에, 정확히는 정의하기 어려운 단절을 만드는 일을 떠맡았던 전통적인 프레임의 바로크적인 복잡성은 그러한 것에서 유래한다. . . .
다시 말하면 그림의 프레임은 방향을 잃게 하는 공간지대를 구성하고 있다. 그것은 자연의 공간, 그림의 바깥 한계를 테두르는 우리의 적극적인 경험 활동의 장(場)인 공간에 대하여 내부로 향해지는 공간, 오직 그림의 안쪽으로만 향해 열려져 있는 명상적인 공간을 대립시킨다.《프레임이 방향을 잃게하는 공간지대를 구성한다는 것은 불특정 공간, 이름없는 공간, 방위가 불투명한 공간을 프레임에 담기 때문 . . .미학적으로는 경향성이나 방향성이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다 . . . 그러나 영화는 방향이 있으며 운동이 있고 방위가 있다. 그래서 영화는 명상이나, 주관적 세계 안에만 있을수가 없다》.
스크린의 한계는, 기술용어가 종종 암시하고 있듯이, 영상의 프레임이 아니라 현실의 일부분밖엔 드러내놓을 수 없는 까슈(Cache)인 것이다. 프레임은 공간을 내부로 향해서 편극화시키는 데 비해, 스크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든 것은, 반대로 우주 안으로 무한히 연장되어지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프레임은 구심적이요, 스크린은 원심적이다. 만일 이 회화적 과정을 역전시켜 스크린을 프레임 속에 끌어넣는다면, 그림의 공간은 그 방향과 한계를 잃고 무한한 것으로 우리의 상상력에 주어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림은 예술로서의 다른 조형적 성격을 잃지 않고 영화의 공간적 특성의 영향을 받아 그곳으로부터 도처에 넘쳐 나오는 잠재적인 회화적 우주에 흡사한 것이 된다. 루치아노 엠메르는 그의 환상적인 미적 재구성의 근거를 그러한 정신적 환각에 두었던 것이다. 이제 이 <반 고흐>에서 감독은 화가의 작품 전체를 . . . 자유로이 카메라가 이동할 수 있는 단 한 장의 거대한 그림으로 취급할 수가 있었다. ‘알르르 가’로부터 우리는 창문을 통해 반 고흐의 집 안으로 침투하고 붉은색 새털이불이 덮인 침대에 접근한다. 동시에 레네는 고흐의 집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한 늙은 네덜란드 농부 부인의 모습을 배면촬영(contrechamp)으로 잡기까지 하고 있다.(243~245)

(2) 그러나 미술영화는 오히려 회화의 가치를 높인다 ― . . . 우리에게 회화를 충실하게 복원시켜줄 수 없다고 해서 영화를 비난 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수백만의 관객에게 걸작품에 이르는 문을 열어준다고 감탄할 수는 없는가? 사실, 하나의 그림을 감상하고 그것을 미적으로 향유하는 데에도 관객에게 예비적인 가르침이 없이는, 그려진 표면의 존재양태를 자연스런 외부세계로부터 확연히 구별시키는 추상화(抽象化)의 노력을 관객으로 하여금 가능케하는 회화교육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19세기까지는 유사성이라고 하는 알리바이가 문외한에게도 그림 속에 들어가 볼 수 있으리라고 믿게끔 한, 사실성에의 오해를 만들어내었고, 또 극적이거나 도덕적인 일화가 교양없는 사람들을 위한 기회를 더 증가시켰다. 오늘날에 와서는 사정이 이와 같지 않음 . . . 루치아노 엠메르, 스토르크, 알랭 레네, 피에르 카스트 등의 영화적인 실험에서 결정적인 요인 . . . 즉 . . . 그들이 회화작품을 자연스런 지각 속에, 말하자면 용해될 수 있는 것이게 한 것에 성공하고 있다고 함을, 따라서 그 회화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두 눈만 가지면 아주 충분하여 어떠한 교양도, 어떠한 가르침도 필요로 하지 않고 직접 향유할수 있다고 함을 의미하고 있다. 거기선 회화를 하나의 자연현상으로서 영화 영상의 구조를 통해 정신에 과해지는 것이라고까지 무리하게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 . . 영화의 액션은 외면적인 것에, 확실히 사실적인 것에 그치고 있다. 단, . . . 그림의 추상화로부터 출발하여 제2단계로 옮겨진 리얼리즘의 입장으로부터의 사실적인 것에 있는 것이다. 영화와 스크린의 심맂거 특성 덕택으로 치밀하게 공들여 만들어낸 추상적인 기호가 모든 정신에 대해 광물적 현실의 명백성과 무게를 되찾는다. 그러므로 영화가 다른 예술을 위험에 처하게 하고 왜곡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반대로 그 예술에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모아 그것을 구해주고 있다 . . .
교육적 측면과는 다른, 순전히 미학적인 이의에 대해서는 어떤 오해에서 출발하고 있다. 사실상 <반 고흐>나 <고야>는 그 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제시가 아니다. 또 혹은, 단순히 그 작품에 대한 새로운 제시인 것뿐만이 아니다. 영화는 거기에선 화집 안의 사진이나 강연의 일부로서의 영사(映寫) 따위와 같은, 종속적, 교육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한 영화들은 그 자체가 작품인 것이다. 그 영화들을 정당화하는 건 그것들 자체 내에 있다. 그들 영화를 단지 그것들이 이용하고 있는 회화와의 관계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고 회화와 영화의 결합에서 생긴 이 새로운 미학적 존재의 해부에 의해, 혹은 차라리 그 조직학에 의해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 . . 영화는 회화에 봉사하러 나온 것도, 회화를 배반하러 나온 것도 아니요, 회화에 하나의 존재방식을 첨가해주고자 나왔다. 회화의 영화는 조류와 버섯류 사이의 지의류처럼, 스크린과 그림간의 미학적 공생물인 것이다. 그러한 것에 분개를 한다는 건 연극과 음악의 이름으로 오페라를 단죄하는 것만큼이나 부조리한 일이다.(246-48)

(3) 회화영화는 회화에 대한 비평적 재창조이다 ― 회화의 영화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아니다. 그것의 역설은 이미 완전히 구성되어져 있어 그 자체로 자족적인 작품을 이용한다고 하는 점에 있다. 그렇지만 그 영화가 이미 미학적으로 치밀하게 공들여 구상된 재료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 건 바로 그 영화가 그 재료로부터 출발해서 그 대신에 제2단계에로 옮겨진 한 작품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 . . . 그래서 또한 그것은 아마도 그 영화가 완전히 하나의 작품이 되고, 그럼으로써 그것이 회화를 가장 배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결국은 가장 회화에 잘 봉사하고 있는 경우에 따를런지도 모른다. . . . 알랭 레네가 스스로에게 허용한 자유로움은 모든 참된 창조물이 갖는 다의성과 다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더더욱 그리고 특히 여기에선 창조물 그 자체가 원작에 대한 최고의 비평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회화작품을 왜곡시키는데서, 그 프레임을 깨뜨려버리는데서, 그 본질 자체에 대해 공격을 가하는 데서 영화는 그 회화작품에게 그것이 담고 있는 비밀스런 잠재력의 얼마를 내보이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우리는 레네의 영화를 보기전에 황색을 뺀 고흐가 어떻게 보일까를 정말 알고 있었던가? . . . 재창조라고도 할 수 있는 문예비평이 존재한다. 들라크르와에 대한 보들레르의 비평, 보들레르에 대한 발레리의 비평, 그레코에 대한 마를로의 비평이 그러한 것들이다. . . .(249-50)

