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적 공존을 위한 도구

자율적 공존을 위한 도구

1US-1713-B1977 -------------------- D: -------------------- Ivan Illich / Foto Duesseldorf 1977 Illich, Ivan; amerik.Kulturphilosoph u. Sozialreformer oesterr.Herkunft; Wien 4.9.1926 - Bremen 3.12.2002. - In Duesseldorf, 24.Februar 1977: Ivan Illich waehrend der Podiumsdiskussion "Meinung gegen Meinung - Brauchen wir noch ElitenÈ". - Foto.

정치적인 문제를 도구의 배치, 사용, 분배 등의 문제로 기능화시킨 이반 일리히(Ivan Illich)의 책 Tools for Conviviality 중에서 한 구절을 옮겨보았다. 내 생각에 인문학의 미래는 기능주의의 확대 재편 양상에 달려있다. 인문학은 더 이상 삶의 해석이 아니라 삶의 구성을 고민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일리히의 급진적인 기능주의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책의 원본을 가지고 있지 않고, 우리말 번역본만 있기 때문에, 번역본의 구절을 그대로 옮겼다. 한 가지 일러두고 싶은 것은, 번역자가 이 책의 핵심적인 용어인 conviviality를 “절제”로 옮겨 많은 부분에서 일리히의 글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conviviality는 말 그대로 공생, 상생, 공존, 함께 즐기기, 등의 사회적 개념을 가진다. 산업사회의 타율적 생산체계를 비판하는 일리히의 의도를 감안하여 conviviality를 “자율적 공존”이나 “자율적 공생” 정도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역자는 conviviality의 이 같은 뜻을 다소 억지스럽고 복잡한 이유를 들어 무시해버리고, 이 자율적 공존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행위윤리에 해당되는 용어인 “절제”를 conviviality의 번역어로 써버린 것이다. 이것은 마치 “행복”을 “웃음”으로 번역하듯이, 개념이나 용어를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여 균형감을 상실하고 그 함의된 의미를 그 용어의 명시적 의미와 혼동한 결과이다. 물론 제목을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본문 내용에서 공존이나 공생이라는 단어를 써야할 곳에 절제라는 단어를 써서 생기는 문제를 감안한다면, 오역으로 인해 원저작을 오염시켰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따라서 아래 옮긴 글은 인용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인용문 그대로 “절제”라고 옮겼지만, 독자들께서는 이 단어가 conviviality라는 점을 감안하여 맥락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이동과 거주를 위해 도구를 필요로 한다. 질병에 걸리면 치료를 필요로 하고 서로 교류하기 위한 수단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 수 없다. 그들은 문화마다 상이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의존한다. 어떤 사람들은 식량의 공급에 의존하고 다른 사람들은 볼베어링의 공급에 의존한다.

사람들은 물건을 얻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들이 살 수 있도록 하는 물건을 만들 자유, 자신의 취향에 따라 그 물건에 형태를 부여할 자유, 타인을 위하고 그를 보살피는 데 그 물건을 사용하는 자유를 필요로 한다. 부유한 나라의 죄수는 그들의 가족보다도 더 많은 물건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으나, 물건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고,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결정할 수 없다. 그들의 형벌은 내가 ‘절제’라고 부르는 것을 박탈당한 것이다. 그들은 단순한 소비자의 지위로 격하되어 있다.

산업주의적 생산성과는 반대되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나는 ‘절제’라는 말을 선택한다. 나는 그 말에 사람들 사이, 그리고 사람과 환경사이의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교류하는 의미를 부여한다. 나아가 타인과 인공적 환경에 의해 강요된 수요에 대한 각자의 조건반사와는 반대되는 의미를 부여한다. 절제란 개인의 자유가 인간적 상호의존속에 실현되는 것이고, 또 그러한 것으로서 고유한 윤리적 가치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사회에서도 절제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짐에 따라, 산업주의 생산양식이 아무리 증대되어도 그것이 사회구성원 사이에서 창조하는 필요를 유효하게 만족할 수 없게 된다고 믿는다.

현재의 제도가 갖는 목적은 절제의 유효성을 희생하여 산업주의의 생산성을 숭상하는 것으로, 이는 현대사회를 변들게 하는 개성상실과 의미상실의 중요한 요인이다. 생산물에 대한 수요의 증대는 사회과정을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이 사회의 추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방법, 현대의 과학과 기술이 전례 없이 효율적으로 인간활동에 부여되도록 사용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렇나 역전이 실현된다면, 모든 사람에게 거의 평등하게 배분되는 하나의 자원을 보호하고 최대한 이용하고 향수하는 것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생활방식과 정치체계의 진화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 자원이란 개인에 의해 통제되는 개인의 에너지다. 자신의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행사하는 개인의 권리를 없애거나 무시하는 도구나 제도에 대한 공중의 통제 없이, 우리는 더 이상 유효하게 살 수도, 일할 수도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회의 도구에 대한 통제가, 전문가의 결정이 아니라, 정치적 과정에 의해 확립되고 실현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절차를 우리는 필요로 한다.” (이반 일리히,『절제의 사회』(Tools for Conviviality), 서울, 생각의 나무, 2010. 36~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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