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린과 키튼: 휴머니즘적 도구주의와 무정부주의적 기계주의

채플린과 키튼: 휴머니즘적 도구주의와 무정부주의적 기계주의

채플린의 코미디 ‘소극’(burlesque)은 계열들의 조우와 충돌의 집합이다. 즉 행동의 계열들이 있고 이 계열들 사이에 다른 계열이 삽입되어 질서 전반이 엉켜 버리는 것이다. 여자와 춤을 추다가 다른 여자의 춤으로 끼어든다든가, 길을 지나가다가 앞에서 다가오는 소년과 마주치면서 소년에게 지팡이를 낚인다든가, 국수를 먹다가 리본이 국수에 떨어져 자신도 모르게 그 리본을 먹는다든가, 세수를 하다가 옆 사람이 놓은 치즈를 비누로 오인하여 집어 들거나, 반대로 비누를 치즈로 오인하여 먹는 것이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웃음의 원천에 관한 베르그송의 공식―“생명의 자유로운 운동이 기계적이고 경직된 운동으로 전환하거나, 그 두 경향이 서로 충돌하는 현상”―이 다소 변형되어 기계적 운동들 간에 일어나는 우발적인 작은 충돌들이 코믹한 상황 전체를 실현하는 것처럼 보인다.(베르그송, <웃음>, 36) 이로써 어떤 행동을 규정하는 인과성이 다른 인과성으로 삽입되거나 조우하여 새로운 인과성의 계열을 만들거나, 선형적인 흐름을 따라 진행되던 계열들에 단절이 일어나 행동의 질서가 엉망진창이 되어 인과성을 잃은 비선형적인 혼란, 즉 기계주의의 과부하가 일어나기도 한다. 계열의 혼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모던타임즈>에서의 깃발 장면이다. 찰리와 붉은 깃발의 두 계열의 조우는 길에 떨어진 붉은 깃발을 집어든 찰리의 행동의 미세한 차이―깃발을 되돌려주거나 깃발을 들고 시위에 앞장서거나―로 인해 상이한 결과를 불러온다. 결국 길에 떨어진 깃발을 되돌려 주려했던 찰리의 시도는 시위를 위해 깃발을 흔든 것으로 혼동한 경찰에 의해 유치장 신세가 된다. 이 교차 행동-이미지들 속에서 행동의 작은 차이가 커다란 상황으로 빠져드는 작은 형식의 법칙(A-S)을 발견할 수 있다. 계열들의 집합은 채플린뿐 아니라 다른 많은 소극에 적용되는 원칙처럼 보인다. 계열들의 우연한 조우가 거대한 하나의 비선형적 계열을 이루는 경우도 있는데, 로이드(Harold Loyd)의 경우가 그것이다. 그의 <뉴욕시에서 택시타기>(Taxi Experience in New York City)는 이러한 연쇄의 컬렉션으로 이루어진다. 택시는 자신의 기능을 단 한 차례도 수행하지 못한 채, 도시의 수많은 운동 계열들과의 조우를 통해 뉴욕 전체를 비선형적으로 돌아다니게 된다. 이것은 마치 뉴욕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골드버그 기계들’의 집합처럼 보이게 한다. 계열들의 우연한 조우로 인해 벌어지는 좌충우돌은 대부분이 학습되지 않은 낯선 지각과 부주의에서 오는 것인데, 이것은 대도시의 파편화된 공간 속에서 밀실과 밀실을 옮겨 다니듯 이동하는 인간의 이차원적 존재성을 반영한다. 가령, <하늘에 매달려>(Haning in the Sky)에서는 가려진 하늘과 사방이 막혀 있는 건물 틈바구니에서 자신 앞에 난데없이 떨어지는 사물이나 사건들에 갇혀, 주어진 영역 밖을 넘어가지 못하고 파편들의 블랙홀 속에서 헤매며, 거시적인 지각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분열된 집단성’을 예시한다.