베르그송적 영화: <피카소의 비밀>

. . . [Henri Georges Clouzot(1907-?)의 56년작 <피카소의 비밀>]은 오늘날까지 실현된(제작된), 많건 적건 직접적으로 교육적인 미술영화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사실 클루조의 영화는 피카소의 것을 조금도 설명치 않고 그를 보여줄 뿐이다. 거기서 끌어낼 수 있는 교훈이 만일 있다면 그것은 예술가가 작업을 하고 있는데를 본다고 해도 비결을 얻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 . . 엄밀히 예측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지는 단 하나의 선도, 단 한 색채의 얼룩도 존재하지를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예측불가능성은, 반대로, 간단한 선이나 얼룩에 의한 합성물에 대해서도 설명이 없음을 예상케 한다. 이 예측 불가능성은 진정 참이어서, 볼거리로서의, 그리고 또 보다 정확하게는 서스펜스로서의 이 영화의 모든 원리가 이 같은 기대와 끊임없는 경악에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피카소의 선 하나하나는 원인이 결과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이 아니라 생명이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자체 내에서 다른 창조물을 만들어내는 그런 창조물인 것이다. 피카소가 아직 데생을 하고 있는, 그림의 제일 첫 단계 속에 특히 눈에 띄게 두드러진 그 과정이 있다. 즉 손과 연필은 보이지를 않고 밖으로 나타난 선이나 점 밖에는 그 손과 연필의 위치를 알게 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속히 우리의 정신은 다소 의식적으로 어떻게 선이나 점이 나타나고 있는가를 간파하고 예측하고자 노력하지만, 그러나 항상 피카소의 결정은 우리의 기대(예상)를 완전히 배반한다. 우리가 우측에 손이 있다고 믿었는데 선은 좌측에 나타난다. 우리가 선을 기대하고 있는데 얼룩이 나온다. 얼룩인가 했더니 이번엔 점이다. 제재에 대해서도 샂어은 이와 같은 때가 많다. 물고기가 새가 되고 새가 목신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은, 또 다른 관념, 회화적 지속(시간)의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 . . <피카소의 비밀>이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 그것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던 것, 곧 창조의 지속이 아니라 그 지속이 작품 그 자체에 있어 필요 불가결한 부분이 될 수 있는, 완성 단계에서는 바보스럽게 무시되고 마는 보완적인 한 차원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작자 자신이나, 우연이나 병기(病氣)나 죽음에 의해 많건 적건 자의적으로 절단된, 창조적 유출의 수직적 단면에 다름 아닌 그림밖엔 알지를 못했다. 클루조가 마침내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 그것은 회화, 즉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자신의 지속과 자신의 생명을, 그리고 때로는(이 영화의 최후에서처럼) 자신의 죽음도 지니는 한 폭의 그림인 것이다.
. . . [화가가 어떻게 이 그림을 지금 있는 그 상태로 만들 수 있었는가? 하는 개체발생학적 관심이 종래의 교육적 미술영화에 지배적 . . . 그러나 이것은 정당하긴 해도 진부하며, 미적이기보다는 교육적인 것에 그침] . . . <피카소의 비밀>가운에에는 중간적인 각 단계가 최종적인 완전성(충족)에로 향해 나아가는 길이 그렇듯이, 종속적이며 좀 열등한 현실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이미 작품 그 자체, 그렇지만 화가가 멈추어 서고 싶을 순간까지 회한으로 가슴이 에어진다거나, 아니, 오히려 계속 변신이 되어간다거나 하게 운명이 지워진 작품 그 자체인 것이다. 그것은 피카소가 “그림 밑에 있는 그림을 보여줄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을 때에 그가 완벽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그는 에스키스(초벌그림)라든가 “어떻게 해서 그림에 도달하는가”하는 따위의 말은 하지를 않았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선 실제로, 그리고 가령 완성의 관념이 그를 인도하고 있다고 해도, 두텁게 입히거나 또는 두 벌 칠해지고 있는 각 단계가 꼭 같이 그림―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그림 때문에 희생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림―이었던 까닭이다. . . . 그림의 관념이 여기서는 그림을 자신의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삼는 회화라고 하는, 보다 더 통합적인 관념[보다 상위의 관념]에 종속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된다. 피카소라는 인간에 있어서도 연작(連作)의 중요성은 알려져 있는 바다. 그의 유명한 황소의 진화를 회고해보는 것만으로 좋겠다. 그러나 영화만이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불연속적인 것의 조잡한 근사성을 연속적인 시상(vision)의 시간적인 리얼리즘에로 이전시킴으로써 마침내 지속 그 자체를 눈에 보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 . . 이제까지 보아온 모든 미술영화와 <피카소의 비밀> 사이에는 단순한 개량 이상의 것이, 또는 정도의 차이 이상의 것이 있다. 창조 과정에 있는 작품, ‘진행 중의 작품’에 대한 응시는, 전에는 대상에 대한 접근 방식과 그 대상에 대한 관점을 증가시키는 교육적인 미술영화의, 비교적 짧은 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았다. . . . 이 영화는 일체의 전기적, 묘사적, 교육적인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단지 그러한 초단편 몇몇의 전개만으로 시종일관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여, 클루조는 이처럼 어려운 놀이에서는 누구라도 내놓지 않고 남겨둘 것임에 틀림없는 상수패를, 즉 다양한 변화라고 하는 상수패를 고의로 내던졌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보는 바로는 예술창조의 행위만이 오직 진정한 볼거리의 요소를, 즉 본질적으로 시간적인 것으로서의 영화적인 요소를 구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창조적 행위란, 순수한 상태에 있는 기대(예상)와 불확실성인 것이다. 결국, 제재의 부재가 그 자신에게 계시하도록 하는 서스펜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클루조를 매혹시킨 것은 틀림없이 이런 것이었다. . . . 여기서는 서스펜스가 더 이상 사실상으로 극적 진행의 한 형식, 즉 액션이나 그 격발, 또는 그 난폭함의 어떤 배열과 혼동되는 법이 없다. 문자 그대로 여기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를 않는다. 적어도 작화행위의 지속밖에는 아무 일도 없다.
. . . 공간의 단순한 논리적 변용이 아니라 시간적인 성질을 띤 변용 . . . 그것은 하나의 발생이요, 하나의 발아인 것이다. 포름이 포름을 그 정당성을 결코 증명함이 없이 낳는다. . . . 영사가 착각을 이용해서 해가는 움직이지 않는 데생으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라 우선 스크린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캔버스를 그것의 실제 지속시간 속에서 촬영하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다.

