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의 외부: 까슈와 태피스트리

프레임의 외부: 까슈와 태피스트리

프레임에 관한 논의는 자연히 “장-밖”(out-of-field, hors-champ)의 문제로 우리를 이끈다. 들뢰즈에게 프레임과 그 외부의 문제는 지각 가능한 영역과 지각 불가능한 영역, 현실태와 잠재태, 또는 집합과 전체의 구분을 변주한 문제로 볼 수 있다. 베르그송주의자인 들뢰즈는 프레임-외부를 프레임의 “부정”으로 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화면 안과 밖을 구분해서 그 둘이 서로 상보적인 관계를 맺으며 실재를 ‘재현’하는 두 개의 프레임―시각적 이미지는 화면 안에 있고, 소리는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식―으로 간주하거나, 이 시각적 프레임과 음향적 프레임이 서로 불일치해서 일종의 ‘계주’처럼 교대로 작동하면서 따로 따로 존재하는 ‘파편’―재현체계를 거부했던 브레송(Robert Bresson)의 경우처럼―으로 간주하는 것도, 비록 진일보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충분한 설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프레임-외부’는 지각 가능성을 넘어서는, 보이거나 이해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명백히 현존하는 것, 즉 ‘잠재적인 것’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주의의 이원론에 따라 이 잠재적 실재는 ‘프레임’을 두 가지 지시체계로 규정하는 토대, 아니 그 반대로 프레임 구성 자체가 ‘프레임-외부’를 두 가지 양상으로 구분하는 결정 행위가 된다. 들뢰즈는 바쟁(André Bazin)의 구분법을 도입해서 이를 예시한다. 바쟁은 영화에서의 ‘스크린’과 회화에서의 ‘프레임’의 차이―예컨대, 알랭 레네(Alain Réne)가 <반 고흐>(Van Gogh)에서 고흐의 작품을 영화로 찍었을 때 발생했던 ‘색채의 차이’, 그리고 몽타주와 그림의 시간성의 차이 즉 수평적 연장을 추구하는 “지리학적 시간”과 깊이를 추구하는 “지질학적 시간”의 차이, 그리고 “내부로 열린[혹은 외부로부터 닫힌] 공간”과 “밖으로 연장되는 공간”의 위상학적 차이 등―를 논의 하면서, 스크린의 테두리는 하나의 완결된 소우주를 형성하는 회화와는 달리 현실의 일부만을 떼어낸 “까슈”(cache, 가리개)라고 보았다.(바쟁, ⌈영화란 무엇인가?⌋, p. 244 이하) 이 구분은 회화를 “요약”으로 사진을 “인용”으로 구분했던 벤야민(Walter Benjamin) 또는 존 버거(John Berger)의 제안을 떠올린다. 바쟁에 따르면 회화에서의 프레임은 건축물로서의 연극 무대와 마찬가지로 현실세계와 대립하고 현실로부터 단절된 일종의 소우주이다. 그것은 현실적 방위가 불투명하고 벡터가 중화된 공간이다. 따라서 프레임은 내부로 휘어지고 구심성을 지향하는 “명상적 공간”을 창출한다. 즉 회화는 현실과의 이질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스크린은 이러한 회화적 공간을 파괴한다―바쟁의 표현에 따르면, 그림을 주제로 찍은 영화에서 보듯이, 영화는 회화를 “배반”한다. 스크린은 틀 밖으로 확산되어 우주로 무한히 연장되고 자신과 소통이 가능한 동질적 세계로 뻗어가는 원심적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사진의 존재론적 위상이 증명하는 것으로서 이미지와 현실의 물질적 동질성(빛-물질)의 연장이라 할 수 있으며, 영화가 현실의 연속성 위에서 파악되기를 원했던 바쟁의 ‘다큐멘터리즘’의 일환이라 할 것이다. 들뢰즈는 프레임이 가지는 이러한 이중성―외부에 열린 체계와 닫힌 체계―을 르느아르(Jean Renoir)와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프레임의 차이로 재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르느아르의 프레임에서는 “공간과 연기가 프레임의 경계를 넘어선다.”(Deleuze, Cinema1, 16) 가령, 그의 영화 <나나>(Nana)에서는 연기자들의 동작이나 물건 배치가 화면 가장자리에서 잘린 채로 제시 되거나, 반대로 화면 밖에 있는 어떤 대상의 일부분이 잘린 채로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 나나가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을 때, 화면에는 어깨와 손만 교차하거나, 어깨 위에 얹은 손과 어깨만 나오거나, 그러다가 나중에는 둘 모두가 나와 앞선 장면을 정당화 하거나, 춤을 추는 사람 옆에 다른 사람의 머리가 잘려 나오거나, 탁자의 모서리만 화면 안으로 들어와 있는 식이다. 