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칠드런

굿바이 칠드런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의 트럼펫 연주가 멋진 <사형대의 엘리베이터>(Ascenseur Pour L’echafaud, 1958)로 잘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영화감독 루이 말(Louis Malle). 그는 프랑스인지만 영미문화의 색채를 가장 많이 가진 작가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의 작품 <아틀란틱 시티>(Atlantic City, 1980)나 <데미지>(Damage, 1992)등은 영어로 제작되었고 각각 미국과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의 1987년도 작품 <굿바이 칠드런>(Au Revoir Les Enfants) 역시 프랑스(어)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엮어가는 짜임새가 비교적 영미권의 글쓰기 전통과 상통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예컨대 정치적인 문제(독일의 침략, 유태인 문제, 소수자 문제 등)를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 기저에는 윤리적 교육의 테마들(관용, 규율, 공존)이 지탱하고 있는데, 영미권의 냄새는 아마도 그 윤리적 접근방식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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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프랑스 영화이고, 프랑스를 위한 영화이고, 프랑스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영화이다. 카톨릭 신앙을 기반으로 한 작은 공동체의 울타리 안에서, 그들이 어떻게 자유를 존중하고 우애와 관용을 미덕으로 여기며 살고 있는지, 우리는 어린 학생들과 그들을 보호하는 어른들의 생활 속에서 조용히 목격하게 된다. 독일과는 전혀 다른 프랑스적인 규율이 현시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나이지리아 작가인 아체베(Chinua Achebe)는 자신의 소설 <모든 것은 무너져 버린다>(Things Fall Apart)에서 아프리카 원주민의 내적인 삶(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을 길게 보여주었는데, 이를 읽은 우리는 비로소 서구인의 눈이 아니라, 모든 예술의 궁극적 목표인 신의 눈이 되어, 그 자신 안에서 살고 있는 나이지리아 원주민의 진정함을 보게 된다. 루이 말이 도달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와 유사한 노력, 즉 침략자 독일인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온전히 프랑스적인 규율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프랑스인에게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특유의 관대함이 있다. 이 작품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요소인데, 이는 아이들을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에 잘 나타난다. 아이들은 짓궂게 장난을 치고, 심하게 싸우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다. 그래도 어른들은 그들을 말리는 경우는 있지만 바로잡기 위해 벌을 주거나 강요를 하지는 않는다. 이는 법치국가 미국이 법적 숙고의 결과를 교육체계에 반영시킨 인권존중의 개념과는 다르다. 그 관대함에는 오랫동안 대물림 해오면서 축적된 인간을 대하는 문화적 본능 같은 것이 있다. 영화 뿐만 아니라 프랑스 문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느꼈을 법 한데, 그들의 사회 정치적 진보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프루스트(Marcel Proust)가 “조그마한 삶(la vie petit)”이라는 말로 가장 멋지게 표현했던, 인간의 작은 몸짓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배어 있다. 많은 누벨바그(Nouvelle Vague) 집단의 멤버들, 특히 트뤼포(Francois Truffaut)나 루이 말 같은 감독들이 이미지를 왜곡 없이 담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그 애정에서 발산되어 나오는 따뜻한 온도였다. 그들의 관용과 자유의 아상블라주가 발산하는 온도는 정(情)에 기반한 한국인의 정서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따뜻함이다.

그 관대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독일의 나치스는 프랑스인의 교육과 삶 전체에 규율이 없다고 생각한다. 작품 속에서 독일 게슈타포 장교가 프랑스 아이들을 세워 놓고 “프랑스인에게는 규율이 없다”고 충고한다. 사실 독일군이 유대인을 잡으러 학교에 침입해오기 전까지, 작품의 전체 내용은 프랑스 아이들의 부산한 장난질과 사소한 싸움들, 그리고 아마도 부모에게서 그 방법을 배워 타인을 헐뜯거나, 질투를 하고, 자기만의 탐욕을 위해 개인물품을 암거래하는 장면들로 채워진다. 아이들의 이러한 소란들은 전쟁의 폭력적 상황, 유태인과의 불화 혹은 긴장, 독일의 점령과 같은 위태로운 정치적 환경과 나란히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그 작은 시골 마을의 카톨릭 학교는 단단한 기반 위에 안정된 상태로 서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 이유는 부산하고 소란한 삶의 밑바닥에 여전히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자기규율 같은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살기 위해 불가피하게 터득한 이기적인 습성을 드러내고, 타인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동안에도, 쥴리앙과 보네의 불화와 화해가 그랬듯이, 지나친 것이 무엇인지, 언제 화해를 해야 할지, 또 잃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당사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이해관계로부터 잠재적으로 끄집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그들은 서로 상처를 받는 동안에도, 그것이 그들의 관계를 해치는 그런 상처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작품은 자기 규율에 관한 영화이다. 신부가 부유층 학부형들 앞에서 “부자들의 탐욕과 종교적 구원의 관계”에 관하여 감동적인 연설을 했을 때, 바로 자기 규율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이 우리에게(한국의 관객에게) 감명을 주는 이유는 친구간의 우정 때문도, 종교적 희생이나 배려 때문도 아닌, 바로 자기규율에서 비롯되는 “윤리적 단호함” 때문이다.