소극은 순전히 작은 형식에만 의존하고 작은 형식을 창조하는 장르이다. 행위들 간의 혼선이 상황 전체의 거대한 사건을 초래하는 채플린의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소극은 행위에서 상황으로의 공식(A-S)을 완전한 형태로 구사한다. 한 사람의 행동 안에 공존하는 서로 다른 두 계열 또는 전혀 다른 두 행동 간의 미세한 차이로 인해, 동일해 보였던 어떤 상황이 무한하게 거리가 벌어지는 것은 작은 형식의 기호인 ‘지표’(생략과 모호성)의 법칙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예컨대, 등 뒤에서 보면 아내의 죽음에 흐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찰리가 앞으로 돌아서자 실제로는 콧노래를 부르며 칵테일을 만들고 있다. 몸을 흔들 때 흐느끼면서 몸을 흔드는 행위와 칵테일을 저으면서 몸을 흔드는 행위의 차이가 식별 불가능할 정도로 미세해서, 그의 앞모습과 표정을 보기 전까지 우리는 완전히 대립하는 두 세계(아내에 대한 사랑과 거부)를 뒷모습 속에서 동일시한다. 그가 표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동일시했던 두 계열 사이에는 얼마나 터무니없이 커다란 거리가 놓여 있는지를 알게 된다. <어깨 총>(Shoulder the Gun)에서는 전투 중인 찰리가 총을 쏠 때 마다 벽에 숫자를 새기며 점수를 매긴다. 그러나 적의 총알이 날아와 자신의 모자를 맞추자 그는 곧 점수 한 점을 지운다. 전쟁과 놀이라는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총을 쏘는 행위의 미세한 차이 안에서 미묘하게 꼬여있다. 즉 총 쏘는 행위를 차이가 가장 적은 위치나 관점―점수를 매기는 행위가 이를 더 강화한다―에서 보여줌으로써, 하나의 행위가 놀이와 전쟁의 두 상황 사이에 놓인 엄청난 거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살인광 시대>(Monsieur Berdoux)에서는 베르두가 노천 카페에서 한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그녀에게 미소 짓자 그녀가 베르두 쪽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베르두가 환하게 웃으며 화답하자 곧 그의 뒤 쪽에서 다른 남자가 나타나 여자와 함께 떠난다. 미소의 미세한 차이를 간파하지 못하고 미소가 향하는 모호한 대상을 잘못 해석하여 전혀 다른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이것은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말장난’(punning)이 행동-이미지로 전환된 형태처럼 보일만큼 ‘모호성’의 문학적 효과에 닿아있다. 찰리가 정육점의 소시지를 잡고 매달린 모습이 전차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모습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즉 도구와 행위의 유사성을 매개로 전혀 다른 두 상황이 하나의 행위 속에서 은유적으로 병치되거나 유추되어 대도시의 삶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하게 해준다. 또는 찰리 자신이나 그 행위가 환경과 혼동되는 경우도 있다. 이 혼동으로 인해 모든 상황이 얽혀 사건이 일어난다. 모래 속에서 모래와 구분이 어려운 찰리, 동상과 구분이 어려운 찰리-동상, 셰익스피어의 <멕베드>(Macbeth)에서 버남 숲의 움직임을 상기시키는 찰리-나무의 모호성이 그것이다. <살인광 시대>에서는 베르두가 아가씨를 집으로 데려가 죽이려다 사랑에 대한 몇 마디 때문에 그녀를 살려주고 연민을 베푼다. 베르두가 그녀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은 그녀의 처지가 자신과 같다는 것이었다. 이 ‘유사성’으로부터 동요된 감명으로 그는 그녀를 죽이려던 시도를 자선을 베푸는 행위로 바꾼다. 여기서 그녀는 그의 선심에 감동하여 그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또 베르두의 외모와 외적인 행동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인격―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인격과 돈을 갈취하기 위해 아무런 느낌도 없이 여자들을 살인하는 살인마의 인격―을 내포한다. 전혀 다른 지점에서 출발한 두 커플이 하나의 작은 장소에서 근접해 만나 파트너가 바뀌어 전혀 다른 지점으로 멀어지는 것처럼, 이것은 계열들의 혼선을 재현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세한 차이가 엄청난 상황을 불러오는 예는 <위대한 독재자>의 두 인물의 콧수염의 유사함일 것이다. 결국 이 콧수염의 유사성 속에서 모든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극단적 대립이 파생되어 나오는 것이다.

