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의 ‘존재’의 의미

에리히 프롬의 ‘존재’의 의미

마르크스(Karl Marx)와 정신분석을 연구했던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자신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에서 두 가지 삶의 양식을 우리에게 소개하였다. 잘 알려진 ‘소유'(Having)를 근간으로 하는 삶과 ‘존재'(Being)를 근간으로 하는 삶이 그것이다. 그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이 책의 주요 테마라고 할 수 있는데, 책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것은 햄릿의 딜레마를 현대적으로 변용한 것처럼 보인다. 결국 프롬이 떠올린 양자택일이란 ‘죽음과 삶’의 문제로 요약할 수가 있는 것이다.

Erich-Fromm

‘소유’를 근간으로 하는 삶은 비교적 이해하기가 쉽다. 재산이나 물건을 소유하거나, 명예나 권력과 같은 상징적 기호를 소유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삶 전체를 그 소유물에 기대고 의존한다. 예컨대 인간은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있을 장소를 가져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지식과 언어 역시 하나의 소유활동이다. 어떤 대상을 인식하고 그것에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것은 상징적으로 내 손 안에 들어온 셈이다. 다시 그것을 호출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롬에 따르면 소유는 경험을 사물화(死物化)하여 삶 전체를 죽은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가령 꽃을 소유하는 것은 생명(활동, 활력)을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무엇인가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의 존재를 규정하고 한정하는 것이다. 소유는 쉽게 잡고 쉽게 파악하고 쉽게 다루기 위해, 즉 내 선반 위에 차분히 올려놓기 위해 변화무쌍하고 변덕스러운 생명을 말 잘 듣는 죽은 사물로 박제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삶은 그 자체가 거대한 소유의 과정이다. 한편 모든 대상을 죽은 것으로 취급한 결과 인간은 세상과 낯설어진다.

문제는 삶의 또 다른 양식인 ‘존재’이다. 프롬이 말하는 존재 즉 Being은, 서양 철학사에서 항상 제기되어 왔던 질문인데도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는 ‘존재’를 단순히 ‘있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윤리적인 뉘앙스를 가미하여 ‘진정한 존재’, ‘참된 존재’, ‘충만한 존재’가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다양한 관점에서 설명하던 프롬은 흥미롭게도 언어학자 방브니스트(Emile Benveniste)의 분류법에 따라 존재를 나타내는 be 동사를 세 가지로 나누어 ‘존재’의 의미를 설명한다.

첫 번째, 속성을 나타내는 동사로서의 be가 있다. 가령, “I am tall”, “He is white”, “She is poor”와 같이, be 동사는 주어가 지니고 있거나 나타내고 있는 성질, 형태, 위치 등을 주어에 연결해 준다. 주어의 속성은 우연히 획득된 것도 있고(색, 모양, 위치), 사회적으로 부여 받은 것도 있다(계급, 직업, 자격). 또한 생물학적 속성인 경우도 있다(성별, 개체성). 이러한 다양한 속성들이 특정한 주어(존재)에 속해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즉 그 존재의 “외적인 정체성”(exterior identity)을 표상하기 위해 접합사(copula)인 be가 필요한 것이다.

두 번째, 외적인 영향에 압도된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로서의 be가 있다. 이는 주로 수동태(passive mode)의 형식으로 말해진다. 가령, “I am beaten”, “He is nominated”와 같이, 다른 누군가가 행위를 가하거나 외부 조건의 영향을 겪을 때, 즉 환경의 지배를 받는 존재의 수동적인 양태를 표현하기 위해 상태동사 be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흔히 수동형을 쓸 때에는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행위를 가하는 능동자를 나타내기 위해 동사 다음에 전치사 by를 쓴다(I am beaten by him, He is nominated by the Democrats).

