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탈-이미지와 돈

크리스탈-이미지와 돈

자기를 반성하는 제스쳐처럼 보이는 ‘영화 속의 영화나 영화 제작’이라는 자기반영 이미지에 새롭고 특이한 깊이를 부여해주는 근거는 무엇일까? 이를 정당화해 줄 근거가 없다면 그것은 단지 부차적인 방법이나 형식주의적 유희에 머물고 말 것이다. 영화 제작의 불가능을 그린 벤더스의 <사물의 상태>(Der Stand der Dinge)에서는 마치 영화가 자신의 죽음을 인식한 것처럼 우울한 자조에 빠져 헤겔식의 반성을 하고 있는 감독이 등장한다. 제작비가 끊겨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게 된 허버트는 빚에 쫒겨 잠적해 있었던 제작자에게 찾아간다. 제작자는 투자자들이 원하는 것은 삶이 아니라 ‘스토리’라며 돈벌이가 되지 않는 영화 제작의 불투명한 현실을 전해준다. 그리고 허버트에게 스토리 없는 흑백 영화 말고 스토리 있는 컬러 영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허버트는 더 이상 삶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남아 있는 스토리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고다르의 몇 몇 영화에서도 발견되는 이러한 자조적 반성은 미국과 헐리웃의 난입으로 위기에 직면한 유럽의 영화 예술—고다르의 <경멸>(Le Mépris)에서는 이것을 아내를 빼앗기는 굴욕으로 희화화 한다—의 현실을 환기하면서, 거울-이미지의 현실적 발생 배경이 되고 있다. 즉 스토리의 고갈에 직면한 영화는 이제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을 수 밖에 없으며, 자신의 이야기 외에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허버트는 제작 비용 문제로 촬영이 중단되어 할 일이 없어진 스텝들을 모아 놓고 “이제 영화를 반성하고 검토할 시간”이라고 토로한다. 현대 영화에 특유한 이 ‘영화 속의 영화’란 결국 자신의 상황을 반성하기 위한 거울-이미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거울-이미지가 단지 우울한 반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정당화해 줄 주제와 근거 또한 발견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영화의 종말이나 예술의 고갈이 아니라 오히려 “특별한 이미지를 창조할 수 있는 수단”이다.(Deleuze, Cinema 2, 76; 이하 C2) 영화는 자신의 불가능성을 반영하는 크리스탈-이미지를 통해 그 자신의 내부의 적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햄릿의 거울-이미지가 자신의 상황을 반추하려는 철학적 의지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현실에 드리워진 힘의 배후로서의 ‘음모’와 ‘계략’을 거울-이미지의 식별불가능성을 이용해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던 것처럼, 영화는 자신이 제작되는 과정과 자신 안에 품고 있는 배아를 반사해서 비춤으로써, 바로 영화를 지탱하고 있는 필수 불가결한 ‘적’으로서, 그 자신의 내부로부터 자신을 조건 짓는 항구적인 계략 즉 돈의 음모와의 관계 속에서 존속하는 현실을 드러낸다. 사실 음모는 거울-이미지의 친숙하고도 필수적인 주제라 할 수 있다. 