행동의 미세한 차이로부터 생기는 모호함과 혼란은 나아가 사물이나 도구의 ‘잠재성’으로 나타난다. 채플린은 일상적인 사물들의 기능을 다양하게 ‘도구화’하여 웃음이 유발되는 비범한 상황을 창출하는 대가였다. 여성의 옷에 달린 커다란 단추를 공장의 나사의 이미지로 그 의미를 전환하거나, 날아오는 총알의 불꽃에 담뱃불을 붙이거나, 기둥에 박힌 못에 자신이 입고 있는 옷깃을 걸어 홍수로부터 떠내려가는 재난을 피하거나, 기계에 뿌리는 윤활유 분무기를 인간에게 뿌려 윤활유를 인간을 돌리는 도구로 표현해 기계화된 인간을 조롱한다. 이들은 사물이 잠재적으로 내포하는 미세한 기능적 차이들을 이용해 걷잡을 수 없이 멀어지는 대립적 기능이나 반대의 상황을 도출하는 예들이다. ‘도구주의’는 사물의 잠재성을 이용하여 사물을 도구화하고, 이를 새로운 상황으로 변형하거나 어떠한 환경을 여는 테크놀로지의 양상이다. 즉 사물을 전혀 엉뚱한 쓰임새로 만들어 상황을 극복하거나 새로운 상황을 연다. 도구의 잠재성을 이용한 도구주의는 이미 혹스가 잘 구사했던 방식이기도 했다. 감옥의 다양한 기능으로의 활용, 교회의 기능 전환, 우연히 발견한 사물들의 임기응변식 활용 등, 혹스의 기능주의는 공간을 도구로 바꾸어 사건을 만들어내고 눈앞에 닥친 상황에 대면하는, ‘서사적 엔지니어’와는 대조적인 ‘기능적 땜장이’의 분열증적 테크놀로지에 가깝다. 채플린이 확립한 도구주의는 기계를 다룰 때조차 고수된다. <모던 타임즈>의 공장에 나오는 거대한 기계는 인간이 자유자재로 변조할 수 있는 도구처럼 묘사되며, 반대로 인간을 마음대로 변조시킬 수 있는 기구가 되기도 한다. 컨베이어 벨트의 기계적 운동과 인간 몸짓의 관계의 전도, 기계와 식별이 안 될 정도로 습관화된 신체, 그리고 노동자를 먹여주는 기계 등은 기계가 유익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거시적인 신체 운동뿐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욕구조차도 통제하고, 인간에 대항하고, 인간을 고문하고 파괴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예시한다. 바로 이것이 채플린의 ‘휴머니즘’을 구성한다. 그의 소극은 기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신체가 비정하게 돌아가는 무감(無感)의 기계와 벌이는 불화에서 비롯된 혼란과 무질서를 재현한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고, 롤러스케이트 위에서 좌충우돌하고, 기계장치에 빨려 들어가는 인간은 도리어 도구로부터 수난을 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산업 기계주의와의 불화는 찰리의 신체를 루소(Jean Jacques Rousseau)의 개념에 비견할만한 ‘본성적 자연의 상태’로 기울어지게 한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낭만주의의 ‘목가적 이상향’은 그의 이러한 루소식의 휴머니즘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업-기계 문명과의 불화의 와중에 그가 택한 행동 양태와 그 테크놀로지가 목표로 삼는 것은 기계의 부정뿐 아니라 사물의 잠재성을 이용하여 확립된 도구주의에 의한 인간의 승리이다. 이를 “휴머니즘적 도구주의” 또는 “도구주의적 휴머니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들뢰즈는 채플린의 소극을 “휴머니즘적 공산주의”(the communist-humanist)라고 명명한다.(C1, 176)

채플린의 무성영화는 소극의 형태로 거의 전적으로 작은 형식의 행동-이미지를 구사했다. 찰리의 행동은 환경전체나 사회적인 수준 보다는 단편으로 주어지는 작은 상황들과 벌이는 불화와 타협의 연쇄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행동과 상황 사이에 벌어진 간격이 크지 않기 때문에 행동은 곧 상황으로 흡수되고 상황은 바로 임기응변의 행동으로 전개된다. 심지어 <모던타임즈>의 첫 시퀀스를 장식하는 공장에서의 소동도 사회적 수준의 거시적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는 사건이기 보다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제시된 ‘고립된 막간극’처럼 보인다. 그것은 산업 자본주의와의 싸움이 아니라 단지 쉼 없이 돌아가며 찰리의 몸을 괴롭히는 기계와의 불화이다. <어깨총>에서의 전쟁 역시 ‘시-공간적 추상성’이 지배하며, 그로 인해 행동은 환경과 맥락을 잃어버린 무용이나 발레처럼 보인다. 그러나 들뢰즈가 지적했듯이, 후기의 유성영화들―<위대한 독재자>, <살인광 시대>, <라임라잇> 등―은 소극의 형태를 지우고 연설이나 담화를 도입함으로써 사회적 비전을 직접적으로 환기하는 큰 형식의 행동-이미지로 전환한다.(C1, 171-172) 즉 행동이 포괄자에 의해 둘러싸이는 것이다.

