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Bertold Brecht)과 고다르(Jean Luc Godard)에 관한 짦은 노트

브레히트(Bertold Brecht)과 고다르(Jean Luc Godard)에 관한 짦은 노트

1. 고다르는 브레히트(맑시스트)의 영향: 낯설게 하기(verfremdung, making strange, defamiliarization)

=> 헤겔식 변증법적 자기반영: 변증법은 부정을 통한 자기인식에 도달하기. 자명하다고 간주된 것, 잘 알려진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가 없다. 새로운 인식을 위해 그 자명한 것을 대상화, (자기)부정을 통해 (부정의 부정으로써, 자기자신으로 되돌아온 부정으로서) 변증법적 인식을 지향. 그래서 자명하다고 간주된 것이 낯설어지고 부정되어 새로운 창조의 강요에 직면. 낯설게 하기는 변증법적 부정의 예술적 재구성.
=> 브레이트,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낯설게 만드는 것은 간단히 이 사건이나 인물에서 자명하고 잘 알려진 것, 명백한 것을 제거하고, 이들에 대해 놀라움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 자연적 경험에 흡사함을 추구하는 고전적 리얼리즘의 세계, 감정이 이입된 멜로드라마의 세계를 낯설게, 카타르시스적 감동(수동성을 만들 뿐인)의 부정 => 장치와 기제들의 개발 => 관객을 깨어있게(disillusion), 도취로부터 깨어나 세계를 냉철하게 보도록 유도, 정치적인 목적.
<<그런데 이 호기심과 놀라움의 목적은 관심과 흥미를 갖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감동하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기 위해, 감정을 떼어내어 차가운 온도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2. 브레히트 미학, 68혁명과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호응 = 브레히트의 재발견
“브레히트의 낯설게하기는 우리 앞에 현전하는 존재를 낯설게 인식함으로써, 지배이데올로기에 침윤된 인식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낯설게 하기 이론의 구현 원리는 간단하게 말하면 미학적 생산수단을 드러내 연극을 연극으로서 인식하게 하고, 배우로 하여금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행위를 게스투스(Gestus)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스스로 깨어있음을 강조하는 자기 반영적 메타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3. 브레히트의 장치들: 그 방식은 주로, 예술적 생산수단들을 드러내는 방식(게스투스)이었다… 예술이 자기지시적이 됨으로써 관객은 예술적 감정이입에서 깨어나 자신이 지금 구성된 현실, 허구적 현실, 예술을 접하는 것임을, 즉 현실적 자명함의 산물이 아니라 구성된 현실임을, 현실을 객관화하고, 현실로부터 벗어나 현실을 창조의 대상으로 만들도록, 즉 기분이 잡쳐서, 뭔가 새로운 것을 하도록, … 관객이 자기를 의식하도록, 예술의 자기의식, 자기반영(자기반영적 메타미학)만큼이나, 관객의 자기반영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전략에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왜 자기자신을 드러내서 스스로 희생을 자초했을까? 영화와 연극을 재미없고 무감동적이고 시시하게 만들어서 결국 남은 것은 아무도 흥미와 관심을 가지지 않는 텅빈 객석이 아니었나? 흥미가 떨어지게 하려면, 즉 신비를 깨부수려면 신비에 싸여있는 대상(부르주아, 자본, 상품 등)을 그렇게 했어야지, 왜 엉뚱하게 신비를 깨부술 망치와 관객을 물고늘어지나? 결단과 행위를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 과연 먹힐까? 그 자신도 결코 과학적이지 않으면서 자꾸만 과학적 환상을 강요했던 것은 아닐까? 상징적 제스처로 뭔가를 실제적으로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어쩌면 지식인의 과대망상은 아닐까?>>

4. 브레히트가 1929년에 출판한 <마하고니시의 흥망성쇠 Aufstieg und Fall der Stadt Mahagony>에 첨부한 고전적 연극과 서사극의 대조표, 1939년에 수정 보완된 표이다. 이 주석표는 서대정의 논문, 『재현의 위기 시대의 메타 담론 연구; 영화의 자기 반영 미학을 중심으로』(A Meta Discourse Study in the Era of The Crisis of Representation; Centering on Self-Reflexivity Aesthetics of Film)(2007)에 수록되었다. 참고로, 이 표는 <독일희곡이론사>(문학과 지성사 1994, pp.140-142)와 <브레히트와영화>(george Lellis, 말길, 1993. p.27)를 참고해 재구성한 것이다.

