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의 힘

허구의 힘

베르그송은 사회가 생명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그 자체가 생명의 근저에 있다고 생각했다. 생명은 위계질서로 이루어진 분업의 체계이며, 이로써 개별적인 유기체는 사회적 유기성을 위해 계획되고 구축된다. 생명의 질서에서 개별 유기체들은 사회 전체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이것은 자연의 유기화 과정의 연장에 불과한 ‘본능’에 의해 이루어진다. 본능은 개체가 아닌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를 ‘사회적 본능’이라고 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생명의 진화에 있어 사회가 조직되는 두 경향이 있다. 하나는 절지동물, 특히 그 극단에 막시류 곤충으로 대표되는 ‘본능적 사회’이며, 다른 하나는 척추동물, 특히 그 극단에 호모사피엔스로 대표되는 ‘지능적 사회’이다. 사회가 조직화 되려면 개체들이 사회 전체에 대하여 조정된 기능을 유지해야 하는데, 막시류의 조정 기능은 본능에 의해 지배되는 반면, 인간의 경우엔 지능이 지배한다. 생명이 다듬어지지 않은 물질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노력이라면, 본능과 지능은 생명이 진화 과정에서 물질을 다루거나 그에 대응하면서 그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도구로서 사용하는 두 극단이라 할 수 있다.(베르그송,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131) 물론 생명의 원초적 상태에서는 이 둘을 서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침투해 있을 것이다. 막시류에도 지능이 있으며(“본능의 밑바닥에 존속해 있는 지능의 빛”), 인간 같이 지능이 발달한 종에게도 본능이 있다(“지능의 주위에 달무리처럼 남아 있는 본능의 잔여물”).(베르그송, 같은 책, 131) 이들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스며들어 서로를 함축한다. 이들의 분화는 개체가 성장하면서 또는 종이 진화하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곤충들의 사회에서는 구조가 고정되어 있고, 개체들의 관계는 본능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 개체는 자율성이 없고 안정된 사회조직 안에서 극도로 제한된다. 반면 인간 사회에서는 지능의 다양한 시도들로 인해 조직화 양태에 변이가 일어난다. 개인은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이 있으며, 지능을 이용해 다양한 사회 체계를 창출한다. “곤충들의 본성 안에는 행위가 결정되어 있는 반면, 인간에 있어서 결정된 것은 기능뿐이다.”(베르그송, 같은 책, 120)

그러나 지능에 의해 획득되는 개인의 자율성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회 조직을 ‘불안정’하게 하고, 사회 전체의 결속과 유대에 위협이 된다. 지능은 개인의 행위와 보편적 선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안다. 그래서 지능은 종종 이기적이고, 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함으로써 사회적 의무를 잠식하는 경향이 있다. 또 지능은 사물을 인과 관계의 연쇄 속에서 보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비전이 제한적이며 회의적이다. 지능은 세계를 의심 속에서 추론하고 해석한다. 나아가 지능은 경험적으로 목격한 죽음을 보편화하여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능력의 한계를 깨달아 불행한 결과를 예측하고 절망한다. 합목적적인 행위를 이끄는 능력이 동시에 무능력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사회를 해체로 치닫게 하는 지능의 이러한 태생적 ‘니힐리즘’과 ‘이기주의’에 대응하는 것이 바로 자연의 “잠재적 본능”(instinctive virtuel)이라고 보았다. 잠재적 본능은 지능이 약화된 곤충 사회에서는 기계적이고 행동적인 본능이 비교적 행동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지능적 존재에게는 우화(상상된 이미지나 환상적 영상)의 형태로 자연적 본능을 대신하는 본능이다. 잠재적 본능은 생명체가 경험과 습관을 통해 지능이 지배하는 존재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퇴화하지만 사라지지 않고 잠재적으로 남아 있는 자연적 본능의 잔여물 같은 것이다. 절지동물의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자연적 본능과 달리 잠재적 본능은 특정한 행위가 예정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적 운용 속에서 지능을 이끄는 불특정한 힘으로 작용한다.