. . . [그림의 제작 속도를 빨리 한다든가 원래의 사태의 시간을 변경하기 위해 몽따쥬로 속임수를 썼다든지 하는 문제에 대해 . . .] . . . 클루조는 당연히도 피카소의 작업 속도를 빨리 하고 있음을 부인한다. 촬영은 항상 매초 24콤마로 행해졌다. 그러나 몽따쥬는 낭비된 시간이나, 길어진 지속시간을 감독 마음대로 삭제하고, 동시에 두 선을 출현시키기까지 한 것에서 마찬가지로 트릭을 구성한 것이 아닌가? 나의 대답은 아니다고 하는 것이다. 트릭과 위조는 구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클루조는 우리를 속이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멍청한 자들만이 가속 몽따쥬의 효과를 의식하지 못한다. . . . 무엇보다도 몽따쥬의 시간과 촬영시간은 근본적으로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자는 추상적, 지적, 상상적, 구경거리적인 것이요, 후자만이 구체적인 것이다.《바쟁은 여기서 영화의 본질이랄 수 있는 몽따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부정하는 것은 허구적이고 추상적인 운동과 시간을 만드는(예로, 에이젠슈타인의 분노의 사자상과 같은) 위조와 속임수를 부정하는 것이다》. 어떠한 영화에서도 몽따쥬에 의한 시간의 자유로운 분할을 허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모자이크의 각 단편(조각)은 매초 24콤마의 사실적인 시간적 구조를 지켜가고 있는 것이다. 클루조는―그런 점에서 그를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고속촬영을 한 과학영화에서의 식물처럼, 활짝 피어나는 꽃=그림으로 우리를 속이는게 되지 않도록 매우 조심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는 감독으로서 구체적인 지속시간을 변성(왜곡)시킴 없이 그것을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는, 구경거리가 될 만한 시간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느꼈던 것이다. . . . 클루조는 말의 한정된, 그리고 교육적인 의미에서의 기록영화를 실현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의 구경거리가 될 만한 시간을 참작할 수가 있었고 또 그렇게 했음에 틀림없는 진짜 영화를 실현시킨 때문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영화는 미리 있던 외부 현실의 단순히 움직이는 사진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회화적 사건과의 미적 공생 상태에서 정당하게, 그리고 내면적으로 조직되고 있는 것이다.《포즈들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 추상화된 시간이나 공간이 아니라, 열린 우주, 즉 이미 스크린이 우주자체의 일부가 되어 있는, 우주적 시간의 일부이다》
. . . 색채의 활용에 대해 . . . 실제로 <피카소의 비밀>을 보았을 뿐인 사람에게 이 영화가 흑백인가 또는 컬러인가고 물어 보라. 십중팔구는 약간 망설이다가 ‘컬러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 . . 이 영화는 믿기 어려운 모순 위에 만들어져 있다 . . . 이 모순은 물리의 자연스런 도리 그 자체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사실은 <피카소의 비밀>은 오로지 스크린이 회화에 의해 점령당하는 경우만을 제외하고는 컬러 필름에다가 찍은 흑백영화인 것이다. . . . 클루조는 . . . ‘회화를 제외하곤’ 현실의 세계가 흑백으로 가능함을 자연스런 현실로서 받아들이게 했다. 컬러의 포지 필름(La pellicule positive/positive film)의 화학적인 불변성이 전체에다가 필요한 실질적 통일성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때 자기 자신의 그림 위에 끼어 드는 화가의 모습은 흑백인데, 그의 모습의 반대위치에서의 촬영은 컬러로 되고 있음을 당연한 것으로 알게 된다. . . . 이 영화는 제 2단계로 옮겨진 최초의 컬러 영화로 보는 쪽이 더 낫다. . . . 클루조가 전부를 컬러로 촬영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되면, 회화는 화가와 같은 현실의 국면상에 조형적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스크린 상으로는 캔버스의 저 청색은 화가의 눈의 청색과 같은 색이 될 것이고 저 적색은 클루조의 셔츠의 적색과 같은 색이 될 것이다. 따라서 캔버스 상의 색채의 상상적 또는 미적 존재양식을, 현실의 색채와는 대조적으로, 스펙터큘라하게 명백하고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서는 제2단계의 색채를 창조하여 적색과 청색을 말하자면 제곱해줄 수가 있게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생각도 할 수 없는 미학적 연산(演算)을 클루조는 위대한 수학자의 솜씨로 해결했다. 그는 색채를 제곱하지 않고도 결국은 색채를 색채 자체에 의해 구분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연적 현실은 색채에 의해 곱해진 형(形)(la forme multipliée par la couleur 여기서는 “색채×포름=자연적 현실”이라는 공식을 생각한 듯함)에 다름아닌 것이어서, 현실세계의 색채 위에 중첩된 색채인 회화는 구분되어진 후에도 그 미학적인 채색을 간직하는데 반하여 자연의 현실은 구분된 후에는 오직 형(포름)만으로, 즉 흑백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관객이 고작 콘트라스트(대비) 밖엔 알아치리지 못하는 건 여기에 연유한다. 왜냐하면 현실의 진짜 관계는 변경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실상, 우리가 한 폭의 그림을 관조할 때, 우리는 그 색을 벽 색깔이나 화가(畵架)의 색깔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확연히 지각한다. 그 때에 우리는 잠재적으로, 회화적 창조물을 위해 자연의 색채를 소멸시키고 있는 것이다. 클루조는 거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와 같은 정신적 과정을 재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환언하면, <피카소의 비밀>은 ‘전적으로 회화적인 시퀀스를 빼고는 그 다음 모두가 흑백 영화’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또 전혀 반대로 회화 이외의 시퀀스에서는 흑백으로 후퇴한 컬러 영화인 것이다.(251-263)

로셀리니의 <독일 영년>: 심리적 객관성 혹은 차가운 리얼리즘

불가해한 것은 우리를 두렵게(겁나게)하며, 어린이의 얼굴은 모순되는 욕망을 우리에게 유발한다. . . . 우리는 불가해한 것에 맞부딪히면 안심을 얻기를 바라며, 별 생각 없이도 우리 자신의 감정과 꼭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감정을 아이들이 표정에 나타내주었으면 하고 기대 한다. 우리는 그들의 얼굴에 공모의 표시가 보이기를 요구하며 관중은 아이가 보통의 감정을 어른들에게 나타내 보일 때 얼른 그의 손수건을 꺼내든다. 이처럼 우리가 그들 얼굴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 자신, 우리가 잃어버린 천진성이나 서투름 혹은 소박성 같은 것 이상으로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구경거리가 우리를 감동시키지만 그럴 경우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상에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 . . 그러한 영화들은 어린이 시절을 . . . 우리에게 이해되거나 공감하기 쉬운 그런 것처럼 취급하여 전적으로 인간동성론(어른이건 아이건 인간으로서 같은 성격, 같은 사유방식을 지닌 존재로 보는 관점)에 따라 제작되어지고 있다. . . .
로셀리니의 심오한 독창성은 감상적인 동정에 대한 일체의 의존, 인간동성론에의 일체의 양보를 단호하게 스스로 거부한 점에 있다. . . . [독일 영년에서 살인과 범죄를 저지르는 소년의 무표정, 냉정함 . . . 사람들로부터 거절 당하고, 그들로부터 버려지는 끝, 자살 . . . ] . . . 로셀리니가 어째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의 주인공을 다루려는 생각을 했는가는 우리가 잘 아는 바이다. 이같은 심리적 객관성은 처음부터 그의 스타일의 논리 속에 있었던 것이다. 로셀리니의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의 입장에 서 있는 영화가 (르누아르의 영화를 제외하고는) 그 때까지 실현할 수 있었던 일체의 것과 공통된 점을 조금도 지니고 있지를 않다. 그것은 제재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스타일의 리얼리즘인 것이다. 아마도 그는 하나의 이야기를, 그 문맥과 같은 연출 기획에 따라 전혀 객관적으로 전개함으로써, 그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흥미를 일으켜줄 수가 있던, 세계에서 단 한 명의 연출가였을 것이다. 거기에서의 우리의 감동은 센티멘털리티를 전혀 담고 있지를 않다. 그것은 그 감동이 우리의 지성에 반향되지 않을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배우도 아니고 사건도 아니다. 우리가 거기에서 이끌어내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고 있는 의미인 것이다. 이러한 연출법에 있어선 도덕적 내지 극적인 의미는 결코 현실의 표면에 드러나도록 존재하고 있지를 않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는 우리에게 양심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불가피하게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예술상의 리얼리즘의 확고한 정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즉 정신을 강제하여 추호의 속임수도 없이 인간과 사물 편에 우리가 선다고 하는 것 말이다.(265-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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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을 중심으로 한 논문 전편 발췌
1. 영화적 리얼리즘과 해방시대의 이탈리아 영화 그룹
2. <대지는 흔들리다>
3. <자전거 도둑>
4. 연출가 데 시카
5. 화금석 <움베르토 D>
6. 까빌리아의 밤 혹은 네오-리얼리즘 끝으로의 여행
7. 로셀리니의 옹호
8. <유럽 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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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리얼리즘 계열의 영화 <자전거 도둑>