이렇게 속성을 나타내는 be동사와 수동적 상태를 나타내는 be동사는 모두가 존재를 상대적 질서로 표현한다. 키가 크거나(he is tall), 색이 하얗거나(he is white), 가난하거나(he is poor), 이러한 속성들은 상대적이다. 왜냐하면 색이란 태양 빛이나 조명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정체성을 대표하는 이름 또한 표기되는 언어가 무엇인가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르며, 키, 크기, 무게, 양 등의 양태 역시 상대적 비교에 따라 규정되기 때문이다. 물리학의 상대성 이론에서 흔히 드는 좋은 예가 있다. 바로 앞에 서 있는 삐에르는 커 보이지만 50미터 밖에서는 아주 작아 보인다. 또 달리는 폴의 관점에서 보면 달리는 것은 바로 저 편에 서 있는 삐에르이다. 이런 점에서 폴과 삐에르의 상태는 그들 고유의 정체성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과 맺는 관계가 상대적으로 부여한 하나의 곡두이다. 환경의 지배에 억매인 수동적 상태는 물론이거니와 존재의 내적인 성질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속성동사는 외적인 영향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Be동사의 의미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는 외부환경에 영향을 받는 존재로서 현상적이고 감각적이며 우연적이다. 그것은 크고도 작으며, 아름답지만 추하고, 위대하다가도 초라하다. 정체성이란 관계를 통해 획득된 상대적 외양(phenomenon, appearance)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프롬은 여기에 be 동사의 세 번째 의미를 추가한다. 사실 이것이 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존재'(Being)의 의미이다. 즉 존재를 속성과 연결 짓는 접합사나 환경의 지배를 나타내는 수동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현시하는 것으로서 직접 드러난 be 동사이다. 이는 존재를 외적으로 혹은 상대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삶과 활동의 총체로서 그 자체 함축한다. 가령, “I am”, “I am who I am”, “He is”, “They are”와 같은 표현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I am tall”, “He is wrong”, “They are given”에서 단순히 속성을 나타내는 말(tall, wrong, given)만을 뺀 것처럼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 속성들이 결정되기 이전의 근원적인 존재(혹은 시간)를 나타내기 위해 쓰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삐에르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그는 멀리에 있을 때는 작아 보이고 가까이에 있으면 커 보인다. 소인국과 대인국에서 각각 존재의 위상이 전혀 달랐던 걸리버처럼, 삐에르 역시 주어진 외적 조건에 따라 하나가 아닌 다수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에게 삐에르 혹은 걸리버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오히려 난센스처럼 보일 정도이다. 미국과 프랑스 등지의 많은 언어학자들 중에는 이들이 전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가령, ‘삐에르’와 ‘Pierre’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식이다). 이 물리적 상대성의 질서에 눈을 뜬 현대인들은 자신의 정체성 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 파편적이고 분열적인 그 무엇으로 경험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진정한(real, true, authentic) 존재는 없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서구의 문학 특히 모더니즘으로 알려진 부류의 작가들에게 두드러졌다. 그들은 우주 전체가 파편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존재인 신과 같은 하나의 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하나의 정교한 질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상과 감각의 단편들이 부서지지 않기 위해 그럭저럭 희미한 힘을 기대고 부대끼며 지속할 뿐이라고 말이다. 예컨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한 명의 개인조차도 수많은 영혼이 득실거리며 생긴 통계상의 효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소설의 주인공 마르셀은 사랑하는 애인인 알베르틴에게 키스를 하려고 다가간다. 그러자 처음에는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아름다운 윤곽선을 취했던 그녀의 얼굴이 점점 부서지고 형태에 파선이 생기고 땀구멍이 커져서, 마치 솜털이 난 괴물이 눈 앞에 현시한 것 같다. 혼란은 이런 식으로 일어난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누구인가? 저만치에서 바라만 보았던 그 아름다운 그녀인가? 아니면 이렇게 갖고 싶어 가까이 다가와 어쩔 수 없이 목격하게 된 괴물인가? 이렇게 사물간의 거리에 따라 영혼이 달라지는 것 뿐만 아니라, 마치 요지경처럼 공간 전체가 자리를 바꾸어가며 매 순간 달라져가는 풍경이다. 주인공은 어느 날 마차를 타고 가는데, 구불구불 나 있는 길의 굴곡에 따라, 그리고 마차의 흔들림에 따라, 자리를 이리저리 바꾸어가며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종탑과 들판의 풍경 전체가 달라져가는 것을 보고는 묘한 행복감을 느낀다.

영화가 등장한 초창기에 관객들은 이와 유사한 지각상의 오류를 범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한 인물이 문밖에 서 있는 장면과 방 안에 앉아 있는 장면을 연달아 보여주면, 관객은 두 장면의 인물이 동일인임을 인지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실제 지각과는 다르게, 카메라 화면상에서는 배경이나 조명 등이 달라지면 한 명의 인물조차 전혀 다르게 보여 식별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간혹 영상에 익숙하지 않은 나이든 세대의 노인들은 빠르게 지나가는 영상의 맥락을 쉽게 놓치는 바람에, 아까부터 계속 등장하고 있는 인물을 가리키며 갑자기 이렇게 질문한다. “얘는 또 누구니? 왜 재가 여기에 있는 거니?” 그래서 초창기 영화감독들은 관객의 인지를 돕기 위해 특유의 제스처나 소품을 이용하여 인물이 들어가고 있음을, 그리고 방안에 있는 인물이 방금 전 그 인물임을 관객에게 지시하는 장면을 따로 연출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19세기 미국의 희곡이나 소설에는 카메라가 심심찮게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거기서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서 이렇게 외친다: “맙소사! 이건 내가 아니에요!”