버스터 키튼 역시 큰 형식을 구사했지만 채플린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그는 채플린처럼 담론을 사용하거나 소극의 요소를 제한함으로써 작은 형식에서 큰 형식으로 전환한 것이 아니라, 큰 형식을 자신의 소극에 직접 적용한다. 그럼으로써 소극 자체를 통해 큰 형식의 행동-이미지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가령 주인공은 멀리에서부터 밀려오는 거대한 재난이나 파국적 상황, “끊임없이 변하는 풍경들, 기형적인 기하학적 구조들, 빠른 물살과 폭포, 떠내려가는 거대한 배, 태풍에 휩쓸리는 마을, 납작해진 평행사변형처럼 붕괴되는 다리”에 압도되어 발버둥치고 있는 하나의 미세한 ‘점’처럼 묘사된다.(C1, 173) 이것은 A-S가 아니라 S-A로 이루어진 유기적 재현이다. 베나윤(Robert Benayoun) 같은 비평가가 지적했듯이, 주인공의 시선 역시 잠망경을 바라보는 선원이나 적진을 탐방하는 척후병처럼 먼 곳을 바라본다.(Benayoun, The Look of Buster Keaton, 83) 마치 거대한 포괄자의 내부나 외부를 먼 거리에서 전망하듯 시선 자체가 이미 유기적 호흡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키튼의 소극은 채플린에서는 볼 수 없는 굉장한 광경들을 펼친다. <우리의 환대>(Our Hospitality)의 첫 시퀀스에서는 야밤에 천둥과 번개가 치고 결투와 살인이 일어나고 공포에 질린 여인이 등장한다. 완전히 “그리피스적인 이미지”이다.(C1, 174) 이 작품은 오래된 가문의 원수지간에 의해 후손이 수난을 치른다고 하는 ‘로맨스’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인물들이 처한 현실 자체가 이미 전통의 굴레 속에 있으며, 이는 거대한 두 세력이 대립하는 구도, 즉 행동성이 사회적 포괄자에 둘러싸인 큰 형식이다. 이 밖에도 <스팀보트 빌 주니어>(Steamboat Bill Junior)에는 엄청난 태풍이 불어오고, <항해자>(The Navigator)에서는 깊은 바다 밑이라는 거대한 환경 속에서 잠수부의 고난이 등장하고, <제너럴>(The General)에서는 기차의 충돌과 홍수가 등장하고, <배틀링 버틀러>(Battling Butler)에서는 상대를 죽일 듯이 달려드는 끔찍한 권투시합이 나온다.(C1, 174)

물론 채플린의 작품에서도 자연환경과의 투쟁이 등장한다. <금광시대>(The Gold Rush)의 혹독한 겨울 눈보라와 눈사태가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투쟁은 자연환경과 벌이는 것이 아니라 배고픔 때문에 짐승처럼 변해버린 다른 사람과의 싸움이나 실내에서 벌이는 소동이 지배할 뿐이다. 그 소동에서도 자연재해는 둘의 싸움을 격렬하게 하는 도구로 활용될 뿐이지, 인물이 그것에 맞서 투쟁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키튼의 경우 인간은 거대자연과 맞서 있거나 직접적으로 투쟁적인 상황에 이른다. <우리의 환대>에 등장하는 폭포에 드리워진 통나무조차 물살에서 빠져나가는 도구보다는 그 자체 극복해야 할 환경에 가깝다. 격렬한 육체를 보여주는 권투와 싸움 역시 채플린의 경우엔 서로 발을 맞추어 춤을 추거나 짜고 하는 발레연습처럼 보인다. <금광시대>나 <자립재정>(Easy Street)에서의 싸움, 그리고 <시티라잇>(City Light)에서의 권투는 실감나는 권투가 아니라 잘 짜인 마임이나 춤처럼 보이고, 사소한 실수가 싸움의 승패를 불러오거나, 찰리 특유의 제스처가 커다란 상황을 불러오는 식의 미세한 차이의 법칙이 지배한다. 그러나 키튼의 <배틀링 버틀러>에서 표현된 권투는 마치 권투의 잔혹성을 그 극한에서 폭로하고 고발하기라도 하듯이 선수들의 몸은 흉측하게 일그러지고, 호흡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며 뿜어져 나오고, 얼굴은 주먹에 짓이겨 뒤틀려 있으며 표정은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다. 웃음을 유발시키기에는 지나치게 비극적이거나 거대한 것이다.