. . . <자전거 도둑>으로 데시카는 궁지에 벗어나 네오리얼리즘의 모든 미학을 새로이 다시 정당화하는데 성공했다.
<자전거 도둑>은 1946년 이래의 가장 우수한 이탈리아 영화들로부터 추출해낼 수 있는 모든 원칙에 비추어보아 네오리얼리즘적인 영화라 할 수가 있다. 민중적인, 그리고 포퓰리즘 식이기도 한 줄거리, 즉 한 노동자의 일상생활에서 우연히 일어난 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것은 장 가뱅 Jean Gabin식 구제가 노동자들 위에 덮치는 예정된 사건과 같은, 그 일상적이지 않은 특이한 사건 따위의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전에는 올림푸스 산에 사는 자들에게나 허용되었던 비극적인 대토론을 프롤레타리아 엘조티즘 속으로 옮겨놓을뿐인 치정사태나, 장대한 형사사건의 동시 발생 따위는 하나도 없다. 실제로 그것은 보잘 것 없고 흔배빠진 하나의 우발사건, 한 노동자가 도둑맞은 자전거를 온 로마를 찾아다니며 하루를 헛되이 보낸다고 하는 것밖엔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 자전거는 그의 직업수단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을 찾지 못하면 그는 아마도 실업자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저녁에, 몇 시간이나 헛되이 돌아다닌 끝에, 그도 또한 한 대의 자전거를 도둑질하려고 한다. 그러나 체포되었다가는 방면되지만 그는 이전과 꼭같이 가난한 자신, 그러나 이제는 게다가 그의 자전거를 훔친 사람과 같은 처지로 떨어졌다고 하는 수치심마저 짊어졌을 뿐인 가난한 자신을 다시 발견한다.
. . . 이 이야기를 . . . 프레베르 Jacques Prévért나, 또는 제임스 카인 James Caïn식의 사실주의적 비극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사건을 그 자체 속에, 어떠한 고유의 극적인 원자가도 소유하고 있지를 않다. 그것은 피해자의 사회적인(심리적이거나 미학적인 것이 아닌) 상황의 함수로서만 뜻을 가진다《즉 인물의 심리나 그 심리에 관한 미학적인 표현이 아닌, 사회적 존재로서의 현실이나 상황에 관한 것 외에는 어떠한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사건은, 그것을 1948년의 이탈리아 사회에다가 위치지우고 있는 실업의 공포 없이는 흔해빠진 재난에 불과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드라마의 열쇠가 되는 물건으로서 자전거가 선택된 것은 이탈리아의 도시 풍속의 특징과 동시에 기계적인 수송수단이 아직 흔치 않고 또 값비싸던 한 시대의 특징도 나타내고 있다. 의미 있는 다른 많은 세부사항이, 현실에 대한 시나리오의 접합점을 증가시키고, 이 시나리오를 어느 고장, 어느 해의 정치, 사회적인 역사의 한 사건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은 더 강조하지 않기로 하겠다.
연출의 기술도 또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가장 엄격한 요구들을 만족시키고 있다.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장면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거리에서 촬영되었다. 연기자에 대해 말하더라도 그들 중 누구 한 사람도 연극이나 영화에 나왔던 경험이 전혀 없었다. 노동자는 브레다사의 공장 출신이고 소년은 거리의 떠돌이들 속에서 발견되었으며 아내는 한 여성 저널리스트이다. . . . 이야기로서 이처럼 비천한 면의 취급은, 이탈리아적인 이야기의 가장 논의의 여지가 있는 방향으로, 즉 어떤 생활참상 묘사주의와 말초적인 어두운 사건의 계획적인 탐구로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380-382)

공산주의 영화로서의 <자전거 도둑>

만일 <자전거 도둑>이 엄밀한 뜻에서 <파이자>와 비교될 수 있는 순수한 걸작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시나리오의 개요에서도, 또 연출 기술의 표면적인 설명속에서도 역시 나타나지 않은 몇 가지 아주 명확한 이유 때문이다.
우선, 시나리오가 놀랍도록 능란한 데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적 현실성의 알리바이로부터 출발하여 그 현실성을 모든 방향에서 뒷받침하는 몇 가지 극적인 좌표의 체계들을 교묘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전거 두둑>은 확실히 근래 10년 이래의 유일한 값진 공주의적인 영화인데, 그것은 바로 이 영화가 설사 그 사회적인 의미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역시 어떤 의미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사회적 메시지는 표출되어 있지를 않고 사건에 내재한 채로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도 명료하여 누구나 그것을 알게 되지 않을 수가 없으며, 또한 그것이 결코 메시지로서는 명시되어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복잡하게 뒤얽힌 명제는 멋지고도 놀라운 단순성을 가지고 있다. 즉 이 노동자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은 살림을 꾸려나가기 위해서 서로 간에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제는 결코 명제로서는 제기되어 있지 않고 사건들의 연결고리가 언제나 엄밀하면서도 동시에 일화같은 박진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 . . 바꾸어 말하자면, 이것이 선전영화라고 할 때엔 노동자가 그의 자전거를 다시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는 그의 빈곤의 악순환에 필연적으로 빠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데 시카는 노동자에게는 그의 자전거가 발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것을, 그리고 그가 아마도 그 때문에 실업자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만으로 그친다. . . .
. . . 이 영화는 사건이나 인간들을 경제적인, 혹은 정치적인, 마니교적 이원론으로 몰아넣는 일은 결코 없다. 이 영화는 연속되는 사건들에게 우연적인 또는 일화에서와 같은 시간적 순차성을 줌으로써만이 아니라 그것들의 하나 하나를 그 현상의 전체성(역주. 어떠한 담론도 있기 전이건, 또는 여기서처럼 ‘현실을 속이는’ 수도 있는 극적 처리 없이 그것을 나타내는 경우이건, 여하튼 우리의 감관과 정신에 그 자체 그대로 나타나는 사건)에서 다루는 것에 의해서도 현실을 속이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 소년이 한참 자전거를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소변이 보고 싶어진다면 그는 소변을 본다. 소나기 때문에 부자(父子)가 어느 집 문 밑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가 있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면 우리 또한 그들과 같이 탐색을 단념하고 소나기가 그치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사건들은 본래, 무엇인가 우리를 납득시키지 않으면 어떤 진실의, 조짐 따위가 아니라, 그것들은 그것들의 무게의 전부, 그것들의 독자성의 전부, 그것들의 사실상의 애매성의 전부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여러분에게 보는 눈이 없다면 사건의 결과들을 불운과 우연 탓으로 돌린다 해도 그것은 여러분의 자유이다.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노동자는 노동조합에서도 거리에서나 마찬가지로, 또 혹은 더 나아가 그가 바로 뒤에 가서 빠지게 된 그 카톨릭 퀘이커 교도들의 말하기 어려운 야릇한 장면에서조차도 소외되어 있고 고독하다. 왜냐하면 조합이라고 하는 것은 자전거를 발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자전거를 잃는 것이 그 인간을 불행에 바지게 하는 것과 같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노동자는 조합적으로 불평을 늘어놓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둑맞은 물건을 찾는데 힘이 되어줄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조합원들의 집단도, 불행한 한 노동자에 대해서는 부르주아 우두머리들의 조합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같은 사적인 재난 속에서는, 이 벽보 붙이는 사람은 조합에서나 교회에서나 어디서고(친구들은 별도라고 하지만, 그러나 친구라고 하는 것은 사적인 문제이다) 고독하다. 그러나 조합과 교회가 이렇게 유사하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대비를 뚜렷이 떠오르게 하고 있기 때문에 대단한 수완에 속한다. 조합이 냉담한 것은 정당하고 당연하다. 왜냐하면 조합은 정의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지 자선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톨릭 퀘이커 교도들의 거추장스러운 부성(父性) 감정에는 참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자선은 이와 같은 개인적인 비극의 원인인 세상을 진정으로 바꾸기 위해 무엇 한 가지도 하려고 하지를 않고, 그 비극에 대해서 장님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가장 성공한 장면은 현관 밑에서 소나기를 만난 장면일 것이다. 그 때, 일단의 오스트리아 신학생들이 노동자와 그의 아들 주위로 달려들어온다.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수다스럽다고, 그리고 게다가 독일어로 지껄인다고 하여 그들을 비방할 아무런 정당한 이유가 없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이보다 더 반교회주의적인 상황을 창출해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 . . 사건들과 인간들이 단 하나의 사회적 명제를 지지하느라고 도입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럼에도 명제는 그것들로부터 완전히 보강되어 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에겐 더욱 보강된 형식으로밖엔 주어지지 않으므로 그런 만큼 더욱 더 반박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여기서 명제를 이끌어내어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지 영화는 아니다. 데 시카는 언제나 화면을 사로잡는다. . . . <자전거 도둑>은 이처럼 객관주의라는 것을 서로 교환가능한 제재로 전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인 최초의 결정적인 예이다. 데시카와 자바티니는 네오리얼리즘을 저항에서 혁명으로 이행시켰다.(382-386)

