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손 웰즈의 심도화면

오손 웰즈의 심도화면

직접적인 시간-이미지의 훌륭한 예로 웰즈(Orson Welles)의 “심도화면”(depth of field)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웰즈의 심도화면은 평면적인 이미지들을 연결하는 방식을 거부하고 하나의 이미지 안에 공간적 깊이를 부여함으로써 그 깊이 안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시간화 하는 방식이다. 한 인물이 화면의 전경에서 복도를 한동안 가로질러 저편 깊숙한 곳에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간다. 그가 문을 열자 그 방에서 새어 나오는 빛에 의해 그의 그림자가 이쪽 편의 전경까지 길게 드리운다. 비현실적으로 보일만큼 깊은 공간을 제시하는 이 쇼트는 〈시민 케인〉(Citizen Cane)에서 케인이 자신의 친구와 결별하기 위해 신문사 사무실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그가 사무실 안으로 걸어가는 동안 전경에서는 그의 부하 직원들끼리 ‘몇 년 동안’ 둘 사이가 나빠졌음을 쑤군댄다. 〈아카딘씨〉(Mr. Arkadin)의 첫 장면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는 동안 한 남자가 멀리 보이는 골목에서 전경의 안뜰 쪽으로 서서히 출현한다. 이 쇼트는 살인사건에 연루된 주인공이 어떤 남자를 찾아 건물로 들어오는 장면인데, 그는 남자에게 과거의 살인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장면들은 비교적 긴 하나의 쇼트 즉 쁠랑세캉스로 제시된다.

앙드레 바쟁은 1910년대에 만들어진 고전적 쇼트들과 웰즈나 와일러(William Wyler)의 현대적 쇼트들의 공간적 깊이를 비교하면서, 양자 모두 쁠랑세캉스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적 쇼트의 화면구성은 연극무대에서는 가상적으로만 존재하고 실제로는 빠져있는 “제4의 벽”(fourth wall)을 대신하는 역할을 할 뿐인데 반해, 후자의 화면구성은 무대장치, 조명, 카메라 앵글 등이 전자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후자의 작업에서는 연출가든 카메라맨이든 장면 안에 있는 모든 세부사항들을 마치 체스판을 채우듯이 엄밀한 설계 하에 스크린을 구성한다. ‘공간적 깊이의 데쿠파주’는 입체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무대 장치나 카메라 초점 등을 철저한 계획 하에 잡는다. 이것은 고전영화의 연극무대 같은 화면구성처럼 단순히 자연적 지각을 복사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나 극적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평면을 입체화하고, 공간 자체를 몽타주하고, 2차원을 3차원으로 복잡화하는 절차이다. 요컨대 운동을 찍고 그 평면적 운동-이미지 단편들을 시간적 연속으로 이어붙여 지속의 효과를 내던 종래의 방식을 전복시켜, 먼저 쇼트 내에 지속을 상정하고 인물의 행동, 사물, 조명, 그 밖의 모든 영화소들을 이 지속 안에 배치했던 것이다. 여기서 시간은 운동의 언어적 통사규칙에 따라 구성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시간 안에 운동이 배치된다. ‘종속된 것은 시간이 아니라 바로 운동 자신’이다. 이런 이유에서 들뢰즈는 앞서 예로 들었던 케인의 움직임이 현실적인 공간 안에서의 단편적인 위치 이동이 아니라 시간 속을 걷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화면 깊숙히 저편에서 등장하는 아카딘의 하수인은 단순히 다른 지점에서 건물 뜰 안으로 장소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과거로 데려가기 위해 과거로부터 현재 쪽으로 빠져나오는 중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 이미지들은 회상 속에서 일어나는 심도 저편의 아득한 과거의 이미지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물론 이 두 쇼트 모두는 그 이전과 이후에 등장하는 회상과 연관된 쇼트와 연결되어 있다. 〈시민케인〉에서 케인이 결별을 하기 위해 걸어갔던 그 장면은 나중에 그 친구인 릴랜드의 회상이었던 것으로 밝혀진다. 또 〈아카딘씨〉에서 건물로 들어온 그 남자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한 남자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회상에 빠진다. 모두가 회상의 내용이거나 회상을 준비하는 예비적 절차로서 몽타주의 요소이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몽타주로 연결된 전-후의 쇼트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의 직접적 현시가 쇼트 자체의 실질적인 지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깊이로 이루어진 이 심도화면 안에서 인물들이 걸어서 들어가거나 나오는 공간적인 이동 행위가 짊어지고 다니는 어떤 심연, 또는 그 행위들을 포함하고 그 행위들 사이에 배어 있는 실재로서의 지속이다.