영화 초창기의 관객들이나 나이든 노인들 그리고 19세기 미국인들은 화면상의 이미지를 접하면서 실제의 지각과 카메라 지각을 혼동했기 때문에, 카메라에 노출된 겉모습들을 하나의 전체적 맥락으로 종합하지 못한 채 외양의 급류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흔히 광고나 영화에서 널리 쓰여 잘 알려진 포토제닉(Photogenic)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인간의 직접적 지각’과 ‘카메라를 통한 지각’의 차이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과는 다르게 외양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진발”이라는 말을 망설임 없이 쓰는 걸 보면 이미 두 지각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유추를 하면서 정리를 해보자. 프롬이 말하고자 했던 세 번째 의미의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우연적이고 단편적이고 상대적인 외양 이전의 보다 근원적인 존재, 즉 필연적이고 종합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이다. 이는 복잡해 보이지만 실은 단순하고도 상식적인 개념이다. 삐에르는 바로 옆에 있을 때는 크고 50m 밖에 있을 때는 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상대적으로 변하는 키와 그의 고유한 체구를 혼동하지는 않는다. 그의 키는 비교에 의해 시시각각 달라질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러한 상징적 기호의 변환을 넘어서, 비교의 관념 이전에 존재하는 그의 절대적 고유함을 알기 때문이다(Pierre is). 또한 달리고 있는 폴의 입장에서 보면 달리는 것은 서 있는 삐에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는 중에 겪어야 할 모든 변화들(근육의 변화, 체온의 변화, 땀, 열기, 대기 전체의 변화)은 삐에르가 아니라 바로 달리는 폴의 것이다. 따라서 달리는 자는 다름 아닌 땀을 뻘뻘 흘리는 폴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우리는 삐에르를 통해 폴을 상상하거나 폴을 통해 삐에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삐에르의 운동과 폴의 운동 각각을 파악할 줄 안다(Pierre is, and Paul is). 또한 마르셀이 키스를 하기 위해 다가가는 동안 애인은 점차 일그러진 다른 모습이 되어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르셀이 그녀를 다른 존재와 혼동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알고 느끼고 사랑하는 애인은 거리와 위치에 따라 달라 보이는 단편적이고 상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그녀에 대한 경험이 하나의 전체로서 종합된 절대적 존재이기 때문이다(She is). 마차에 오른 작가의 눈에 보이는 인상들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하나의 풍경이 있다. 정답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지속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존재의 절대적 본질을 프롬은 다음과 같이 쓴다.

“Being” in its etymological root is thus more than a statement of identity between subject and attribute; it is more than a descriptive term for a phenomenon. It denotes the reality of existence of who or what is refers to the person’s or the thing’s essence, not to his/her/its appearance.

따라서 그 어원적 뿌리로 볼 때 “존재”는 주어와 속성의 동일함을 진술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즉 그것은 하나의 현상을 설명하는 기술적 용어 이상의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 누구 “이다” 혹은 무엇 “이다”라고 하는 존재의 현실은 그 사람 혹은 그 사물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지, 그의/그녀의/그것의 외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특정 공간과 시점에서 상대적으로 전혀 다른 외양을 가지지만, 동시에 그가 어디에 있든 그 자체로서 자신 안에 함축하는 절대성이 있다. 이 절대성은 육체나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성이다. 이름이 불리기 이전의 활동의 총체로서 혹은 바로 거기에 있는 일차적 존재로서, 자신 안에 삶 전체의 경험과 기억을 보존한 채로 지속하고 있는 배아로서, 따라서 직관적으로 느껴질 때에만 그 온전한 존재성을 직접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풍경 전체로서, 이것이 프롬이 말하는 “진정한 존재”, “참된 존재”이다.

따라서 당연히 참된 관계란 참된 존재의 관계를 의미한다. 프롬에 따르면 상대적 외양으로 맺어지는 관계(법인체들의 계약이나 소유관계, 육체들의 집합, 상징의 공유 혹은 결합)는 진정한 관계라고 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외양에 따라, 상대적 질서에 따라, 외적인 조건에 따라 다르게 판단하고 믿는 것은, 마치 여기의 삐에르와 저기의 삐에르를 같은 사람으로 인식 못하거나, 영화를 보며 두 장면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옛날 관객들만큼이나 우스꽝스럽다. 급류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허둥대는 듯한 이 지속의 오류는 우리를 편협한 한쪽 내부에 머물게 한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존재 즉 온전한 그 무엇인 실상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아, 우리는 자연 안의 어떤 것과도 온전한 하나가 되지 못한다. 모든 존재는 느껴지는 한에서만 진정한 하나가 될 수 있는데, 느끼거나 느껴지려면 지속적으로 살아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돌멩이에도 살아 지속하는 무언가가 있다.

 

에리히 프롬의 ‘존재’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