아이와 아버지의 관계

. . . 노동자가 만나는 사건에 그 윤리적 차원을 부여하고 사회적인 것에 불과할 뿐인 이 드라마를 개인적인 도덕적 퍼스펙티브(원근법)로 파고들어간 것은 이 소년인 것이다. . . . 사실, 소년은 아버지 옆을 종종 걸음으로 걸으면서 아버지의 뒤를 따라갈 뿐이다. 그러나 그는 안쪽으로부터의 증인, 아버지의 비극과 결부된 특수한 합창단원인 것이다. 소년의 인물에 극의 사적인 성격을 구현하기 위해 부인의 역할을 거의 제거한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능숙한 기법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성립되는 공모관계는 도덕적인 삶의 뿌리에까지 침투하는 예민함을 보이고 있다. 이 영화의 결말에 그 비극적인 고귀성을 주고 있는 것은, 아들이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해 품는 존경심과 이에 대해 알고 있는 아버지의 의식이다. 가면이 벗겨지고 길 한복판에서 뺨을 맞는 노동자의 사회적인 치욕은, 그의 아들이 증인으로서 느낀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가 자전거를 훔치고 싶다고 하는 유혹에 빠져갈 때 아버지의 생각을 꿰뚫어보게 되는 소년의 무언의 존재는 거의 외설스럽다고까지 할 잔혹성을 지닌다. . . . 이 사건은 아버지와 아이와의 관계 속에 있는 어떤 결정적인 한 단계, 즉 사춘기와 같은 어떤 것을 표상 하는 것이 된다. 그 때까지 어른은 그 아들에게 있어선 신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존경의 표시 하에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태도가 그들의 관계를 위험하게 했던 것이다. 그들이 팔을 축 늘어뜨리고 나란히 걸으면서 흘리는 눈물은 낙원을 잃은 절망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아버지의 권위 실추를 뛰어넘어서 아버지 쪽으로 돌아온다. 그는 바야흐로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서, 그 치욕도 포함하여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가 아버지의 손 안으로 찔러넣는 손은 용서의 표시도, 어린애다운 위안의 표시도 아니고 아버지와 그 아들과의 관계를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엄숙한 동작, 즉 두 사람의 관계를 대등한 것으로 하는 동작인 것이다. . . . (386-387)

배우 관념의 소멸

(388-392쪽 까지 배우 관념의 소멸이 무슨 말인지 제대로 파악한 후에, 발췌 정리한다)