작은 형식의 소극을 넘어서 채플린과는 전혀 다른 위상을 가지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들뢰즈는 “한계-이미지”(limit-image)라고 불렀다.(C1, 174) 한계-이미지에서는 태풍이나 홍수처럼 환경의 막대함과 광활함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면서, 환경과 행위가 그 규모 면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즉 단발적인 행위와 상황이 서로 근접해있는 작은 형식의 ‘지표’가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엄청난 상황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행위 사이에 먼 거리의 ‘간극’이 지배한다. 채플린은 크게 대립하는 상황―전쟁, 국가, 계급 등―을 코믹한 행위들 안에서 미세한 차이로 공존하게 했지만, 키튼은 코믹한 행위와 거대한 상황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이것은 포괄자와 인물들이 기나긴 간극 속에서 서로 대립, 교차, 병치하는 그리피스와 포드의 이미지를 닮았다. 실제로 키튼의 액션은 순간적인 동작의 기능에 전적으로 기반을 두지 않고 대규모의 지류를 따라 흘러가면서 그 지류에 적응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어떤 임기응변으로 채워진다. 이것은 행동이 상황을 여는 것이 아니라 포괄자에 의해 압도된 상황 안에서 행동이 벌이는 치열하지만 불일치된 투쟁이다. 예컨대 대지를 집어삼킬 듯한 폭포의 낭떠러지로 서서히 떠내려가는 물의 흐름에 휩쓸러 가면서 발버둥치고 헤엄치는 액션이 그것이다. 바로 파국이 오기 전의 거대 간극이다.

따라서 키튼의 ‘한계-이미지’에는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다. 포괄자로 존재하는 ‘상황’과 코믹한 ‘작은 행위’ 간의 거대한 간극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울 것인가? 다시 말해 작은 형식의 행동과 큰 형식의 상황을 일치시키는 문제이다. 여기서 바로 큰 형식의 감독들이 구사했던 유기적 호흡과는 전혀 다른 키튼 만의 독창적인 ‘기계주의’ 또는 ‘마이너리즘’(minorism)이 나온다.

문제해결의 첫 번째 방식은 인물이 상황 전체 또는 공간 전체를 ‘횡단’하는 방식이다. 로빈슨(David Robinson)이 “탄도-개그”(trajectory gag)라고 명명했던 이 방식은 빠른 편집 기술을 이용한 것이다.(Robinson, Buster Keaton, 28이하) <세 시대>(The Three Ages)에서의 감옥 탈출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물은 창문으로 뛰어들고, 천장으로 기어오르고, 지붕에서 지붕으로 뛰어 다니고, 건물 아래로 떨어지면서 난간에 부딪친다. 인물은 마치 총알이 발사되어 궤도를 그리며 날아가듯이 몸을 날려 공간과 상황 전체를 가로지르거나 주파한다. 물론 채플린이나 로이드의 소극에서도 빠른 추격이나 경주 같은 행동이 마치 도미노처럼 연쇄되어 일어나긴 하지만, 키튼은 “순수하게 연속적인 탄도”를 완성한다.(C1, 175) 예컨대 빠른 편집을 이용해 탄도 이미지를 구성한다―가장 빠른 것은 <카메라맨>(The Cameraman)에 나오는 장면으로 키튼은 애인과 전화 통화 중간에 애인이 말을 하는 동안 수 킬로의 도시를 질주하여 그녀에게 달려간다. 어떤 경우엔 몽타주 없이 순수한 하나의 쇼트 안에서 탄도 이미지를 구성한다―<셜록 주니어>(Sherlock Junior)에서 열차 지붕에서 물탱크 호스 장면으로 이어지는 이미지가 좋은 예이다. 또 어떤 경우엔 인물은 그대로 있고 쇼트를 빠르게 전환해서 탄도 이미지를 구성한다―가장 유명한 것은 <셜록 주니어>에서의 꿈 시퀀스인데, 이 시퀀스에서는 서 있는 인물 뒤에 배경으로 스크린플레이가 돌아가면서 커트된 장면들을 전환시켜 연속적으로 정원, 거리, 낭떠러지, 모래사장, 모래톱, 눈 덮인 벌판을 지나 다시 정원으로 돌아온다.