르느아르의 프레임은 항상 외부의 소통 가능한 다른 집합을 끌고 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히치콕의 경우엔 세트가 프레임 안에 온전한 형태로 안착되어 있으며, 인물들의 움직임도 틀 내부에서 발생하고 소멸한다. 그의 프레임은 르느아르와는 달리 스크린 외부로부터 닫혀있는 체계로 보인다. 따라서 바쟁의 구분을 따라 얼핏 보면 르느아르의 프레임이 ‘까슈’라면 히치콕의 프레임은 ‘그림’에 해당된다. 그런데 여기서 들뢰즈는 히치콕의 프레임을 ‘그림’이나 ‘연극’의 프레임이 아니라 ‘태피스트리’에 비유함으로써 바쟁이 이원화 했던 두 체계―스크린과 회화―의 차이와는 다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히치콕의 프레임은 모든 구성 성분들을 한정하고, 그림이나 연극의 프레임 보다는 태피스트리의 프레임처럼 작용”한다.(Cinema1, 16) 태피스트리의 비유를 통해 들뢰즈가 의도했던 것은 닫힌 체계처럼 모든 요소들을 한정하는 히치콕의 프레임조차 실은 외부로 열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물론 태피스트리는 스크린과 달리 프레임 외부와 질적으로 다르며, 회화와 마찬가지로 내부로 향하는 명상적 공간을 창출한다. 그러나 태피스트리는 씨실과 날실을 이어 계속해서 짤 수 있기 때문에 외부가 내부로 침잠할 가능성 또는 내부가 외부로 확장될 가능성에 열려 있다. 태피스트리는 내부 요소들의 집합이 완전히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단지 외견상만 그러할 뿐이며, 실상은 외부 전체에 잠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가느다란 실’로 수많은 균열들과 아울러 삐져나와 있다. 그것은 완벽한 형태의 베르그송주의적 메타포이다. 이 잠재성은 <이창>(Rear Windows)이나 <현기증>(Vertigo)의 많은 장면들 속에서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uart)분이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잘 드러난다. 일종의 ‘가느다란 실’인 그의 시선은 프레임 외부를 동질화하지 않으며, 시선의 대상 역시 프레임 내부와 동일한 위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화면 외부를 바라본다. 그러나 이 외부는 르느아르의 ‘까슈’와 달리 화면 안에 있는 요소들의 외부로의 동질적 연장이 아니라 이질화, 더 정확히는 새로운 차원을 여는 잠재화이다. 여기에는 살인이 일어나는 끔찍한 물리적 순간을 화면 밖 영역으로 정지시켜 잠재화하는 히치콕 특유의 ‘서스펜스’와 동일한 성격의 어떤 열림이 있다. 따라서 바쟁과 달리 들뢰즈가 의도했던 것은 서로 다른 두 체계로서의 ‘스크린’(까슈)과 ‘회화’(프레임)의 이원화가 아니라, ‘스크린’이라는 한 체계에 내재한 두 양상의 나눔이었다. 즉 두 개의 프레임이 있어서 하나는 틀-외부를 지시하고 소통하는 반면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라, 프레임 자체의 두 양태, 더 나아가 “틀-외부의 상이한 두 양상”이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프레임 짜기는 그 자체가 외부를 결정하고 규정하는 방식이다. 그것이 밖으로의 동질적 연장이든 아니면 이질적 잠재화이든, 화면 밖의 존재는 불가피한 것이다. 공간을 규정하고 한정하는 수많은 프레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프레임 외부가 현존한다. 그것은 르느아르처럼 공간과 연기를 프레임의 가장자리에서 잘라내어 거기서 동질적인 외부를 지시하기도 하고, 히치콕이 그렇듯이 프레임을 닫고 그 내부를 이질적으로 만들지만 잠재적 외부를 열기도 한다. 어떤 식으로든 외부는 프레임 내부로 침투하며, 더 큰 집합, 다른 집합과의 관계가 존재한다. 완전한 폐쇄란 불가능하다.

이 글은 곧 출간될 ⌈씨네마톨로지⌋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프레임의 외부: 까슈와 태피스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