심도화면에서의 지각은 행동-이미지를 지배하는 행동지향적 지각을 벗어난다. 심도화면은 현재 임박한 상황에 대한 반응-행동을 넘어 기억의 지층을 탐색하는 주관성 내부로 침잠한다. 즉 우리는 지각 대상을 해석하기 위해 즉자적 반응을 유보하고 주의 집중과 아울러 우리 내부의 ‘원뿔’ 한복판으로 내려가 시간의 다양한 지층들을 더듬어가야만 한다. 따라서 심도화면의 이미지가 현시하는 것은 더 이상 행동을 구체화할 감각-운동적 대상이 아니라 읽고 해석할 것을 강요하는 잠재적 실재이다. 아울러 지각은 특정 대상을 포착하고 행동을 준비하는 계열에서 벗어나 독해와 회상과 사유의 계열로 후퇴한다. 여기서 시간은 운동에 종속되기를 그치고 운동으로부터 빠져나가 오히려 운동을 자신 안에 가두고 종속시킨다. 시민케인에서 지배적인 몽타주의 운동은 운동이 시간으로 전화되는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선 케인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미디어 언론의 공허한 운동처럼 설정된 쇼트들이 운동-도식에 실려 삽화들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그러다가 쇼트는 마치 고독에 짓눌려 잦아들듯이 갑자기 심도화면의 느리고도 깊은 침묵에 사로잡힌다. 운동에 갇혔던 시간이 빠져나가 버렸거나, 반대로 깊게 패인 시간의 웅덩이 속에 운동이 고여 버린 것이다. 이제 심도화면은 운동 때문에 놓쳐버렸던 시간 전체가 다양한 지층들의 깊이에 따라 고여있던 그 공존의 실상을 드러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웰즈의 〈시민케인〉은 하나의 완벽한 베르그송적인 원뿔 이미지를 구현한다. 케인의 죽음이 현재의 첨점에 이른 원뿔의 꼭짓점이라면,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친구들이 더듬어가는 서로 다른 각각의 다양한 기억은 이 꼭짓점과 대립하는 원뿔의 무한한 지층들의 깊이에 해당한다. 지층들의 탐색은 과거 깊숙이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로즈버드’(rosebud)에 까지 내려갈 것이다. 친구들의 탐색은 해석의 깊이에 상응하는 심도화면을 구성한다. 여기서 심도는 몽타주에 의해 정상적인 시간을 보여주는 감각-운동적 일상의 깊이가 아니다. 또한 원근법이 지배하는 현실적 공간의 재현적인 깊이도, 화면 내부에 지시-기능으로 설정된 허구적 공간의 깊이도 아니다. 심도는 시간의 지층들로 복합된 기억들 속에서 과장되고 왜곡된, 이미지 자체의 비재현적인 깊이이며, 먼 곳에서 다가오거나 먼 곳으로 나아가는 존재를 인지하기 위해 깊숙한 지층 안으로 또는 지층으로부터 그 존재의 지각에 빛이 드리운 그림자처럼 늘이거나 줄이는 ‘바로크적인 깊이’이다. 웰즈에게 심도화면은 동질적 공간성에 기반을 둔 리얼리즘적 ‘재현’에서 이질적 지층들로 엉킨 시간성을 ‘표현’하는 표현주의적 개념으로의 전화를 의미한다.

요컨대 웰즈의 시민케인에는 세 차원의 중첩된 몽타주가 존재한다. 하나는 작은 지류들을 머금은 거대한 웅덩이처럼 간간히 등장하는 깊은 심도의 롱테이크와 아울러 현재 진행 중인 이야기들의 짧은 몽타주들의 연쇄이고, 다른 하나는 인물들의 각 인터뷰로 진행되는 서로 이질적인 과거 지층들 간의 몽타주이다. 마지막으로 각 과거의 지층들과 그 지층들을 현재로 응축시키는 하나의 첨점으로서의 케인의 죽음 간의 몽타주이다.

이 글은 〈영화증후론〉(Cinematology)의 한 구절을 발췌함.

 

오손 웰즈의 심도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