문제 해결의 두 번째 방식은 “기계개그”(machine gag)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키튼과 기계의 친화적인 관계는 많은 비평가와 주석가들이 인정하는 바이다. 키튼은 초현실주의 보다는 기계 문명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이를 선호했던 “다다이즘”(Dadaism)에 오히려 가깝다고 들뢰즈는 지적한다.(C1, 175) 키튼의 기계에 대한 선호는 채플린과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채플린은 도구를 이용하고 도구주의 경향을 추구했지만 기계는 반대했다. 휴머니즘을 옹호하고 산업사회를 비판하는 채플린 코미디의 핵심에는 인간과 기계의 우스꽝스러운 불화가 자리 잡고 있다. 도구는 인간이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물건을 활용하여 그것을 인간화하는 방식이다. 반면에 기계는 인간을 배제하고 인간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작동하는 과정을 구현한다. 심지어 기계는 인간을 그 자신의 요소로 만들어 버린다. 기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가 훌륭하게 정의 했던 것처럼, 인간을 넘어서 생산의 중심에 서 있는 기계는 채플린의 휴머니즘에는 맞지 않는다―플루서는 도구문명에 관한 탁월한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구의 개념에는 인간이 상수이고 도구는 변수이다.[…] 반면에 기계의 경우, 기계가 상수이고 인간은 변수이다.”(Flusser, The Shape of Things, 45) 그러나 키튼은 언제나 기계 안에 있거나 기계와 함께 공존한다. 인물이 거대한 상황을 극복하거나 싸우거나 적응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기계가 삽입되어 있으며, 심지어 환경 자체가 기계적인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집-기계, 배-기계, 기차-기계, 영화-기계 등”(C1, 175) 물에 떠내려가는 통나무조차 자연물이나 살아남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키튼의 행동을 압도하고 그를 환경 전체와 매개하는 기계처럼 작동한다.

나아가 키튼은 기계와 동맹을 맺고 기계의 일부처럼 공동 작용을 한다. 이 또한 채플린과의 차이라 할 것이다. <모던타임즈>에서 볼 수 있듯이, 채플린이 산업을 비판할 때 사용했던 이미지는 기계의 회전운동 속에서 하나의 부속으로 고착된 인간이었다. 그러나 키튼은 기계의 부속이 아니라 공존하는 가운데 기능적으로 연결된 ‘연접’(conjunction)의 상태에 이른다. 각 부분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전체적으로는 부조리한 형상을 가지는 기계들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있으면서도 인간과 나란히 작동한다. 인간은 기계의 기원이 아니며 기계 역시 인간을 자신 안에 포함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족보도 없고, 전형도 없고, 모델도 없고, 인간이나 유기체의 두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피카비아(Francis Picabia)의 ‘소녀’―<엄마 없이 태어난 소녀>(Fille Née Sans Mère)―처럼 전통적인 형상으로부터 벗어나 우연히 조립된 ‘엄마 없는’ 아상블라주(assemblage)이다. <일주일>(One Week)에 등장하는 조립식 주택은 주거지가 아니라 쓸모없이 서 있는 집-기계이다. 그것은 부속들이 무질서하게 조립되어 서로 아귀가 안 맞고, 일그러진 형상으로 갸우뚱하게 서 있으며, 철로 위에 세워져 지반이 없기 때문에 태풍이 불어오자 소용돌이처럼 회전한다. <허수아비>(The Scarecrow)에서는 그야말로 “엄마 없는 집”(“What is home without a mother?”)이 등장한다. 이 집은 “모든 방들이 하나의 방 안에 있어,” 거실, 부엌, 식당의 모든 기능들이 잠재화되어 있다. 도구들을 잠재적으로 배치하여 그 사용 방식에 따라 식당이 거실이 되고 거실이 침실이 되고 침대가 하수구가 되고 축음기가 스토브가 되고 테이블이 피아노가 된다. 붙박이로 고정되지 않고 마치 ‘시멘트를 바르지 않은 돌담’처럼 엉성하게 걸쳐 있는 가재도구들의 이러한 다중적인 배치는 방의 모든 기능을 뒤섞고 엉키게 하여 하나의 거대한 기하학적 구조와 물리적 인과성의 컬렉션이 되게 한다.