연출의 소멸

삶 그 자체처럼 외관상 자연스러운 완벽성이라고 하는 투명성 속으로의 배우관념의 소멸에 연출의 소멸이 따라온다. 데 시카의 영화는 준비기간이 매우 길었으며 거기에선 스튜디오 제작의 초대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세밀하게 예측되었다(그것은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서의 즉흥적인 제작방법을 허용하고 있다)고 우리는 듣고 있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른바 데쿠파주에서 극적 효과가 생겨나는 단 하나의 쇼트조차도 생각해낼 수가 없다. 거기선 데쿠파주가 채플린의 영화에서처럼 중성적인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를 분석해보면, 거기에는 <자전거 도둑>을 보통 영화와 눈에 띄게 구별지어주지를 않는 쇼트의 수와 카탈로그가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쇼트의 선택은 스타일에 의한 굴절률을 최소한으로 함으로써 사건을 최대로 투명화하는 것밖엔 지향하고 있지를 않다.이와 같은 객관성은 <파이자>에서의 로셀리니의 객관성과는 크게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같은 미학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객관성을 여기서 지드Gide와 특히 마르땡 뒤 가르 Martin du Gard가, 소설의 산문에 대해, 그것은 가장 중성적인 투명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 것과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배우의 소멸이 연기 스타일의 추월의 결과이듯이 연출의 소멸도 마찬가지로 이야기 스타일에서의 변증법적 진보의 산물이다. 만일 사건이 그것만으로 충분히 자립적이고, 연출가가 카메라의 각도나 그 결단에 의하여 그 사건을 분명하게 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예술로 하여금 결국에는 그것과 비슷한 자연의 참된 모습을 들추어내는 것을 가능케 하는 저 완전한 광도(光度)로까지 사건이 도달했기 때문이다《이 문장은 매우 모호하게 번역이 되어 있다. 원문과 비교해보자. 유추해 보면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사건이 연출가의 특정한 관점에 의해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고도 충분히 진실성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사건은 이미 스스로 강렬해 지면서 그 본질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바쟁은 계속해서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그는 자연이 이데올로기나 도덕적 관점에 종속되어 왜곡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영화는 문학과 다르게 이 강렬한 자연, 그 스스로 본질을 표현하는 자연을 고스란히 모방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인 듯 하다》. <자전거 도둑>이 우리에게 주는 인상이 확실히 진실된 인상임에 틀림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만일, 더할 나위 없는 자연스러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우연히 관찰된 이같은 사건에 대한 느낌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늘 존재하는 어떤 미학적 체계 전체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 자연스러움을 가능케 하는 것은 결국 시나리오에 앞서 존재하는 사고개념일 것이다. 배우의 소멸이라거나 연출의 소멸이라고 하는 사고개념일까? 《결국 바쟁이 배우의 소멸, 연출의 소멸을 주장하고 있는 이유는, 인위적인 것, 도덕적인 것, 마니교적 이분법,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소멸하고, 실재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의도에서 때문이 아닐까? 초인적 자연,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제거된 인간 . . . 》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자전거 도둑>의 원리엔, 우선 이야기의 소멸이라고 하는 사고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애매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의 이야기는 있지만 그 성질이 스크린 위에서 보통 볼 수 있는 이야기와는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 . . 극적인 영화는 그 숨어 있는 탄력을 연극에서 빌어오고 있다. 그런 종류의 영화에서의 줄거리는, 스크린에 맞게 아무리 특수하게 고안되어 있더라도, 역시 여전히 고전적인 연극의 줄거리와 본질적으로 같은 한 행위의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뜻에서는 영화는 무대상의 표현과 같이 하나의 구경거리이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영화는 그 리얼리즘과, 그리고 그것이 인간과 자연에 허용하는 평등성에 의해서 미학적으로는 소설을 닮고 있다.
. . . 소설에서의 이야기나 그것과 비슷한 것은 행위에 대한 사건의 우위성, 인과 관계에 대한 사건계기의 우위성, 의지에 대한 지성의 우위성에 의해 연극과 서로 대립되는 것이라고만 말해두겠다. 연극에서의 접속어를 고른다면 ‘따라서(또는 그러므로)’이고, 소설에서의 그것은 ‘그 때(또는 그런데)’라고 할 수 있다《연극은 인과관계나 사건의 필연적 연쇄에 의해 진행되는 방식이라면, 소설은 여러 계열들의 우연적인 사건이나 만남들 속에서 진행된다. 소설에서의 접속어를 ‘한편 . . . 은’ 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베네딕트 앤더슨이 소설이 여러 이질적인 것들을 서로 통합하고 연결지음으로써 단일한 전체 혹은 상상된 공동체를 만드는 매체라고 말한 것과 일치할 것이다. 이것은 연극과 소설의 각각의 형식상의 제약의 결과이기도 하다. 연극의 경우, 무대의 물리적 제약 때문에 소설과 같은 다양한 공간과 시간성을 사용할 수 없다.》 . . . 프루스트는 마들렌느 과자 속에 우리를 사라지게 할 수 있지만 극작가는 그의 대화마다 우리의 흥미를 그 다음 대화의 방향으로 연결짓지를 못한다면 그의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게 되고 만다. 바로 이런 까닭에 소설은 입을 닫았다가 다시 열 수가 있는 반면에 희곡은 분할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구경거리의 시간적 단일성은 구경거리 본질의 일부를 이룬다. 영화가 구경거리의 신체적 조건들을 실현시키는 것인 한 그것은 구경거리의 심리적 법칙을 피할 수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영화는 또 소설이 가진 모든 수단을 자유로이 이용할 수가 있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아마도 타고난 잡종인 모양이다. 즉 그것은 하나의 모순을 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의 진로가 그 잠재적인 소설적 성질을 심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은 분명하다《이미 다 제시된 것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바쟁은 영화와 소설의 유사성, 혹은 그 친화적 관계에 대해 말하고는 있지만, 이를 극적인 것 혹은 줄거리에 의존하는 것 혹은 서사적인 것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의 이질성(바흐친이 말하는 잡종성 hybridity . . 와 같은)과 영화의 이질성을 유사하게 보는 것이다》.
. . . 스크린에서 흥행적이고 연극인 요구를 무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욱이 알아야 할 것은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현대 이탈리아 영화는 흥행성의 절대적 필요성을 결연히 내던지는 용기를 지닌, 세계에서 유일한 영화라는 점을 확인하자. <대지는 흔들리다>와 <늪 위의 하늘>은 행위(줄거리)가 없는 영화인데도 그 (어느 정도 서사적인 소설 맛이 나는) 전개는 극적 긴장에 한치도 양보하고 있지 않다. 거기서의 사건은 그것이 나타나야 할 적시에 차례차례 나타나지만 그것들 하나하나가 거기에서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 설사 그것들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다만 뒤에 가서 회고할 때 그럴 뿐이다. . . .
. . . <자전거 도둑>은 하나의 비극으로서 견고하게 조립되어 있다. 극도의 극적인 힘을 지니고 있지 않은 영상은 하나도 없지만, 그러면서도 우리가 그 극적인 결과와는 관계없이 흥미를 가질 수가 없는 영상 또한 하나도 없다(?). 이 영화는 비, 신학생, 카톨릭 퀘이커 교도들, 레스토랑 . . . 등, 순전히 우연적인 것의 평면상에서 전개된다. 이 모든 사건들은 서로들 교환 가능한 듯이 보이며 어떠한 의지도 극적인 스펙트럼에 따라 그것들을 구성하고 있듯이 보이지를 않는다. 도둑 거리의 장면은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우리는 이미 노동자에 의해 쫓기고 있는 인물이 정말로 자전거를 훔친 사람일까 하는 것조차도 확신을 가질 수가 없고, 그 사람의 간질 발작이 꾀병이었는가 진짜였는가 하는 것도 우리로서는 절대로 모를 것이다. 줄거리로서는 이 에피소드는 무의미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에피소드는 만일 그 소설적인 흥미, 그 소설로서의 가치가 그것에 덤으로 어떤 극적 의미를 되살려놓지를 않았다고 하면 관객을 어디로도 이끌어가지를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이상으로 또는 병행하여, 줄거리는 하나의 긴장으로서보다도 오히려 사건의 요청에 의해 구성된다. 만일 원한다면 이를 구경거리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얼마나 대단한 구경거리인가! 그렇다고 해서 이 <자전거 도둑>은 드라마의 기초 수학에 뭐 한 가지도 의존하고 있지를 않다. 줄거리가 거기서는 하나의 본질로서 선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사전에 존재하는 이야기로부터 생겨난다. 그것은 현실의 적분(積分)인 것이다. 데 시카의 이 더할 나위 없는 성공은 사건과 흥행적 줄거리 간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영화적 변증법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고 하는 점에 있다. 그런 점에서 <자전거 도둑>은 순수영화cinema pur의 최초의 실례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더 이상 배우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또 연출도 존재하지 않는, 요컨대 현실의 완전한 미적 환영 속에 있는, 말하자면 더 이상 영화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영화인 것이다.(392-396)

로셀리니와 데 시카의 스타일의 차이

(398-399) 표시된 부분 발췌. 그 전과 후반부의 다른 부분도 필요하면 발췌할 것.

데 시카의 리얼리즘(네오-리얼리즘)의 특징

데 시카의 리얼리즘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시정(詩情)에 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에 있어서 모든 리얼리즘의 근저에 해결되어야 할 미학적 패러독스가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충실한 재현은 예술이 아니다. 예술은 선택이요 해석이라는 말을 우리는 거듭 들어오고 있다.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 영화에서의 사실주의적경향들은 다른 예술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오직 작품 속에 현실 이상의 것을 도입함으로써 성립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현실의 보충은 여전히 전혀 추상적인 어떤 의도, 즉 극적이거나 도덕적인 또는 이데올로기적인 의도에 봉사하기 위한―다소 유용한―한 수단임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자연주의는 바로 테마 소설과 테마 극의 증가와 일치하고 있다. 선행하는 주요 리얼리즘 그룹과 소비에트파에 비교해볼 때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독창성 그것은 애초부터 현실을 몇 몇 관점에 종속시키는 것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카메라)=눈(Kino-glass)의 이론조차도 생생히 살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사용한 것은 단지 그것을 몽따쥬의 변증법적 스펙트럼 위에다 배열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다른 관점에서 볼 때 연극은 사실적인 그것조차도 현실을 극적이고도 흥행적인 구조의 기능에 따라 저리한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인 테제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건, 도덕적인 관념이나 극적인 줄거리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건, 리얼리즘은 그 현실로부터의 차용물을 초월적인 요구들에 종속시키고 있다. 그러나 네오리얼리즘은 내재성밖엔 모른다《즉, 정신적 표현이 아닌 실재 그 자체의 운동성, 내재적 운동성을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인간 존재와 세계가 내포하는 교훈을 경험적으로 이끌어내는 법을 아는 것은 오직 그것들의 외관적 측면, 순수한 현상만으로부터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현상학이다.(401-402)