“만일 지능이 어떤 점에서 사회적 응집력을 파괴하려고 위협한다면, 그리고 사회가 지속되어야 한다면, 이 점에서 지능에 대해 하나의 평형추가 필요하다. 만일 본능의 자리가 바로 지능에 의해 차지된 이상, 이 평형추가 본능 자체일 수 없다면, 지능 주위에 남아 있는 잠재적 본능, 더 좋게 본다면, 본능의 잔여물이 똑같은 결과를 산출할 필요가 있다.”(같은 책, 132)

베르그송이 언급하는 “평형추”는 지능에 대한 본능의 회복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지능이 배양한 습관과 기능으로 인해 그 실제적인 활동이 누그러진 본능을 어떻게 다시 생명체의 행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여기서 필요해지는 것이 바로 “우화기능”이라고 베르그송은 설명한다.

“그것은[본능은] 직접 작용할 수는 없으나 지능이 표상들 위에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현실의 표상과 머리를 맞대고 있을, 그리고 지능 자체의 매개에 의해 지능의 작업을 거역하는데 성공할 ‘가공적인 표상들’을 일깨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화적인 기능이 설명된다.”(같은 책, 132-133)

요컨대 잠재적 본능은 지능의 반사회적 경향을 저지하기 위해 지능이 구사하는 표상작용을 이용하여 ‘허구적 이미지’를 구성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허구는 환각의 초기작용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생생할수록 지각을 닮아 행위를 촉발하거나 억제하거나 변경할 수가 있다. 우화 작용의 역할은 지능에 속한 것이고, 지능의 표상 행위에 따른 것이지만, 순수하게 지능적인 것은 아니며, 그 기능은 지능 자체에 내재하는 경향과는 오히려 반대된다. 베르그송은 우화 작용이 종교와 도덕의 기능을 보조하고 정교화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개인의 이기주의와 니힐리즘에 의해 해체될지도 모르는 집단의 응집력을 지능을 통해 극복하게 하는 자연의 방어적 본능이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이 제시한 여러 사례들 중에서 두 가지만 살펴보자.

(1) 심령과학에서 수집된 사례
한 부인이 호텔의 가장 높은 층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열려진 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갑자기 엘리베이터 기술자가 나타나 그녀를 밖으로 밀쳐낸 것 같은 ‘환각’을 경험한다. 엘리베이터는 고장이 나서 실제로는 맨 아래층에 있었지만, 그녀가 있던 층의 엘리베이터 문은 열려 있었다. 즉 그녀가 들어가려고 발을 내딛었던 곳은 텅 빈 공간 속이었고, 거의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그녀의 생명을 구한 것은 바로 그 “신비스런 환각”이었던 것이다.(같은 책, 133) 여기서 우리는 그 여인 안에서 일어나는 능력들의 불화를 보게 된다. 엘리베이터의 문은 실제로 열려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거기에 틀림없이 엘리베이터가 있을 것이라고 ‘추론’했을 것이다. 그러나 추론에 의한 ‘행위’(문 안으로 발을 내딛는)가 감행되자마자 그녀의 ‘지각’(그곳이 텅 빈 공간이라는)은 이 행위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행위는 이미 시작 되었고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지각은 너무 늦었다. 베르그송은 독특하게도 여기서 “본능적이고 몽유병적이며 추론에 종속된 하나의 인격”이 나타난다고 해석한다.(같은 책, 133) 그녀는 순간적으로 위험을 직감했다. 그러나 추론과 지각의 표상만으로는 이미 시작된 행위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몸을 뒤로 젖히려는 ‘의지’를 몸의 실제 운동으로 일깨우기 위해, 이 부적절한 상황(행위와 지각의 불일치)을 바로잡고 자신의 의지를 행위에 설득시켜줄 “허구적이고 환각적인 지각(엘리베이터 기술자)”을 스스로 꾸며내야 했던 것이다.

