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

아름다움

마술사의 눈속임에 당하지 않으려면, 두 눈을 크게 뜨고 그가 보여주는 보자기와 손동작을 뚫어지게 관찰해야 한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볼수록 마술사는 더 수월하게 우리를 속일 공산이 크다. 자세히 보려면 특정 부분에 집중을 해야하고, 집중하다보면 지각은 완고해지고 편협해지며, 마술이란 바로 고집스러운 지각을 이용한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한쪽 손에 든 모자를 유심히 보는 동안 비둘기는 다른 쪽 손으로 옮겨진다. 편향된 집중력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각에 불균형을 초래한다. 마술은 우리의 편협한 집중행위가 바로 우리 자신을 배신하고 뒤통수를 치게 한다. 지각의 편협이 더하면 더 할수록, 자연적 질서에 대한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뒤통수의 충격은 더 심해지고, 마술의 신비는 더 깊어진다.

외양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도 이 마술과 유사한 속임수가 있다. 화장이나 장식은 시선의 집중과 분산의 테크닉이다. 얼굴과 몸의 진상(그게 뭐지?)을 장식과 치장에 분배해서 그 장본인이 짊어져야 할 자연적 부담을 그 도구들이 떠맡도록 하는 것이다. 목이 짧은 사람은 가슴이 패인 셔츠를 입는다든가, 엉덩이가 크고 처진 사람은 뒷주머니가 큰 바지를 입는다든가, 허리가 굵은 사람은 벨트를 늘어뜨린다든가,… 립스틱, 아이섀도, 헤어스타일, 귀걸이, 자극적인 색채들,… 동원된 모든 테크닉들은 일군의 군대처럼 장본인에게 집중되었던 어떤 주의력을 해제시키기 위해 일사분란하게 사열된다.

장식과 화장의 메시지는 집중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자신의 모습이 집중해야 할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막연한 하나의 전체로 보이길 원하는 것이다: “다리만 보지 말고, 얼굴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아주세요!”