극적연극(Aristotle Theater) / 서사적 연극(Episches Theater)
플롯 / 이야기
관객을 사건 속으로 몰아넣음 / 관객을 관찰자로 만듦
관객의 감정을 일으킴 / 관객의 능동성을 일깨움
관객에게 체험을 전달 / 관객에게 결단을 강요
관객은 줄거리 속에 감정이입 됨 / 관객에게 줄거리를 마주 대함
암시가 주요 도구 / 논증이 주요 수단
감정의 축적 / 인식의 단계까지 몰고 감
이미 알려진 존재로서의 인간 / 인간은 연구의 대상이 됨
인간의 변화 불가능한 존재 / 인간은 가변적이고 변화할 수 있는 존재
결말에 대한 긴장감 / 사건 진행에 대한 김장감
발전 / 몽타주
다음 장면을 위한 장면 / 장면마다 독립
직선적인 사건 진행 / 곡선적인 사건 진행
진화적인 사건진행의 필연성 / 사건 진행의 도약성
현존하는 세계 / 변화 되어야 할 세계
인간 행위의 필연성 / 인간이 해야 할 일
충동(본능) / (행위)의 동기
사유가 존재를 규정 /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
감정 / 이성(독일 드라마 각주)

5.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장면들이 서로 필연적 인과관계 없는 독자적인 장면들. 단절적, 에피소드 중심으로 된 분절적 구조, 비조직적인 구성은 인물의 내면심리로부터 단절하고 객관화하기 위한 기제. 알튀세가 말했던 멜로드라마를 벗어나 실재적인 것에 대한 섬광을 드러내기. 왜냐하면 개인적 심리란 이데올로기적이고, 근본적으로 이 심리들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므로. 심미묘사보다는 외면적 행동, 기술적 장치들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는 것. 개인의 영혼 속에 내재하는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단절, 내면의 심리를 제거하는 것이 목적.
(1) 가령, 설치된 스크린에 영상을 투사한 현수막, 자기지시적인 배우의 연기 즉 연기임을 스스로 드러내기, 몰입이 아닌 현실적 판단을 요구, 고대그리스극의 인용으로 무대위에 코러스 삽입, 관객과 연극의 동일화제거, 정치적 메시지 삽입, 반연극적 무대장치(피스카토르 영향), . . 등. 관객의 감정에 호소하여 호응을 얻는 대신, 토론과 지적인 판단 유도.

6. 이것이 바로 고다르가 여러 기술적 절차들을 통해 엉성한 이야기, 카메라를 느끼게 만들고, 반주관적이고, 강박적이고, 영화가 스스로를 반영, 인식, 의식, 사유하도록 하는 기교주의 혹은 기능주의의 근간. 들뢰즈의 말처럼 영화적 코기토의 탄생(안토니오니의 심미주의와는 달리 고다르는 기교주의). 이것이 자기지시 미학의 의미이다.

