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오지 않는 바람

되돌아오지 않는 바람

떠나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 만큼 사악하고, 나약하고, 위선적이고, 속물스러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행이란 근본적으로 속물적인데가 있다. 간혹 마음이 변해 되돌아오지 않는 이도 있긴 하지만. 되돌아오는 사람, 고향에 다시 얼굴을 들이미는
사람, 그들을 조심하라!

로렌스(D.H. Lawrence)의 작품 <채털리 부인의 연인>(Lady Chatterly’s
Lover
)에서 코니를 단순한 불륜이나 부도덕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여성성의 회복이나 남성에 대한 주체성 확립과 같이
여성독자들의 파격적인 박수 때문이 아니다. 근원적인 육체성의 긍정 때문도 아니다. 그 보다는 그녀가 완전히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녀는 배신자가 되어 다른 남자의 애를 밴 채 남편과 마주섰다. 그것은 부도덕한 뻔뻔함이 아니라 진지함 혹은 진정함의 발로였던 것이다.
이기적이고 무능해서 기껏해야 여행에 만족하고 마는 겁쟁이 남자들과는 다르게, 되돌아온 그 순간에도 그녀의 삶과 확신은 저편에 있었던 것이고,
앞으로도 결코 되돌아가지 않을 만큼 확고한 것이었다. 코니는 진심이었던 것이다. 마치 “삶의 부활”이 가능해지는 유일한 길을 찾은
사람처럼.

같은 맥락에서 간혹 작가들의 자살이란 위대한 불륜과도 같다. 울프(Virginia Woolf)가 좋은 예이다.
아마도 그것은 진심이나 진정함의 필연적인 절차가 아니었을까? 진심으로 살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자신의 욕망을 믿었던 코니처럼 정치적인(실리추구가
아니라) 사람이되어 머리도 좋아지고 총명해질 뿐만 아니라.

이 만큼 인생에서 역설적인 일도 없다.

진심으로 사는 이들은 시인들이 광기에 차서 내뱉은 횡설수설들, 가령 “세상이 바로 내집이다”라든가, “죽음은
기쁨이다”하는 식의, 정상적인 삶의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그들만의 몽상과도 같은 실재를 깨닫게 된 사람들이다. 코니가 그랬듯이, 집 밖의
삶이 더 아름답다고 믿게 되었다거나, 방안의 물건들이 없어져도 삶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거나, 윤회를 믿게 되었다거나, 바람 속에 우리의
영혼이 있음을 점차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한꺼번에 태워버리듯, 아낌없이 그 흐름 속에 자신의 육신을 내던진다. 울프가 물속으로,
흐름속으로, 바람속으로 들어간 것은 정확히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코니의 불륜처럼, 피츠제럴드의 방탕처럼, … 모두가 물속으로,
대기속으로 흩어져 버린다.

그들이 진정한 글쓰기를 했다면, 그것은 그들이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 바람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최후로,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가기위해.

되돌아오지 않는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