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 개인, 그리고 사회

질병, 개인, 그리고 사회

스피노자(Baruch Spinoza)는 죽음을 이렇게 정의했다: 물질의 변화와 이동에 관한 관념적 이미지. 또는 물질의 변화와 이동에 대하여 다른 물질이 내적으로 소유한 그 변화에 대한 관념. 나아가 죽음이란 윤리적이거나 심리적인 문제이다.

질병은 우리 자신의 물적 상태를 반복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신체의 부분들 간에 일어나는 구체적인 움직임에 따라, 평소에는 없었던 주의력을 자신의 몸에 집중하고, 이를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떠올린다. 신체의 특정 부분의 물적 변화에 대해 신체의 다른 부분이 반응하는 것이다. 병원에서도 우리는 몸의 물적 상태를 경험한다. 환자들은 자신의 몸이 물질적인 기능들로 다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경이와 아울러 불쾌감 같은 것을 느낀다: 뼈, 세포, 혈액, 두뇌, 종양, 흉부, 대뇌, 안구, 수정체,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검푸른 감광판 위에 영사한 엑스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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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ture of Mouth disease sourced from a book bought by Bacon c1928

간혹 의사들은 환자의 신체와 그 상태에 대해 시니컬한 묘사를 즐긴다: “귓속이 썩었네요”, “기관지가 좀 지저분하군요”, “대장 청소 좀 합시다” . . . 언짢아할 필요는 없다. 신체를 물질의 덩어리 혹은 물질들의 생화학적 이행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들의 속사정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악의가 있어서도 아니고 환자의 몸을 함부로 다루려는 의도에서 그런 것도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습관적으로 “당신의 몸은 단백질 덩어리 그 이상이 아닙니다”라고 숙지하게 하여, 자신 뿐 아니라 의료 행위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을 물적 상태로 끌어들여, 이 모든 사태들이 단지 물질의 현상일 뿐이라고 전문가적 조언을 해 줌으로써, 몸의 급진적인 변화에 대한 당혹감과 무지로부터 비롯된 신비화된 공포를 벗어날 수 있도록 배려한 일종의 과학적 노력일 뿐이다. 아울러 이것은 심리적 고통을 극복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의사들은 질병을 탈심리화 혹은 탈인간화하여, 환자가 없어도 질병은 존재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내 경험상 그들 중에는 환자가 호소하는 고통보다는 자신의 지식과 믿음을 더 신뢰한다. 환자의 호소는 질병존재에 대한 비과학자의 주관적 심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간주되어 종종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의 관심은 질병에 걸린 환자보다는 질병존재 그 자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정신분석 조차도 정신을 물적상태에 의존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의식”(Bewuβtsein)이 육체의 가장 표면에 자리잡은 특정 “조직”(<Bw.>라고 명명되는)의 기능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외부의 자극을 “지각”(Wahrnehmung)하고, 내부의 감정(쾌/불쾌)과 같은 정신 조직들을 감싸면서 외부 세계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일종의 <지각-의식 W.-Bw.>조직이라고 하는 공간적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프로이트는 이를 대뇌 해부학을 참고하여, 의식조직의 위치는 두뇌의 가장 안쪽이 아닌 바로 대뇌 피질, 즉 중추 기관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표층에 위치하고 있다고 적는다(『쾌락원칙을 넘어서』).

어쨌든 질병은 나 자신의 신체를 하나도 부서지지 않은 완전한 전체(유기체적 전체 혹은 조화로운 자연)가 아니라, 부스러기처럼 잘려지고 부분적이 된 대상으로, 마치 베이컨(Francis Bacon)의 고깃 덩어리 그림들처럼, 그 자체 독립한 뒤틀린 물상으로 보게 한다. 질병을 인식한 개인은 지금까지 자신이 외면해 왔거나 전혀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자신의 객관적 물상에 직면한다. 이런 점에서 질병이란 가고싶지는 않지만 가지 않을 수 없는 고독한 여행 같다. 한동안 유지되었던 온전한 신체가 몽우리지고 경직되어 진부한 상태가 되면 신체는 스스로 어떤 동요를 찾아 떠난다. 또는 외부의 동요를 받아들일 틈을 스스로 벌려 놓는다. 동요는 고집스럽게 얽혀있는 부분들을 한바탕 휘집어 놓고, 한꺼번에 분산되었다가 다시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와 버린다. 작게는 감기에서부터 크게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생에 걸친 몇 차례의 사랑이나 열병처럼, 딱딱하게 고인 신체를 갈아치우듯, 썩어가는 물밑을 걸러내듯, 질병은 우리로 하여금 물상의 변화에 대면하여 물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이를 견뎌내라고 채근질을 한다. 역설적으로 질병은 부패가 아니라 오히려 부패의 예방이나 치유처럼 보일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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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 Bacon, Figure with Meat. 1954