키튼의 기계주의를 지배하는 변별적 형식은 “축약화”(minoring)이다. 들뢰즈가 제시하는 이 축약기능은 다양한 맥락에서 파악된다. 먼저 엔지니어나 숙련자 외에 누구든지 필요에 따라 적응하여 기계 전체를 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수화’(minoritizing)이고, 두뇌로 작용하는 체계의 중심에서부터가 아니라 지엽적인 부분으로부터 체계 전체가 가동된다는 점에서 ‘주변화’(marginalizing)이고, 소규모의 작은 작용을 통해 거대기구나 체계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소형화’(miniaturizing)이다. 요컨대 축약된 형식의 작은 행위가 물리적 인과성을 거쳐 기하학적 거대구조에 상응하는 것이다. 작은 행위와 큰 환경 사이에 벌어진 거대간극이 이 축약기능을 통해 채워지는 과정을 가장 잘 보여준 예는 <항해자>(The Navigator)에 등장하는 거대한 선박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선박의 가공할만한 규모에 비해 그 안에 고립되어 배를 움직여야 할 남녀 커플은 너무도 작고 미비하다. 이들은 배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또 이 커플이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손이 바닥에도 닿지 않는 거대한 냄비 안에 단 두 개의 달걀을 요리해야 하는 상황 역시 행위와 환경 간의 간극이 터무니없이 크다. 이 양적 차이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 여기서 작은 행위와 큰 환경을 연속하게 해주는 기능이 다름 아닌 ‘축약화’이다. 달걀을 삶기 위해 그들은 도르래에 매단 바구니 안에 달걀을 넣고 냄비에 넣어 끓인 후에 도르래를 이용해 다시 꺼낸다. 같은 방식으로 두 커플은 도르래, 전선줄, 지렛대 같은 간략한 기계장치들을 발명하여 거대한 선박을 소규모의 축약된 형태로 전환하고 배 전체를 자신들의 공간으로 만든다. 그런 점에서 키튼의 한계-이미지의 목적은 한계 상황의 굉장한 광경 자체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환경 속에서 벌어지는 ‘축약화 기능’의 기발함에 있으며, 더불어 그로부터 연쇄적으로 도출되는 터무니없는 어떤 상황의 즉흥적인 현존 가능성을 목격하는 인간의 쾌감과 웃음에 있다.

키튼의 영화에서는 환경이나 기계 그 자체가 광대한 모습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독창적인 시스템에 의해 변형되거나 축소되어 광대함이 암시된다. 그러나 축약화는 ‘상징’과 같은 비유적 형식의 암시가 아니다. 예컨대 카프카(Franz Kafka)의 <유형지에서>(In der Strafkolonie)에 등장하는 ‘처벌기계’는 죄목을 몸에 새기는 바늘의 작은 움직임이 광대한 법체계 전체의 폭력을 함축하지만, 여기서의 ‘바늘’과 ‘법체계’는 물리적 인과성에 의한 연결이 아니라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연결에 의한 잠재성의 표현에 불과하다. 따라서 처벌기계의 표현 운동이 법체계 전체를 현실적으로 가동시키거나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키튼의 기계적 과정은 다르다. 키튼의 기계장치들은 물리적 인과성에 의해 현실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은 기계적 체계 전체를 ‘표현’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체계를 현실적으로 ‘운용’하는 문제이다. 손잡이 하나를 돌려 건물과 선박 전체를 실제로 가동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 각각이 작은 요소들을 이용하여 거대한 기계를 필요에 따라 사용하도록, 모두에게 재산이 되도록 기계를 전환시키려는 키튼의 사회 철학적 비전을 반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들뢰즈는 채플린과는 전혀 다른 키튼 만의 고유한 정치적 비전―흔히 채플린과 비교하여 키튼에게 결여된 것으로 치부되는―을 언급하면서, 이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사회주의적 비전’을 구별한다. “하나는 채플린의 공산주의적-휴머니즘(communist-humanist)이고, 다른 하나는 키튼의 무정부주의적-기계주의(anarchistic-machinic)이다.”(C1, 176) 거대기계를 축약화 하여 모든 개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기계를 사용하는 권리를 주장하는 키튼의 생각은 “생산수단의 자율적 공생주의”(convivialism)를 주창하던 일리히(Ivan Illich)에 가깝다. 일리히는 <자율적 공생을 위한 도구>(Tools for Conviviality)에서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생산과정이 도구를 거대기계화, 관료화, 전문화, 소수독점화 함으로써 ‘공중’(public mass)으로부터 생산적 자율성을 박탈하고, 개인들은 단지 도구의 소비자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따라 그는 산업적 독재로부터 거대기계를 사용할 권리를 찾고, “개인의 자율적 효율성을 최대로 하는 방향”으로 도구의 사회적 재구축이 필요하고, “개인에 의해 통제되는 개인의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행사하는 개인의 권리”, 생산의 자율적 공생을 이루기 위해 거대기계의 축약화나 소형화―거대한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퍼스널 컴퓨터가 좋은 예이다―를 주장했다.(Illich, Tools for Conviviality 10-12) 일리히의 비전은 키튼의 소극 속에서 발견된다.

