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방학

여름 방학

옷을 갈아입는 바람에 신분증을 놓고 왔다. 지하철을 타기 직전에
알고 있었지만, 다른 선생이 열람실 안에 있겠거니 생각을 하고 그냥 지하철을 타 버렸다. 그러나 평소 같았으면 항상 자리에 있던 선생이 오늘은
나오지 않았다. 불도 꺼져있었고, 문도 잠겨 있었다. 보안설정이 되어 있음을 알리는 파란불 두 개도 문 고리 옆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복도 저편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무슨 대청소를 하는 날이었는지, 교실에 있던 모든 의자와
책상들이 복도로 나와 있었고, 아주머니 몇 명은 이 교실 저 교실에서 덜그럭거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 눈에 띈 그 아주머니는 잠시 나와서
쉬고 있는 듯 했다. 그녀는 양말을 벗은채 앞에 놓인 의자 위에 다리를 올려놓았다. 내가 다가가자, 무슨 일인지 궁금하다는 듯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저, … 401호 연구실이 문이 잠겨 있는데, …”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는 바로 대답을
했다.
“저희는 몰라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아, . . 열 수 없으신가보죠?”
“네 …”
아침에 와 보면
항상 휴지통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마도 착각을 한 것 같았다. 나는 더 할말이 없어,
보안요원을 떠올리며 돌아섰다. 걸어가고 있자니, 다소 멀어진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1층 관리실에 가보세요. 아마 거기서 열어줄
거예요.”
나는 대꾸하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1층 로비에는 흔히 보안요원이나 관리 아저씨가 앉아
있었지만, 지금은 한가한 방학중이어서인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뒤편으로 돌아가 관리실도 가 보았지만, 문이 잠긴채 아무도 없었다. 약간
난감했다. 기다려야 하나? 어딜 간 것일까? 곧 오긴 오는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로비 저 쪽에서 낮익은 얼굴이 보였다.
K교수였다. 나는 잠깐 머뭇거리며, 그녀에게 가서 인사를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녀는 학생처럼 캐쥬얼한 옷차림에 여행가방 같은
보따리를 들고는 문 밖으로 나가려는 듯 했다. 걸어가며 내 쪽을 쳐다본 것 같은데, 나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혹은 다들 그렇듯이, 보았지만 그냥
지나치고 싶었는지도.

수년 전에 잠깐 동안 함께 일을 하게되어 알게 된, 말하자면
선배였다. 일을 하는 동안은 편하게 지냈지만, 그녀가 교수가 된 이후로는 그렇지 못했다.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만나면
서로 오랫 동안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처음엔 4-5분 정도 서로의 근황을 물어보았고, 두 번째는 한 번 놀러오라는 인사만 하고는 바쁘게 지나가
버렸다. 세 번째는 눈 인사만 하고 지나쳤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이상하고도
불합리한 일들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그녀를 마주칠때면 들곤 했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고, 그녀 역시
천천히 문 밖 쪽으로 걸어갔다. 처음엔 그녀가 문 밖으로 나가면, 나도 그냥 돌아서려고 작정했다. 하지만 내 걸음이 좀 더 빨라서인지, 그녀의
걸음이 느려서인지, 이제는 작은 목소리로 부를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뒤에서 부르듯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의외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알아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저야 뭐, 그냥
그렇죠.”
대답을 하는 동안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가 보였다. 목이 둥글게 라운드처리가 된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왼쪽 목 부분에는
악세서리처럼 작은 꼬리표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상표 이름이 영어로 씌여 있었지만, 너무 작아 읽을 수는 없었다. 그 꼬리표는 특별한 이유
없이 달려있는 헝겊 조각이었는데도, 자그마하게 박음질된 영어 문자들과 그 색깔 덕분에, 평범한 티셔츠에 불과한 그녀의 옷을 세련된 그 무엇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것을 잠시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가 말했다.
“어제 잠을 잘 못 주무셨나봐요? 안색이 … ”
간 밤에 잠이
오질 않아 아침까지 뒤척였고, 겨우 점심 때 즈음에 일어나 부랴부랴 나오는 터였다.
“아, 네, 좀 … 티가 많이
나나요?”
“얼굴에 씌여 있네요… . 그래, 요즘엔 어떻게 지내세요?”
언제나 그랬듯이 상냥한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그냥, 뭐, 이것저것 쓰고 있죠.”
“뭘 쓰시고 계세요? 이론에 관한?”
“네, 그냥, 예술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어요… 선생님은 요즘에 어떻게 지내세요?”
나는 말을 돌려 그녀에게 물었다.
“저도 그냥 뭐 …