네오-리얼리즘에서 연기(演技)와 연출의 특징

. . . 네오리얼리즘은 연기에 관련해서는 구경거리라는 전통적 범주에는 반한다. 연극에서 유래하는 고전적인 연기관에서는, 배우는 뭔가 하나의 감정이라든가 정념, 욕망이라든가 관념을 표현한다. 그의 태도와 무언의 몸짓, 표정에 대해 관객들은 펼쳐진 책을 읽듯이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있게 된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똑같은 심리적 원인은 똑같은 육쳊거 결과를 낳는다고 하는 묵계와 그리고 서로에게 명확히 가닿을 수가 있다는 묵계가 관객과 배우 사이에서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연기=유희(play)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고전적인 연극에서 유래된 전통적 연기관에서 파생된 연출의 경우]. . . 배경과 조명, 촬영시의 카메라 앵글 및 화면구성 등은 배우의 행동 모습에 따라 더 표현주의적으로도 되고 덜 표현주의적으로도 될 것이다. 그것들은 그것들대로 줄거리의 의미를 확정하는데 공헌한다. 요컨대 각 쇼트들로의 장면의 분해와 각 쇼트들의 몽타주는 시간상의 표현주의와, 즉 극적 지속이라고 하는 인위적이고 추상적인 지속에 따른 사건의 재구성과 동일한 것이다. 영화적인 구경거리의 이와 같은 일반적인 여건들 가운데서 네오리얼리즘이 문제로 삼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우선 연기에 대해 보자. 네오리얼리즘은 연기자에게 표현하기 이전에 존재할 것을 요구한다. 이 요구는 반드시 직업배우의 겁를 뜻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요구가 직업배우 대신에 거리에서 발견한 인물―적극적으로 필요한 한 조건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연기의 표현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는 하나의 보증이나 다름 없는, 그 평상적인 행동과 그 연극적 기술에 대한 무지 때문에 유독 선택된―을 쓰게 하는 방향으로 보통 기울고 있음은 사실이다. 데 시카에게 부루노(<자전거 도둑>에서 아들)는 하나의 실루엣, 하나의 표정, 하나의 걸음걸이였던 것이다.
그 다음, 배경과 촬영방식을 보자. 자연적 배경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배경과의 관계는 아마추어 배우와 직업배우와의 관계와 같다. 또 한편으로는 자연 그대로의 배경은, 스튜디오가 가능하게 하는 인공조명에 의한 조형적 구성의 가능성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말살해버린다고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으로 뒤집히는 것은 아마 무엇보다도 이야기의 구조일 것이다. 이야기 구조는 사건의 실제 지속시간을 존중해야만 한다. 이야기의 논리가 요구하는 삭제도 기껏해야 묘사적인 부분에 한정될 수 있을 뿐이다. 또 데쿠파주는 존재하고 있는 현실에, 절대로 무언가를 덧붙여서도 안 된다. 그 데쿠파주가 로셀리니에서처럼 영화의 의미에 참여하는 것은, 사건의 결여 부분, 공백 부분, 우리에게 불명인 채로 남아 있는 붑누이 그 자체로 구체적인 자연에 속할 때―즉 돌들처럼―이다.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남의 신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를 못하다. 고전적인 몽타주에서의 생략은 스타일의 한 효과이다. 로셀리니에게 있어서 생략은 현실의 한 공백, 혹은 차라리 우리가 현실에 대해서 갖는 인식의 공백이어서 본질상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이 문단에서 바쟁은 베르그송이 말한 지각의 양적 수축과 기억의 질적 변형을 대조하여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통적인 몽따쥬가 자연을 질적으로 변형시켜 연출가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매개라면, 네오리얼리즘에서의 몽따쥬는 자연의 질적 변형이 아니라 양적 수축에 불과하다. 따라서 생략이 있다면 그것은 양적으로 빠진 부분에 불과한 것이지, 스타일을 만들어내기 위한 변형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네오리얼리즘은 하나의 미학적 입장이기 이전에 하나의 존재론적인 입장이다. 하나의 처방전과 같이 그 기술적인 속성을 적용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네오리얼리즘을 낳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미국 네오리얼리즘(역주. 바쟁은 아마도 W.D. Howells, Dreiser, Hemingway, Faulkner, Dos passos등의 작가들의 작품이 지닌 리얼리즘을 언급하고 있는 듯 하다. . .)의 급속한 쇠퇴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탈리아 자체에 있어서조차도 신문 사회면 기사에서 착상을 얻어 야외촬영을 한, 배우 없는 모든 영화가 전통적인 흥행물적인 멜로드라마보다 반드시 훌륭하다고 평가되는건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미겔란젤로 아토니오니 Michelangelo Antonioni의 <어느 사랑의 기록 Cronaca 야 un Amore>과 같은 영화가 네오리얼리즘이라고 호칭되어지고 있는데, 그 까닭은 직업배우의 사용, 줄거리의 탐정소설식 방자성, 수많은 호화스런 무대장치, 여주인공의 바로크식 의상 따위에도 불구하고 이 감독이 등장인물들의 외면적인 표현주의에는 전혀 의존하지를 않고 그의 모든 효과를 그들의 존재방식, 울고 웃고 길을 걸어가는 법 따위에다가 쌓아올렸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은 마치 미로를 빠져나가야 할 실험실의 생쥐들 모양, 줄거리의 미궁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402-404)

데 시카 연출의 투명성 혹은 순수함

. . . 그의 스타일의 형식적인 특성들을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네오리얼리즘의 가장 순수한 표현을 대표하고 있거나, 또 <자전거 도둑>이 다른 거장들의 작품이 . . 주위를 맴도는 이상적인 구심점이라고 하는 사실에서 온 것은 아닐까? 그를 정의하기 어렵게 하는 것은 그와 같은 순수성 자체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순수성은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구경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구경거리 속에 현실을 확립시킨다고 하는 역설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한 남자가 길을 곧고 관객은 그 걷는 남자의 멋에 놀란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 . . 한 사람의 삶을 90분에 걸쳐 몽타주 없이 영화화한다는 자바티니의 꿈이 실현될 때까지, <자전거 도둑>은 논의의 여지없이 네오리얼리즘의 극단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연출이 분명 연출 그 자체를 부정함을 지향한다거나 그것이 드러내는 현실에 완전히 투명함을 지향한다고 해서 거기에는 연출이 존재치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은 고지식한 짓이 될 것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이보다 더 면밀히 계획되고 더 숙고되고 또 더 꼼꼼하게 만들어진 영화는 거의 없다. 그러나 데 시카의 이 모든 노력은, 거기서 우연의 환상을 부여하고 극적인 필연성에 우연성의 성격을 갖게 하고 마는 경향이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는 우연성을 드라마의 재료로 삼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역주. 여기서 극적 우연성은 고전 비극의 비가역적인 숙명성과 구별되고 있는 개념이다. 고전 비극에는 우연적이라고 할 것에 대립되는 것으로 필연성이 담겨있다). <자전거 도둑>에서는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은 한 가지도 일어나지를 않는다. . . . 이 영화가 비극의 엄격성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한 가지도 우연말고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은, 이 영화의 놀랄만한 미학적 패러독스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그 독창성을 끌어내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예술적인 질서와 현실의 무정형한 질서라고 하는 상반된 두 가지의 변증법적 종합에서인 것이다.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은 영상, 정신 속에 잊혀질 수 없는 도덕적 진실의 예리한 침을 꽂지 않는 영상은 하나도 없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현실의 존재론적 애매성을 등을 지고 있는 영상 또한 하나도 없다. 어떠한 몸짓도, 어떠한 사건도, 어떠한 사물도 그 영화에선 연출가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애초부터 결정되어져 있는 것은 한 가지도 없다. 만일 그것들이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사회적 비극의 스펙트럼 위에 정돈된다고 하면 그것은 자석의 스펙트럼 위에 줄질한 쇠가루와 같이 정돈되는 식이다. . . . 그러나 필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 것도 우연성을 상실하지 않는 그러한 예술의 효과는 사실 배나 설득력이 있고 배나 논증성이 있다. 왜냐하면 요컨대 소설가나 극작가 또는 영화작가가 우리에게 이러저러한 관념을 발견케 하는 것은 별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그런 관념을 거기에 미리 도입해놓았고 또 그것을 자기들 재료에 배어들게 해놓았기 때문이다. 물 속에 소금을 풀어놓고 그 물을 불에 올려놓아 천천히 증발시키면 거기서 다시 소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물이 샘에서 직접 길어온 것이라고 한다면, 그 때에는 그 물의 성질이 원래 짠 것이 된다.《역시 여기서도 바쟁은 자연의 순수한 상태, 그 자체로 내재적인 자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초월적 정신에 의해 왜곡되면 안되는 것》 노동자 안토니오는 . . . 계속 . . . . . . .