작은 행위와 거대체계의 간극을 채우는 기계적 축약화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 물리적 인과성이다. 사물들은 물리적 인과성에 의해 서로 연결된다. 힘과 운동은 인과적으로 연결된 우회로를 거쳐 다른 사물들로 연장되거나 인과성을 매개로 이질적인 요소들이 서로 만나기도 한다. 재난 자체를 기계의 작동처럼 묘사하는 키튼의 재난 영화들 역시 이러한 기계적 인과성이 지배한다. 바람이 불어 떠내려가던 배가 저택과 충돌하고 저택이 배처럼 떠내려가 폭포에서 떨어지고 집 안에 있던 인물이 폭포수 옆의 통나무에 매달리는 반면 배는 조종석이 줄에 걸려 저택처럼 멈추어 버린다. 이 연쇄들은 특정 목적 없이 단지 인과적 계열들의 조우로 이루어져 전체적으로 보면 사물들 각각은 부조리하게 단절된다. 그의 한계-이미지에서 드러나는 자연과 우주 전체는 ‘부조리한 인과성’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집합체의 실현처럼 보인다. 키튼은 <하이싸인>(The High Sign)에서 ‘인과적 순환과 연쇄’의 모형을 제시한다. 공놀이 사격장에 취직을 위해 주인공은 머리를 써서 총을 쏠 때마다 종이 울리도록 기계 장치를 고안한다. 주인공이 총을 쏘면서 숨겨진 레버를 발로 누르면 줄과 도르래가 작동하여 밖에 있는 뼈를 떨어트리고, 개가 그것을 물기위해 달려들면 개의 목에 달린 끈이 과녁에 연결된 종을 울린다. 레버, 줄, 도르래, 과녁, 목에 달린 끈, 종, 이 요소들은 서로 인과적으로 연결된 동시에 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기능을 보유한 채 서로 단절된다. 이러한 ‘단절적 연쇄’는 다다이스트인 골드버그(Rube Goldberg)의 만화나 탕겔리(Jean Tinguely)의 놀라운 기계장치들―서구사회의 과잉생산을 풍자하기 위한 목적의―을 연상시킨다. 골드버그는 “골드버그 머신”(Goldberg Machine)으로 불리는 장치들을 만화로 그렸는데, 가령 농구공을 바구니에 차 넣는 장화로부터 시작해서 연결된 각종 장치들이 도미노처럼 서로를 건드리고 톱니바퀴처럼 서로 물고 물리는 가운데 마지막엔 편지 한통이 수신자의 바구니에 떨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식이다. 각 단계의 마디를 이루는 요소들은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지 않으며, 하나의 목적을 위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 또한 공통하는 기능이 각 요소들에 분배되어 있지도 않다. 이들은 단지 근접해 있는 다른 요소와 ‘이접’(disjunction)―견고하지 않고 엉성하게 그럭저럭 작동하는 이 연쇄로 인해 키튼의 기계장치는 고양이 한 마리로 인해 모두 망가져 버린다―을 이루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힘과 운동의 방향을 꺾고 각 요소들의 기능을 상호 변조시키면서 연쇄할 뿐이다. 이것은 ‘시멘트를 바르지 않은 돌담’처럼 비유기적이고 단절적이며 분열되어 있는, 즉 ‘기능적 잠재성’이 극대화 된 집단성의 완전한 모델이다.

인간의 보잘 것 없는 작은 행위로 인해 거대한 기하학적 구조물이 작동하거나 거대한 궤도(탄도)가 전개되는 것은 이처럼 순환적 인과성과 그 연쇄 때문이다. 여기서 이 궤도 자체가 바로 기계를 구성하고 기계의 전체 윤곽을 이룬다. 궤도 내의 각 요소들이 서로 연결되는 가운데 인간 역시 그 내부의 한 요소로서 기능한다. 예컨대, 인간은 작은 손잡이 하나를 잡고 기차 전체의 동력 운동 속에 끼인 톱니처럼 돌아가는 것이다. 이로써 키튼의 개그를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두 가지 형태인 “탄도-개그”와 “기계-개그”는 인간이 기계와 공동으로 작용하는 ‘엄마 없는 인간’ 혹은 ‘미래의 인간’을 두 가지 측면에서 보여준다.

이 글은 2015년 <비교문학> 제65집에 수록된 논문의 일부를 수정 발췌함.

채플린과 키튼: 휴머니즘적 도구주의와 무정부주의적 기계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