윤리적 단호함은 민족이나 인종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교를 초월해 있다. 가톨릭 신부가 목숨을 걸고 유대인 소년인 장 보네를 나치로부터 은닉해 준 것은 종교적 동기(오히려 방해가 되었을)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윤리적 동기였다. 신부의 연설에 감동을 받은 보네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카톨릭 성체 의식을 받으려 하지만, 신부는 이를 거절한다. 학생들에게 반복해서 가르치는 교육에서도 나타난 바, 신부는 “타자가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러려면 어떠한 단호함이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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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가져온 개인 물품을 암거래하는 행위를 신부가 가장 싫어했던 이유도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 작품에는 두 명의 소수자가 등장한다. 하나는 물론 유대인 장 보네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소수자이다. 그는 살기 위해 나치를 피해 역사적 종교적 갈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공동체에 숨어 있다. 다른 하나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장 보네 보다 더 이 작품의 핵심이랄 수 있는 사회적 소수자 즉 조셉이다. 조셉은 이 학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일종의 하인 청년이다. 장 보네는 위태롭게 피신해 있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수학, 음악, 독서 등 다른 아이들에 비해 지적으로 우수하기 때문에 주변의 선망과 사랑 그리고 질투를 동시에 받는다. 반면에 조셉은 피신해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비교적 부유층 자제인 학생들에 비해 배우지 못했고, 사회적으로 천한 신분에 속한 소년이다. 그래서 가끔씩 거만한 학생들의 괄시와 무시를 받는다(“유대인은 자기네 집으로! 조셉은 돼지 우리로!”). 그런데 조셉은 학교의 물품을 몰래 빼돌려 외부인들과 암거래를 해오고 있다. 학생들이 집에서 가져온 개인 물품들은 교칙상 함께 공유하도록 되어 있지만, 조셉이 학생들과 비밀리에 거래를 하여 개인 물품조차 외부로 팔아먹는 것이다. 결국 이 사실은 신부에게 들통이 나고, 분노한 신부는 암거래를 했던 학생들을 처벌하고, 조셉은 학교에서 쫓겨난다. 이에 앙심을 품은 조셉은 신부가 유대인을 숨겨주고 있음을 게슈타포에게 밀고하고, 독일군이 학교에 침입하여 장 보네 등 학교에 숨은 유대인과 신부를 끌고가 죽인다.

암거래를 했던 학생들과 조셉에 대한 신부의 비판은, 당시 유태인과 외국인을 자기의 땅에서 몰아내겠다고 난리를 치고 다니는 게슈타포 독일군과, 대신해서 그래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유럽 사회의 냉소에 대한 비판과도 맞닿아 있다: 암거래자인 조셉이나 줄리앙 그리고 유럽인 전체는 혼자만의 방 안에서 쨈을 홀짝거리며 숫가락을 빨아대는 초라한 이기주의자 외에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 이들의 탐욕스러운 행동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능력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차디찬 동토의 섬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조셉의 무지한 암거래에 대한 신부의 태도, 그리고 조셉의 밀고에 대한 줄리앙의 태도는 대단히 단호하기 그지없다. 바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네가 약자라고 해서, 소외되고 가여운 어린 양이라고 해서, 부자들에게 천시를 받았다고 해서, 너의 무지한 행동에 비해 다소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고 해서, 그렇게 탐욕을 쫓아 암거래를 하고, 유대인과 신부를 밀고한 것이 정당한 행위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네가 약자라고 해서 널 용서할 수는 없다. 너는 무지했고, 그 무지로 인해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나는 너의 행위를 비판한다. 힘들게 산다고 해서, 먹고 살기 바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너의 책임이 아니라고 호소하는 듯한 그 역겨운 표정을 규탄한다. 너에게도 네 자신에 대한 단호함은 있어야 한다. 아니 그 누구보다도 더. 관대함이 필요하다면 그로부터 나온 것이어야만 한다. 소수자와 약자란 다름 아닌 그 불투명한 해이가 만들어 놓은 혼동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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