(2)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의 경험
제임스는 1906년 4월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일어났을 당시 캘리포니아에 있었다. 캘리포니아로 가기 전에 그는 그 출신 친구로부터 그곳의 지진을 한 번 맛보라는 농담을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스탠포드에 있을 때 실제로 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침대에서 이 지진을 경험하면서 공포가 아닌 쾌감을 느낀다. 친구가 말했던 바로 그 지진을 경험한 것에 대한 유쾌함, 그리고 추상적 관념으로서의 ‘땅의 떨림’이나 ‘거대한 지구의 운동’이라는 단어를 감각적 실재로서 실감하면서, 그는 “저런! 그 반가운 지진이군”, “지진이 제 때에 와주었군!”이라고 중얼거리며 그 상황이 주는 희열감을 감추지 않는다.(같은 책, 167-168) 심리학자로서 제임스는 자신의 이러한 특이한 반응에 대해 자신이 지진을 일종의 “개인적 실체”(individual entity)로 느꼈음을 술회한다. 그는 자연 현상에서 어떤 “생기”(animus)와 “의도”(intent)를 발견하고, 그 배후에서 이 모든 혼란한 상태를 지배하는 영혼의 소유자 또는 살아있는 행위자를 상상한 것이다. 이러한 인격화는 제임스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고 그는 전한다. 그들은 “지진이 제 정신이 아니었어.” “모든 것을 파괴할 생각 같았어.”라며 지진을 어떤 의도나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쁜 불량배 대하듯 했다.

이 사례들로부터 우화 기능의 기본적인 형태를 발견하게 된다. 모든 재난에 대한 고대인들의 신화적인 해석에서 알 수 있듯이, 우화 기능을 통한 자연의 인격화는 인간에게 불가피하다는 점을 제임스는 지적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공포에 대한 본능의 반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공포는 행동을 방해한다. 물론 공포는 다른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유지에 있어 필수적인 감정이다. 공포가 없다면 생명체는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으며, 결국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공포는 충격과 혼란을 주어 몸을 마비시키고, 생명체의 판단을 억제하고, 행동에 장애를 일으킨다. 공포감은 미래에 대한 지능의 추론ㅡ자연의 이 ‘맹목적인 힘’이 아무런 의식이나 ‘의도 없이’ 우리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할 것이다ㅡ에 기인한다. 이런 점에서 과학은 지진에 대한 객관적 실체를 분명히 보여주긴 하지만, 그 파괴적 힘에 대응하거나 빠져나갈 수 있는 어떠한 ‘심리적 수단’도 제시하지 못하고 우리를 절망에 빠뜨릴 뿐이다. 해석만 하고 수단을 주지 못하는 지식보다는 차라리 명령이 낫다고 파시스트들은 종종 공언하고는 했다(그러나 과학은 피뢰침을 발명하지 않았나? 여기서 공포감의 문제는 심리적인 것에 국한된다). 과학은 자연으로부터 그 배후의 의도를 제거하고, 그것을 무미건조한 물질의 질서로 배열된 산문(散文)으로 만들어버린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바로 이 지점에서 지능의 미래에 대한 표상이 불러일으킨 공포에 대응하기 위해 지능 주위에 달무리처럼 잠재해 있던 잠재적 본능의 방어적 표상이 출현한다. 방어적 표상이란, 엘리베이터에서 부인이 떠올려 낸 환각이나 지진을 친숙한 인격체로 형상화하는 제임스의 상상처럼, 지능이 잠재적 본능의 어떤 강요에 의해 충동적으로 환기하는 ‘지각을 닮은 영상’을 말한다—아쉽게도 베르그송은 잠재적 본능이 지능 안에서 어떤 작용을 통해 우화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는다. 지능이 경험을 해명할 수 없거나, 경험으로부터 너무 멀리 있거나, 개인과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릴 때, 자연은 ‘위조된 경험’으로 지능을 일깨워야 한다. 지진이란 서로 다른 지층의 기계적 힘들이 충돌하는 대혼란이다. 그것은 모두의 생명을 앗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한에서 하나의 인격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것이 악의를 가지고 저지른 일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지진을 지배하는 주체가 존재하며, 그 주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안에 있다. 지진은 이제 친근하게 취급해도 좋을 인격을 가진 모습으로 현시한다—제임스의 경우 그 모습이 원시적 정신상태가 떠올리는 악마나 신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낯설지가 않으며, 그와 우리 사이에는 모종의 친교가 가능하다. 냉정한 과학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적 사건은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속성을 가진 어떠한 의도와 인격성이 부여된 이미지로 변형되어 인간과 내밀한 유대를 형성하는 개인적 경험이 된다. 따라서 공포는 사라진다. 공포는 이제 동일성과 개별성을 가진 형상으로, 악의 찬 괴물, 악마, 신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친근하고 인간적인 존재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같은 책 171) 따라서 지능의 우화 작용이란 자연 현상을 일정한 유대감 속에서 수용하여 그것을 행위의 수준에서 대면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기 위한 본능의 허구적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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