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와 사유의 전복

신체와 사유의 전복

“신체는 더 이상 사유를 그 자신으로부터 떼어놓는 장애물이거나 사유할 수 있기 위해 극복해야만 할 것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사유가 비사유에 도달하기 위해, 즉 삶에 도달하기 위해 잠겨들어가는 혹은 잠겨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신체가 사유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 완강하고 고집스러운 신체가 사유하기를 강요한다는 것, 그리고 사유로부터 비켜난 것, 즉 삶을 사유하기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사유의 범주 앞에 삶을 출두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삶의 범주 속으로 투기해야 할 것이다. 삶의 범주란 정확히 말해 신체의 태도, 자세이다. ‘우리는 아직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잠과 도취, 그리고 노력과 저항속에 있는 신체.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사유하지 않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배운다는 것, 즉 신체의 능력, 태도 혹은 자세를 배운다는 것이다. 신체를 통하여(더 이상 신체의 중재에 의해서가 아닌) 영화는 정신, 사유와 결합한다. ‘그러므로 내게 신체를 달라’, 이것은 먼저 일상적 신체 위헤 카메라를 걸쳐놓는 것이다. 신체는 결코 현재에 있지 않다. 그것은 이전과 이후, 피로와 기다림을 내포한다. 피로, 기다림 혹은 절망조차 신체의 태도이다. 이 점에서 안토니오니보다 더 멀리 간 사람은 없을 것이다.”(영화2, 377-378)

신체가 사유로 하여금 삶을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호영송의 <어느 시인의 죽음>에서 시인은 시의 본질을 쓰고자 했지만, 삶과 현실로부터 벗어나서 삶을 일거에 노래할 수 있는 시를 원했다는 점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마치 죽음이 시의 완성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가 노동을 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는 삶을 일거에 노래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체는 사유를 국지화한다. 그것은 사유로 하여금 전체와의 통일성을 와해시킨다. 이것이 시간 속에서의 신체와 사유의 운명이다.

신체와 사유의 전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