우리는 사물을 막연한 전체로 보아야만 그것을 견딜 수가 있다. 질척거리고 끈적이는 수분과 갖가지 벌레들 그리고 기생충이 뚫어놓은 구멍들로 꽉 들어찬 섬유질 덩어리가 아니라 그냥 막연한 하나의 나무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듯이, 혹은 음식물 찌꺼기와 박테리아로 가득한 잇몸이나 치아나 구강이 아니라 그냥 아름다운 연인의 입술에 입을 맞추듯이 말이다. 화장이나 장식은 오히려 사람들간의 거리를 반영한다. 귀걸이나 립스틱을 통해 사람들은 산만해지며 막연해진다. 구체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목 주변에 둘러쳐진 저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우리에게 저만치 떨어지라는 메시지처럼 보인다) 외관의 아름다움이란 산만함, 태만, 무성의에 근거한다. “아름다움”(beauty) 자체가 일종의 태만이다. 아름다운 것이란 조화로운 것, 보기 좋은 것, 균형감이 있는 것, 따라서 힘이 덜 들어가는 것, 즉 쾌적한 상태를 유발시키는 것이다. 아름다움이 주는 쾌적함은 우리의 능력들(감성, 지각, 이성, 감정 등)이 조화롭고 유기적인 협력을 위해 힘의 안배를 사이좋게 했을 때 생기는 감정이다. 일그러지고 비뚤어진 것을 파악하기 위한 힘겨운 노력의 고통이 약화된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불규칙하고, 일그러져 있고, 균형이 깨져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든지 두 눈의 모양이 다르다. 몸의 왼쪽과 오른쪽 역시 균형이 깨져있다. 사물들은 대칭적이지 않으며, 어딘가 일그러져 있다. 그럭저럭 균형을 맞추어가며 힘겹게 버티고 살아갈 뿐이다(아마도 형식과 외양에 있어 관념의 구현체이자 ‘추상’ 그 자체일 것 같은 자본주의의 ‘상품’은 제외하고). 르느아르(Pierre-Auguste Renoir)가 자신의 회화의 원리로 삼은 것이 바로 이 “일그러짐(irregularity)”이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얼굴 모습이나 눈동자는 초점이 뚜렷하지 않아, 마치 움직이면서 셔터를 누른 사진처럼, 어딘가가 비뚤어져 있거나 일그러져 있다. 사진의 발명과 아울러 탄생한 인상파 이후의 현대 미술이 봉착했던 문제는 다름 아닌 이 일그러진 세계와의 불화였다. 지식과 감각적 경험의 이 괴리는 ‘참된 진리’나 ‘변하지 않는 중심’이라는 관념을 붕괴시켰다. 이에 따르면 ‘세 변의 길이가 같은 폐쇄된 존재’라든가 ‘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의 자취’와 같은 존재는 패러노이드가 구성한 윤곽선의 환상일 뿐이다. 미셸 세르(Michel Serre)는 서구의 17세기는 “중심”과 “좌표”가 지배하는 “점”의 시대였으며, 이것이 18세기를 지나 19세기에 이르면 “면”의 시대가 된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세계의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중심의 확산, 분포, 증식으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에 더 나아가 들뢰즈는 중심의 시대인 17세기조차 이미 바로크 시대의 일그러짐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바로크 시대는 ” 무엇이 중심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중심은 존재하는가?”의 문제였다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어쨌든 현대인들은 모든 것이 매순간 변하고, 정지해 있거나, 고정된 것은 없으며, 고르게 분포된 균형이나 조화나 대칭은 불가능해진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일그러진 사물을 지각하고 파악하려면 힘겨운 노력이 필요하다. 달리는 사자를 쏘아 잡기 어렵고, 곡선을 자로 재는 일이 쉽지 않듯이, 돌출되어 있거나, 비뚤어져 있거나, 움직이거나, 사선이 그어진 사물들을 파악하려면, 매번 다른 방식의 척도, 체계, 규칙, 방법, 집중력이 필요하다. 사냥을 쉽게 하려면 실제의 사자를 가상의 점으로 찍어 좌표와 궤도를 설정해야 한다. 땀을 흘리고, 헐떡거리며, 근육 운동을 해대며, 매순간 변덕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일그러진 동물을 가상의 매끈한 그림으로 바꾸지 않으면, 오히려 나 자신이 사자에게 짜증을 부리며 헐떡거리게 될 것이다. 모든 실상을 아름답고 쾌적하고 조화롭게 만들려면, 쳐진 엉덩이와, 주근깨투성이의 얼굴과, 땀구멍이 깊이 패인 주름들로 가득찬 일그러진 세부들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타인이 그 약점들에 집중하지 않도록, 화장품과 향수를 짙게 뿌려 태만을 유도해야 한다. 조화와 균형의 아름다움이라는 쾌적한 감정 속에서, 모든 돌출부는 집어넣어져야 하고, 푹 꺼진 부분은 마름질로 고르게 펴져야 하고, 삐딱한 사선들은 정직선으로 바로잡혀야 한다. 어떤 부분에도 특이한 시선이 던져지지 않도록, 힘을 분산시키고, 연쇄고리들을 만들고, 부분들을 서로 종속하는 연대로 편성해서, 두루뭉실하고 막연한 감정을 유발해야 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적당한 외면이며, 냉소이며, 무성의이며, 무엇보다도 종속이다. 그것은 실상의 적나라함에 대한 두려움으로, 실눈을 뜨고 바라본 광경이며, 눈을 감고 외치는 열광이다.

불규칙하고 일그러진 사물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강요된 노력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불쾌하고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경험한다. 이 불쾌와 고통에 대한 거부가 그 사물을 추하게 보이게 한다. 쾌적함에 대한 환상이 커질수록 불쾌한 것은 많아지고, 시간과 노력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실상의 이미지에 대한 적대감은 커지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증식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이 커질수록 삶은 견딜 수 없다. 균형 잡힌 신체, 안정된 삶, 질서가 잘 잡힌 사회, 조화로운 관계, 우리를 쾌적하게 해줄 것 같은 막연한 이상이 지나칠수록 화장의 마술은 더 매혹적이 될 것이다. 문제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속임수와 환상에 대한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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