“방학인데, 어디 안 가세요?”
“글쎄요, . . 어딜 갈 수가 없어요. 애가 이제 중3이 되어서, …”
“아, 네,
. . ”
“애들 대학 보내기가 너무 힘든가봐요?! 지금 중3인데도, 뒷바라지 할 것이 얼마나 많던지 … 도통 다른 일에 신경을
못쓰겠어요.”
그녀는 이제 부조리한 교육의 가장 직접적인 당사자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뭔가 힘을 줄 수 있는 말을 해주어야 겠다고
느꼈다. 그래서였는지 하마터면 대학과 교육제도에 관하여 험담까지 할 뻔 했다. 하지만 흔히 하는 따분한 멘트 말고, 우리 사이에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그럼요, 말로 다 못하죠. 요즘엔 정말로 애들 대학 보내는 부모는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처음엔 호기심을 가지며 듣는 듯 하더니, 금새 그녀의 안색이 약간 바뀌는 것 같았다. 내 말에 동의를 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나 진부한
대답이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생각이 들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다지 흥미로운 대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을지도.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가지지 않은 내가, 그녀의 귀를 솔깃하게 해줄만한 코멘트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잠시라도 더 머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떠나려는 듯 문 밖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대학을 보내는 거야 뭐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닌데, 좋은 대학
보내기가 …”
그리고는 가방을 어깨에 저며 메고는 문 고리를 잡고 서서히 밀기 시작했다.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다고, 또 나중에
보자고, 바빠서 이만, 그럼 잘 지내라는 등등의 메세지를 한꺼번에 담은 눈인사를 하며 그녀는 밖으로 나갔고, 나 역시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다시 로비로 돌아와 관리실을 살폈다. 여전히 사람이 없었다.
살펴보니 로비 데스크 구석에 관리자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곧바로 나는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했다. 음악소리가 몇 초간 들리더니 그가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잠에서 깨어난 듯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누구십니까?”
“네, 저, 401호 문이
잠겨서요.”
“보안카드 없어요?”
“네, 오늘 안 가져왔거든요 …”
그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뭐라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오겠다는 것인지, 전화가 그냥 끊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관리실 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관리실 안 쪽에 또 하나의 방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낮잠을 자고 있었던 듯 싶다. 가끔 로비에서 보았던 관리 아저씨였다. 그는
불만에 싸인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내 쪽으로 걸어 나왔다.
“카드 가지고 다니세요.”
그는 나즈막히, 그러나 짜증이 섞인 투로
말했다.
“네, 죄송합니다.”
나는 짧게 대답을 하며 그를 따랐다. 어깨를 앞으로 많이 굽힌 50대 중년이었다. 아직도 잠에서 덜
깨어서인지, 오른쪽 손으로 신경질적으로 세차게 귀를 긁어가며 앞서가고 있었다. 나는 뒤를 따르며 붉게 물든 그의 목덜미와 주름을 보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그는 잠에서 깨어나 정신이 맑아진 것 같았다. 무엇때문인지 방금 전과는 기분이 달라보였다. 심지어 그는 작게
휘파람까지 불며, 이쪽으로 탈까? 저쪽으로 탈까? 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거울처럼 반사가 되어,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각자 벽을 바라보며 눈을 부딛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4층까지는
꽤 긴 시간이었다.

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일어섰다. 캐비넷에 있는
컴퓨터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방을 나와 의자들이 널부러져 있는 복도를 걸어갔다. 캐비넷은 복도 끝에 있었고, 거기까지 가는 동안 교실에서
바쁘게 손 발을 놀리며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보였다. 내가 캐비넷을 열자마자 한 아주머니가 복도에 나와 나를 쳐다 보았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나는 컴퓨터를 빼 내어 손에 들고, 그녀가 가는 길을 따라 뒤에서 걷고 있었다. 곧 다른 아주머니가 교실에서
나와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복도에 있는 의자들 때문에 우리는 한 줄로 나란히 걸어야 했다. 그녀는 걸어가며 내 앞에 있는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그 불 언니 혼자 달수 있겠어? 언니?”
그녀의 말은 누구나 사용하는 평범한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앞에 가는 언니를
배려해주는 따뜻한 말이었지만, 크게 떠벌리는 듯한 목소리의 톤과, 째지는 듯한 말씨와 어조는 이상하게도 천박함이 배어있었다. 그녀는 “언니”라는
단어를 유난히 반복해서 발음함으로써, 그 언니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고 싶어 하는 듯 했다. 그러자 이에 화답하듯, 내 앞의 아주머니가
말했다.
“응, 괜찮아, 내가 충분히 달 수 있어.”
언니의 대답 역시 아우의 걱정에 고마워하듯 따뜻한 말투를 자아내려는 듯 했다.
동료간의 우애를 보여주는, 그러나 약간은 과장된 그들의 그 짧은 대화는, 그들이 사력을 다해 힘겹게 끌고 가고 있는 수레처럼 느껴졌다. 한 번도
타 보지 못해 어색한, 아니 올라타기 위해 또 하나의 일을 해야하는 수레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이상의 다른 것을 바라고 있지는 않아
보였다. 뒤에서 오던 아주머니가 물었다.
“그럼, 고기는 내가 가져갈까?”
“응, 그려, 고기하고, 술 두병하고
가져가.”
“비닐에 싸야지?”
“아니, 싸지 말고 그냥 가져가도 돼.”
“그래, 알았어, 빨리와.”
그들은 일을 빨리
끝내고 파티라도 할 참인듯 했다. 아마도 언니는 마무리 일을 하러 가는 중이었고, 아우는 파티 준비를 위해 어딘가로 삼겹살 몇 점과 소주를 나를
것이다. 조용 하면서도 날렵한 걸음걸이로 각자가 할 일을 절도있게 분담하고 있는 모습이 대단히 진지해보였다. 큰 소리로 나눈 대화였지만, 마치
귀속말을 주고받으며, 아무도 모르게 군침도는 세기의 밀회라도 즐길 분위기였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를 연결하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알 수
없는 전율이 감돌았다.

여름 방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