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화선

취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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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의 예술에 관한 영화에는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두 주제가 있는데, <취화선>에는 이 두 주제가 상호보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예술가의 윤리에 관한 문제이다. 예술가는 예술로써 그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한다. 예술가의 한계란 표현할 수 없음에 직면한 상태이며, 나아가 표현할 수 없음은 죽음을 의미한다. 표현 불가능한 것(실존적 사회적 제약으로 인한)을 표현하는 문제는 언제나 예술적 숭고의 테마가 되어 왔다. 가능하지 않은 것을 표현하려는 욕망이 운명적으로 내재한 존재. 그는 표현을 완성함으로써 죽음을 넘어서거나 아니면 죽음을 지연하기 위해 끊임없이 표현을 반복해야만 한다. 장승업의 고뇌를 단순히 개화당과의 불화로 환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고뇌는 근본적으로 예술적인 것이며, 따라서 다른 어떠한 외재적 요인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없는 능력, 예술가의 내재적 능력에 관한 문제이다(“나의 그림은 개화당의 목적과는 다릅니다!”).

이런 점에서 윤리는 상호간의 불화나 결합에 관한 규약으로 환원할 수 없다. 거기에는 반드시 외재적 힘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왜 모든 것은 외적인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이 임권택의 예술영화에서 항상 등장하는 윤리학적 질문이다. 그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외재성의 구도를 이루는 사회-정치적 윤리가 아니라 ‘예술적 윤리’이다. 예술적 윤리에 관한 그의 담론은 한마디로 말해: ‘예술가는 외재적 원인이 아닌 자기 자신의 원인에 의한 능력을 추구한다’이다. 이 능력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는 과정 속에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미학적 전환이라는 두 번째 주제로 나아간다. 천민으로 태어난 장승업은 계급적 조건의 결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데, 이것은 유학 전통과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유생들에 따르면 그림이란 의미를 재현하는 수단이며, 이를 위해 심지어는 화폭에 시를 써넣어야만 한다. 그림에 뜻이 없으면 그림이 아니다. 그림은 유배중인 도연명의 자태 뿐 아니라, 그 쓸쓸함까지도 해석하고 표현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떻게 형상과 의미의 이행 혹은 결합이 가능할 것인가? 유학을 배우지 못한 그에게 그림 속에 文을 넣어 붓으로 뜻을 세우는 문제(의제필선)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계급적 한계가 예술적 한계로 확장되어, 표현 불가능성에 대한 강도 높은 고뇌에 직면할 때, 예술가는 근본적인 미학적 전환을 강요받는다. 이 영화에서 장승업의 위대함이란 유학 전통과의 미학적인 단절에 있다. 그러나 어디에서 단절이 일어나는가?

우선 그에게 있어 사물의 의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형상의 표현은 뜻이 아닌 새로운 방식을 요구한다. 의미를 채우지 않고 사물을 표현하는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 장승업이 질문한 것은: 왜 그림은 외적인 힘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그림 자체의 힘은 없는가? 글과 의미가 없어도 남아 있는 그림 자체의 힘은 없는가? 장승업은 제자들에게 돌맹이를 예로 들어 이 질문에 대한 대답과 아울러 그의 유학 전통과의 단절을 잠깐 보여준다: 예술가는 돌맹이조차도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사물은 의미가 아니라 생명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 의미는 의식의 본질이지 존재의 본질은 아니다. 뜻이 무한히 깃들어 있다고 해서 존재의 숨결이 살아나는것은 아니다. 세계를 뜻의 육화로 파악하는 것은 생명의 외적 형식에 의존하는 방식이며, 이로 인해 존재는 죽은 것, 병든 반복이 된다.

장승업에게 예술가의 윤리는 예술 작품의 윤리로 이행하고, 나아가 존재일반의 윤리로 이행한다. 그는 의식의 본질에서 존재의 본질로, 죽은 존재로부터 살아있는 존재로, 의식의 빛이 아닌 그 자신의 빛에 의한 존재로 이행함으로써 조선 회화의 벡터를 바꾼다. 형상은 질료의 숨결을 부여받는다. 이로써 회화라는 통사론에는 형상들을 하나의 개체로 포착하는 명사뿐만 아니라 형상을 질적으로 다양화하는 형용사나 동사 같은 ‘화용소’(話用素)들로 채워진다. 조선 회화사에서 장승업의 그림이 언제나 생명적인 것과 관계하여 주석이 붙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 <취화선>에서 예술가의 윤리와 미학적 전환이라는 두 주제는 상호보완적으로 지속한다. 바로 이러한 술어들의 지속이다: 자신만의 빛으로 살아있는 예술가; 이를 위해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변신하는 존재; 나아가 자신의 한계로 치닫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 이것은 예술가 자신뿐 아니라, 모든 존재를 살아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존재론적 긍정이 아니면 실현될 수 없는 문제이다. 화덕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이 두 주제와 관련하여 하나의 역설을 낳는다: 예술가는 생명적인 존재이기 위해 자신의 생물학적 한계에 치닫는다. 그 마지막 장면은 ‘장승업은 살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예술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것이 이 영화에서 증명되었어야 할 그의 위대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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