좀 다른 관점에서, 질병과 죽음에 대한 혐오나 거부는 ‘온전하고도 아름다운 상태’와 같은 윤리적(미적) 가치들에 관한 우리의 집착을 반영한다. 그 가치에는 ‘생명의 유기적 완전성’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이상이 있으며, 물적 상태의 변화에 대한 우리의 보수주의적 성향이 깊게 배어 있다. 그래서 베이컨의 저 이미지(물적 상태의 배후에 둘러쌓인 성직자)에 대한 혐오감은 우리 안에 내재한 형이상학적 보수성의 정도를 말해주는 것 같다.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Le Normal et le pathologique)에서 깡끼옘(Georges Canguilhem)은 다양한 생리학적-병리학적 사례들을 통해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질병 등의 구분이 실존적 문제이기 보다는, 규범적 존재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개념임을 논증한다. 생명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이나 환경에 단순히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적합한 환경을 구축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화시킨다. 심지어 수동적으로 보이는 환경에의 적응조차, 자크 모노(Jacque Mono)에 따르면, 어떤 “합목적적 활동”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생명체는 자기 자신과 외적인 환경 간에 특정한 유형의 관계와 가치를 형성한다. 깡끼옘은 이를 “생물학적 규범성”이라고 불렀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자신의 생물학적 규범성을 가지지 않는 생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생명은 자신에게 적합한 가치를 형성하고, 그 가치에 따라 자신의 생명 활동을 지속한다.

그런 의미에서 ‘병적 상태’는 정상성이 결핍된 상태라든가 정상으로부터 벗어난 잘못된 궤도를 뜻하지 않는다. 병적이라고 부르는 상태 역시 생명이 자신의 규범에 따라 지속해서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다. 모든 존재가 그 자신 안에 있다면, 비정상이라는 개념은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허구임을 깨닫게 된다. 병적인 상태 역시 그 자신의 존재를 갖는다.

물론 ‘건강’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하거나 공허한 말은 아니다. 정상적인 상태와 건강한 상태는 구별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 깡끼옘은 “생리적 항상성”과 “병리적 항상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설명에 따르면, 건강 상태는 환경의 변화에 대해 균형을 유지하거나 안정된 상태를 회복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따라서 생리적 항상성은 변화와 전진의 가치를 갖는다. 즉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생물학적 규범의 폭이 넓어졌음을 뜻한다. 반면에 병리적 상태는 환경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규범적 기준의 폭이 축소 되었음을, 말하자면 질병 즉 물적상태의 변화에 대해 쉽게 불안정해지고, 회복 능력이 감소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병리적 항상성은 퇴행적이고 자기보존적 고착으로 나아가는 가치를 갖는다. 치유란 생명체의 자기 규범이 안정된 상태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요컨대 건강한 상태와 병적인 상태의 차이는 변화를 수용하는 능력의 여부와 정도에 있는 것이다. 치유된다는 것은 규범과 가치의 보존이 아니라, 새로운 규범 또는 보다 우월한 규범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에 따르면 이것이 생명체의 환경에 대한 적응 그리고 환경의 내재화의 척도이다.

보수적 가치들 역시 그 자신의 항상성과 규범을 갖는 어떤 삶의 상태이다. 따라서 긍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변화를 수용하는 규범의 기준이 협소할수록, 그 가치의 지속가능성의 정도는 적어질 것이다. 그 폭과 깊이는 건강함의 정도를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질병, 개인, 그리고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