<움베르토 D>에서 가장 중요한 시퀀스의 의미

[. . .] 데 시카가 <밀라노의 기적>에서 시적 리얼리즘으로 탈선했다가 다시 네오리얼리즘으로 돌아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전거 도둑>의 완벽성에서 사람들이 하나의 절정으로 간주했을 때, 실은 그것이 하나의 시작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라는 말을 덧붙인다고 하는 조건에서이다. <자전거 도둑>의 리얼리즘 속에는 아직도 고전적인 극작술에의 양보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움베르토 D>가 필요했다. 따라서 <움베르토 D>에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전통적인 영화적 구경거리와의 일체의 관계를 끊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의 테마밖엔 기억하는 게 없다면 그것을 사회적인 주장을 지닌 민중주의적인 멜로드라마, 중산계급의 생활조건에 대한 구두변론일 뿐이지 않은가 하는 말로 요약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빈곤에 쪼들린 한 퇴직자가 자신의 개를 맡아줄 사람 하나 찾지도 못하고 자신과 함께 개를 죽일 용기도 없기 때문에 자살을 단념했다고 하는 이야기로 말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에피소드는 사건들의 극적인 연쇄의 비통한 결론인 것이 아니다. 설사 구성이라는 고전적인 관념이 여기서도 아직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데 시카에 의해 보고되는 사건들의 연속은, 그러나 극적인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하나의 필연성에 따르고 있을 뿐인 것이다. 움베르토 D가 병원에 치료받기 위해 가는 가벼운 인후염과 그가 하숙 여주인에 의해 노상으로 쫓겨나는 것과, 그리고 또 그가 자살을 생각하게 되는 것과의 사이에, 도시 어떠한 인과관계를 수립할 수가 있다는 것인가?
인후염에 걸리건 아니건 간에 q아을 비워달라는 건 통보되어 있었다. 이것은 극적인 작가라고 할 경우엔 이 두 사건 간에 논리적이고도 비통한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이 인후염을 중병으로 처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반대로 병원에서의 체재는 실제로 움베르토 D의 건강 때문에 객관적으로 정당화되지도 않고 또 그의 운명에 대한 우리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데 도움이 되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유쾌한 에피소드로 되어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문제가 없다. 움베르토 D를 절망하게 하는 것은 물질적인 빈곤이 아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움베르토 D를 절망케 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그 빈곤이 그에게 자신의 고독을 분명히 알게 해주는 한에서인 것이다. 움베르토 D가 필요로 하는 아주 적은 서비스만으로도 그를 그 대인교섭의 결핍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데 충분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중산계급의 것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가 증언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숨어 있는 비참함에 대해서인 동시에 그들의 에고이즘과 그들의 연대의식의 결여에 대해서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한 걸음 한 걸음씩 고독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즉 그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 그에게 어떤 실질적인 애정을 품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하숙집 여주인의 젊은 하녀지만, 그녀의 다정함과 선의도, 이 장래의 미혼모로서의 그녀 자신의 근심걱정을 능가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 유일한 우정을 통해서도, 거기선 역시 절말의 한 동기밖엔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 . . 만일 이 이야기로부터 얼마간의 거리를 취하여 거기에서 아직 하나의 극적인 지리학, 등장인물들의 전체적인 이동, 사건들의 어떤 단일한 수렴등을 볼 수 있다고 하면 그건 뒤에 가서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이야기의 단위는, 에피소드나 사건, 연극의 절정이나 주역들의 성격 등이 아니다. 그것은 그 어느 순간도 다른 순간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는 삶의 구체적인 순간 순간의 연속인 것이다. 그들 각 순간의 존재론적 평등성이, 그 원리 자체에 따라 각적인 범주를 파괴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정점의 하나로 남을 놀랄 만한 한 시퀀스가, 이야기에 대한 이와 같은 접근, 그래서 또 그 연출에 대한 이같은 접근을 완벽하게 예시해주고 있다. 그 시퀀스란 젊은 하녀가 아침에 일어나는 장면을 말한다. 거기서 카메라는 아직 졸린 눈을 비비면서 부엌 안을 서성거리며 개수통에 들어가 있는 개미를 빠져죽게 하고 커피를 끓이고 . . . 하는 것 같은 세세한 아침 일을 하고 있는 그녀를 오로지 물끄러미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영화가 생략법에 기여하고 있다고 믿고 너무나도 간단히 만족해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그 영화가 그와 같은 생략법과는 정반대의 것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생략은 논리적인, 그 때문에 추상적인 이야기의 한 과정이며 그것은 분석과 선택을 전제로 하고 사건들을 그것들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극적인 뜻에 따라서 구성한다. 데 시카와 자바티니는 이와는 반대로, 사건을 더욱 작은 사건으로, 그것들을 더욱 더 작은 사건으로, 지속성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의 극한으로까지 분할하고자 한다. 이런 까닭에 고전적인 영화에서는 단위로서의 사건은 ‘하녀의 기상’이라는 것으로 되어, 두세 개의 짧은 쇼트로 그것을 나타내기에 충분했을 것이나, 이 같은 이야기 단위 대신에 데 시카는 일련의 보다 더 작은 사건들을 가지고 표현하고 있다. 즉 기상, 복도의 횡단, 개미들의 홍수 등등과 같이. 그러나 이것들 가운데 하나를 더욱 자세히 관찰해보자. 그럴 때, 커피를 끓인다고 하는 일도, 이번엔 그것이 예컨대 삐죽나온 발끝으로 문을 닫는다고 하는 것 같은, 일련의 따로 떨어진 순간들로 분할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는 접근하면서 다리의 움직임을 뒤쫓아가고, 이렇게 마지막으로 영상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나무문을 찾아다니는 발가락의 움직임이다.
나는 이al 이 책에서 자바티니의 꿈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를 않는 한 남자의 90분 동안의 생활에서 한 가닥의 끊어진 사이도 없는 영화를 만드는 것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에게 있어서는 그것이야말로 네오리얼리즘 그 자체의 것이다. <움베르토 D>의 두세 시퀀스는 가능성으로서 존재하는 영화를 예견케하는 이상의 것을 이룩하고 있다. 그것들은 이미 그와 같은 영화의 실현된 단편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이 지니는 의미와 범위에 대해 이제 착각을 하지 않도록 하자. 데 시카와 자바티니에 있어서는, 영화를 현실에의 점근선(漸近線)이 되도록 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구경거리로 탈바꿈하는 삶 그 자체가 되어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삶이 이 순수한 거울 속에서 요컨대 시(詩)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삶이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것이든, 결국 영화는 이 삶을 바꾸어버리는 것이다.(424-428)

André Bazin의 『영화란 무엇인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