(1) 가령, Vivre Sa Vie에서 12개의 Tableau로 나누어 독립적인 형태로, 분절적, 느슨한 관계. 따라서 관객은 그 내용을 연결하고, 그 의미를 찾기 위해 관객 자신의 현실적 상황을 토대로 하여 그 극을 재구성하거나 새로운 의미를 찾아 나서야만 한다. => 이것이 정치적 지향성을 가지게 되는 과정이다.
(2) 관객의 참여 요구. 감독 자신이 내레이터로 출연하여(통계수치를 읽어준다든지, <그녀에 대해 알고 싶은 두 세 가지 것들>에서 인물을 소개하는 내레이터로 등장, 배우가 게스투스를 통해 스스로 연기하고 있음을 관객에게 일깨워주고 그 자신도 맡은 역을 객관화시킴으로써 자신을 되돌아보게
(3) <네 멋대로 해라>, <미치광이 피에로>에서 시도했던 ‘관객을 향한 말걸기’와 <남자,여자>에서부터 인터뷰 형식과 배우들 간의 토론의 결합
(4)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를 충격기법으로 전환
(5) 그러나 68년 중기 이후에는 인터뷰 형식과 토론을 결합시킨 관객에게 말걸기, 감독 자신의 목소리의 삽입 혹은 배우의 입을 통해 감독의 메시지 전달 등의 특유한 자기지시적 방식을 도입
(6) 관객에게 말걸기, 열린 대사의 게스투스 뿐 아니라 ,영화속 내러티브와 호응하는 배우들간의 대사: <Tout va bien>에서 이브몽땅과 제인폰다가 Lui와 Elle 역으로 나와 이브몽탕과 제인폰다를 스스로 언급.
(7) 미장아빔(Mise en abym)의 형식
“극에 몰입하지 않고, 전형을 창조하지 않으며, 그 대신 창조된 과거의 전형을 인용하는 게스투스 미학은 일종의 미학적 거리를 생산하기 위한 방법이다. 즉, 스크린 앞에 앉아 있는 관객과 배우와의 거리 그리고 배우와 그 배역 간의 거리, 이 이중의 거리를 창출함으로써 게스투스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제인폰다와 이브몽땅에게 주연을 맡기고, 그들에게 다시 미장아빔 속의 그(Lui)와 그녀(Elle) 역할을 맡긴 것은 자기 반영적 미학을 실현하기 위한 적절한 선택으로 볼 수 있다. 관객은 삽입된 미장아빔과 Tout va bien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심리적 거리를 만들 것이며, 제인 폰다와 이브 몽탕 역시 자신들에게 부여된 이중의 역할로 인해 내적인 거리감이 발생하는 것을 느낀다. 또한 우파 배우인 그들이 좌파적 시각을 가진 인물들을 연기함으로써 삼중의 거리가 발생한다. 이로써 고다르는 브레히트가 제거하고 싶었던 아리스토텔레스 미학의 소산인 procenium의 제4의 벽을 그의 영화 속에서 완벽히 제거하였다.”(서대정, 116)

7. 몇 가지 질문과 코멘트
(1) 브레히트와 고다르는 대중을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전제하에 모든 방법론을 상정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낯설게 하기를 통하여 그들의 이성을 촉발한다는 발상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2) 대중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생각 없이 판단하고,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조작될 소지가 많으므로, 뭔가 조금 더 아는 지식인과 예술가가 끊임없이 자기선언을 통해 그들의 사유의 길을 인도해야 하는가? 교훈미학은 올바른 길인가? 이는 예술가의 ‘선민의식’이며 과대망상은 아닌가? 대중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고통 받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고 편승하여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들은 단지 자신의 이익과 쾌락의 법칙에 의해서만 추동 되고 자극을 받고 행동하는, 바보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리하지도 않은 그런 존재는 아닌가?

(3) 예술가들은 이제 그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그들을 교화시키거나, 그들의 구원을 도와주거나 하는 따위의 오만하고도 순진한 망상과 착각은 집어치우고, 오히려 너나 잘하셔서 본인들의 삶에나 충실하라. 필요하다면 그들을 이용하라! 고다르의 재기발랄함, 조롱, 가벼움, 경쾌함, 산만함, 기교, 새로운 인류유형, 이러한 것들이 필요한 것이다.

브레히트(Bertold Brecht)과 고다르(Jean Luc Godard)에 관한 짦은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