영화 뿐만 아니라 <햄릿>과 같은 연극 속의 연극, 지드의 <사전꾼들>과 같은 소설 속의 소설은 감시하고, 조사하고, 복수하고, 음모를 꾸미는 플롯과 관련이 깊으며, 거울-이미지의 조건인 식별불가능성을 이용하여, 드러내려는 것을 감추고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의 형식적 절차의 하나인 “기계적 복제”라는 벤야민(Walter Benjamin) 식의 반성은 상업과 산업으로서의 예술을 설명하는데 있어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영화(예술)가 돈과 맺는 그 내면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C2, 77) 구매자를 필요로 하는 한 그리고 제작비용을 댈 물주를 필요로 하는 한, 영화 뿐 아니라 예술은 제작의 과정 내에 그 목적과는 반대의 에너지를 요구하는 반테제를 배아로서 품지 않을 수 없으며, 자신의 적을 자신의 형성 과정으로서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벤더스의 <사물의 상태>, 펠리니의 <8과 1/2>, 그리고 고다르의 <열정>(Passion)과 <경멸>에서 우리가 목도하게 될 영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돈의 음모이다. 그 배아는 항상 예술을 좌절하게 하고, 실패하게 하고, 예술의 이상을 실현 불가능하게 하며, 마피아처럼 보이지 않는 검은 장막에 은폐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로서의 영화는 자신의 적인 돈과 함께 이면을 이루며 공존한다. 이것이 바로 <경멸>에서 자신의 아내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된 ‘시나리오-극작가’가 처한 상황이다. <사물의 상태>의 마지막에 제작자는 보이지 않는 마피아의 총에 맞아 쓰러진다. 그러자 감독은 실제의 총과 구별할 수 없이 흡사하게 생긴 촬영 카메라를 들고는 보이지 않는 마피아를 향해 이리저리 카메라를 겨눈다. 이것이야 말로 모든 예술이 자신의 전제인 돈과 맺는 실제와 가상의 크리스탈-이미지이다. 영화가 자신의 현실적 전제를 반영하려는 노력속에서 영화는 돈과 식별불가능해진다. 고다르는 <경멸>의 첫 장면에서 ‘영화가 현실을 보는 창’이어야 한다는 바쟁(Andre’ Bazin)의 경구를 인용하면서, 촬영 중인 카메라와 그 카메라를 바라보는 카메라(관객의 눈)를 서로 마주보게 하여 카메라와 현실의 유착된 적대를 보여준다. 또한 사양 산업이 되어버린 유럽의 영화계를 지배하기 위해, 마치 선봉장이 되어 되돌아온 듯한 다름 아닌 바로 ‘프리츠 랑'(Fritz Lang)—외눈 안경을 쓴 그의 얼굴 모습 자체가 크리스탈-이미지처럼 보이는—에게 감독을 맡긴 ‘정복자 율리시스’에 관한 영화의 투자자로 나선 미국인은 실제인지 가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거만하고도 과장된 제스쳐로 자기 스스로 율리시스의 거울-이미지가 된다. 마찬가지로 고다르의 <열정>에서는 빚에 쫓기어 직공들의 월급을 떼어먹는 업주와 제작 비용에 쫒기어 배우들을 닥달하는 영화감독이 거울-이미지로 등장하는데, 이들의 식별불가능한 공존 안에서 노예 역할 엑스트라와 여직공의 상호 반영, 주연 여배우와 업주 부인의 상호 반영, 고대와 현대의 추격전—해고된 여직공의 난입으로 아수라장이 된 공장에서의 경찰과 여직공의 추격전 그리고 드보르작(Antonin Dvorak)의 의기양양한 피아노 콘체르토에 맞추어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의 <콘스탄티노플의 정복>(Conquest of Constantinople)을 스튜디오에서 시각적으로 재현한 노예 추격전—의 상호반영, 토대와 상부구조 또는 노동과 예술의 상호반영,(프레데릭 제이미슨은 <열정>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상호 반영을 대칭과 대립의 구도로 이해하면서 이를 변증법적 모순으로 설명하고 싶어하는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그의 책 <지정학적 미학>, 275를 참고하라.) 그리고 감독과 여직공이 침실 안에서 실제로 섹스를 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영화를 찍기 위한 가상의 성적인 제스쳐인지 식별이 불가능한 상호 반영이 존재한다. 돈은 바로 이 모든 크리스탈-이미지의 배후 또는 배아이다.

