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비판

창조적 비판

March_on_Washington_for_Jobs_and_Freedom,_Martin_Luther_King,_Jr._and_Joachim_Prinz_1963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이 인종차별에 대한 비폭력 저항운동을 시작하게 된 직접적 동기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Montgomery Bus Boycott Movement)이었다. 이 운동을 그가 처음부터 주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사건의 당사자인 로자 파크(Rosa Parks)와 그의 많은 동료들은 흑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깨어 있는 의식의 소유자들(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백인 개혁가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이었기 때문에, 보이콧 운동은 이미 이들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킹은 여기에 합세하여 이들의 비폭력 운동을 미 전역에 퍼뜨린 메신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는 이 운동을 계기로 하여 투쟁 활동 과정과 비폭력 저항의 중요성에 대해 <자유를 향한 행진>(Stride Toward Freedom, 1958)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기록한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성장 환경, 학습, 독서 노트 등과 아울러 몽고메리 운동에서 지켰던 비폭력 저항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정리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비폭력 저항”(Nonviolent Resistance)은 간디의 그것을 받아들여 자기 식으로 정리한 것으로, 이 책에서 그는 비폭력 저항이 폭력적 저항보다 우월한 여러 이유들을 해명한다. 

그가 제시한 바, 비폭력 저항이 우월한 여러 이유들이 있다.(Martin Luther King, Jr. Stride Toward Freedom: The   Montgomery Story.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58. pp. 102-107.) 가령, 비폭력은 악한에게 그가 틀렸다는 것을 설득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에, 수동적인 저항이 아니라 능동적인 저항이다. 또 비폭력은 상대를 누르거나 모욕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도덕적 수치감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대립하는 양자 모두를 구원하고 화해시킨다. 따라서 물리적 폭력이 공동체를 파괴한다면 비폭력 저항은 공동체의 창조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비폭력 저항은 폭력적 저항보다도 더 실용적이며 효율적이다. 왜냐하면 동조자가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실제로 그를 지지하는 많은 백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비폭력 저항은 복수로 되돌려줌이 없이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든가, 물리적 폭력 뿐 아니라 내적인 정신적 폭력을 피하기 위해 증오가 아니라 사랑에 기반한 저항이라는 등등, 여러 인도주의적 종교적 이유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목을 끄는 비폭력 저항의 의미는 그것이 ‘적을 규정하는 방식’에 있다 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비폭력 저항이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악행 그 자체’이다. 우리의 적은 관념과 행위로서의 ‘악’이지 악의 ‘희생양’이 된 어떤 사람이 아니다. 킹은 가해자 조차 악의 희생양이라고 보았다. 만일에 인종문제에 저항을 한다면, 거기서 기본적인 갈등 관계는 인종의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몽고메리 사태에서의 갈등은 백인과 흑인간의 갈등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정의(justice)와 비정의(injustice) 간의 갈등, 빛의 힘과 어둠의 힘의 갈등이다. 문제는 혐오스러운자가 아니라 혐오 그 자체이며, 백인이 아니라 관념과 행위로서의 차별 그 자체이다. 폭력은 ‘백인’이나 ‘혐오스러운자’를 죽일 수는 있지만, ‘차별’과 ‘혐오’ 그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물리적 폭력은 오히려 차별과 혐오를 증식시킬 뿐이다. 따라서 폭력적 저항에 의한 승리는 단지 수만명 흑인만의 승리일 뿐이지만, 비폭력 저항에 의한 승리는 흑인만의 승리가 아니라 정의 그 자체의 승리이며 빛의 승리이다. 문제의 본질과 피상을 혼동함으로써, 적의 실체를 읽지 못함으로써, 즉 그릇된 문제 제기로 인해 그 해답 역시 그릇된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것, 이것이 폭력적 저항에 대한 킹의 비판이었다.(흔히 킹은 당시 미국의 이슬람 수니파와 관련이 있었던 말콤-X의 급진적 저항운동과 비교되곤 했다) 물론 킹의 주장은 정교한 이론이 아니며 논쟁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방식의 문제를 숙고하게 한다.

어떤 점에서 인간은 관념과 행위의 숙주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숙주들이다. 그러나 무엇을 배태한 숙주가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숙주는 아니다. 나쁜 것을 대놓고 지적해서 양자 모두가 슬퍼지기 보다는 좋은 것을 찾아내고 발명하여 그 가치를 보여줌으로써, 나쁜 것이 무색해지도록, 모두를 견인하는 방식의 비판이 필요하다. 킹이 주장이 암시하듯이, 숙주 몇 몇 없애는 것이 대안일 수는 없다. 새로운 정치적 비판은 ‘이항적'(binomial) 대응이 아니라 창조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대응은 잘해야 비판적 기능에 머물 뿐이지만, 창조적 비판은 이미 비판을 포함할 뿐 아니라 비판을 넘어서는 뭔가가 있다.

 

창조적 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