“일분 동안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하루 온종일 걸리는 집단 작업의 비용이 든다는 영화의 혹독한 법칙에 대한 대답은 오로지 펠리니의 대답 외에는 없을 것이다: 더 이상 남아 있는 돈이 없을 때, 영화는 끝날 것이다. 돈은 영화가 보여주고 자리를 잡는 모든 이미지들의 이면이다. 따라서 돈에 관한 영화는 이미, 암시적일지라도, 영화 속의 영화이며, 영화에 관한 영화이다.”(C2, 76)

따라서 시간은 돈이다. 또는 다른 관점에서 시간은 소모이자 비용이다. 시간이 갈수록 비용이 쌓이고, 무엇인가를 소비해야하고, 무엇인가가 자꾸만 닳아없어지고, 점점 새로워지는 가운데 적응에 필요한 노력이 요구되고, 먹어야 하며, 심신이 지쳐가고 힘들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시간은 비용과 소비를 먹고사는 예술의 관점에서는 축복이지만, 그들과 전쟁을 벌이는 자본의 관점에서는 저주이다. 그러나 실상은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자본과 예술이 유착되어 크리스탈-이미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시간은 어느 쪽에게든 저주이다.

들뢰즈는 소모의 관점이든 새로운 것의 창조의 관점이든 시간을 “불균등한 변화”(unequal change)이자 “비대칭적 교환”(dissymmetrical exchange)이라고 규정하면서 마르크스(Karl Marx)의 자본의 순환과 가치증식에 관한 이론을 인용한다.(C2, 77) 교환의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가 생산요소와 상품으로 형태 변이하여 다시 화폐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자본의 순환’이라고 한다. 이 순환은 ‘유통 과정’과 ‘생산 과정’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마르크스에 따르면, 잉여가치는 상품들의 등가적인 교환이 일어나는 ‘유통과정’에서는 발생하지 않고, ‘잉여노동’과 ‘잉여생산’이 일어나는 ‘생산과정’에서 발생한다. 요컨대, 화폐 소유자는 유통시장에서 상품으로서의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입하여 특정한 상품을 생산하는데, 이 노동-생산 과정에서 노동력의 가치(필요 노동, 임금)보다 더 많은 노동(잉여노동)을 노동자에게 강제하거나 ‘속임’으로써, 잉여 생산물의 형태로 생산력과 화폐의 가치를 증식시킨다. 잉여가치 즉 이윤은 ‘불평등하고 비대칭적인 교환’ 또는 ‘불균등 변화’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다.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가능할 것이다: 노동시간의 연장, 생산 테크놀로지의 고도화를 통한 필요노동의 축소와 생산성 향상, 임금과 같은 비용과 소모의 최소화, 노동의 집약도와 노동 강도의 강화를 통한 효율성의 증대 등등. 이 모든 속임수와 거짓된 교환들은 ‘시간’의 견지에서 제기된 문제들이며, 결국 시간과의 싸움으로 귀결된다. 생산된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 투입한 자본에 덧붙여진 잉여가치를 포함하며, 잉여가치로의 전환을 방해하면서도 동시에 확립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그 투명성(또는 식별불가능성)으로 인해 ‘거짓된 운동’이 가능해진 시간 안에서 모든 교환은 비대칭적이며 불균등한 음모로 작동한다. 운동은 등가적인 교환이며, 교환하는 항들의 대칭을 불변적인 요소로 유지하지만, 시간은 본질적으로 비대칭적이고 불균등한 변화이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이미지들의 무차별적이고 균등한 항상적 운동 즉 운동-이미지이지만, 시간의 질서 속에서 영화는 사악하고 거짓되며 비대칭적인 회로에 사로잡힌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상품으로서의 이미지와 그 대응물인 돈의 불균등한 교환이 그것이다: 이미지를 줄테니 돈을 달라! 따라서 영화는 자신을 사유하고, 자신을 대상 소재로 던져 자신에 관한 영화—제작이 불가능한 영화에 관한 영화—로서의 크리스탈-이미지를 만드는 순간 자신의 가장 현실적인 전제인 돈과 직접 마주하게 되고, 이로써 운동으로서의 이미지는 시간으로서의 이미지로 자리를 바꾼다: “영화는 운동이다. 그러나 영화 속의 영화는 돈이며, 시간이다.”(C2, 77) 고다르가 <경멸>의 첫 시퀀스에서 카메라를 마주보게 했던 것은 카메라가 바로 자기 자신의 경멸스러운 이면을 바라본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예술로서의 이미지를 육화하는 것은 돈이다. 투명한 것으로서의 가상적 이미지들은 그 자신을 육화하는 불투명한 현실인 돈과 식별불가능한 두 항으로 유착되어 서로를 마주보고 밀거나 당기며 팽이처럼 돌아간다. 이 회전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것은 두 항의 불균형과 비대칭적 교환이다. 이미지는 돈과 불균형을 이루고, 이 불균형을 끊임없이 영화가 자신의 내재적 모순 속에서 회전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벤더스가 <사물의 상태>의 마지막에 보여준 총과 카메라의 대면은 총격을 받은 카메라의 종말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이 불균형적이고 불공정한 교환을 통해 새로운 회전(순환)의 도래를 예고한 것이라 할 수는 없을까?

<씨네마톨로지>(근간)에서 일부를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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