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니, 비스콘티

펠리니, 비스콘티

<씨네마톨로지>(가칭)의 또 다른 장을 위해 펠리니(Federico Fellini)에 이어 비스콘티(Luchino Visconti)에 관한 분석 에세이를 마무리 했다.

영국에 있는 동안 펠리니를 마무리 하려 했는데, 생각만큼 진척이 없었다. 양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펠리니의 분석이 오래 걸렸던 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영화는 개인적으로 볼 때, 재미 없고, 지루하고, 난삽하다. 아이러닉한 것은 내가 어렸을 때 가장 감명깊게 본 영화를 고르라면 지체 없이 La Strada라고 말해 왔다는 것이다. 중학교 때 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TV <주말의 영화>에서 처음 저 영화를 보면서 이유도 없이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펠리니를 관심을 가지고 뒤져본 적은 없었다. 분석을 위해 몇 번 뒤적여보긴 했지만, 매번 볼 때마다 생소하다. 최근도 그랬다. 처음본 듯한 . . .

펠리니는 “써커스”가 중요한 감독이다. 그에겐 로마가 써커스이며, 이탈리아도 써커스이며, 고대의 로마, 고대의 이탈리아, 세계 전체가 빙빙 돌아가는 써커스이다. 그러나 그가 써커스를 구현하는 방식은 써커스를 넘어서 있다. 써커스는 관객이 객석에 앉아 있고, 중앙의 원형 무대 위에서 광대들이 빙빙 돌아가며 쇼를 진행하지만, 그의 영화는 이러한 구도의 써커스와는 달리 인물이 지나가면서, 시간이든 공간이든, 진열장을 뒤지듯이 각 장면들과 에피소드들이 하나씩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다시 말해 보여지는 대상이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주체가 운동하는 것이다. 아멩구알은 펠리니의 이미지를 “유원지” 같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쇼핑몰”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인물들은 단순히 소요를 한다기 보다는 무엇인가를 뒤지고 있다는 인상이 들기 때문이다. 써커스의 이미지와 유원지 혹은 쇼핑몰의 이미지. 이게 무슨 차이인가? 대상의 운동인가? 아니면 세계 전체의 운동인가?의 차이이다. 영화사적으로 보면, 써커스의 이미지가 영화 초창기의 연극과 같은 카메라 중심구도에 가깝다면, 유원지나 쇼핑몰 이미지는 영화가 몽타쥬를  구사하던 시기 이후부터 쭉 운동에서 시간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닮아 있다는 말이다. 중심을 가진 하나의 관점에 다수의 운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관점과 다수의 운동이 중첩되어 있는 구도, 또는 주관성과 객관성 전체의 다수화. 이것이 바로 펠리니의 난삽하고 지루한 영화가 가진 위대함이다.

비스콘티. 개인적으로 비스콘티의 영화는 굉장하다고 생각한다. 굉장함 그 이상으로. 비스콘티는 그 자신이 귀족이기도 했고, 영화 자체도 귀족적이며, 귀족을 주제로 다루기도 한다. 초창기에는 프롤레타리아에 관한 영화도 만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영화에서는 프롤레타리아조차 귀족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그의 귀족주의가 니체적인 의미에서 귀족주의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가령, La Terra Trema에서의 Anthony는 단지 지배권력에 반항하는 굶주린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니힐리즘을 비판하는 주인의 풍모를 발산한다. 이 작품에는 서로 대립하는 세계관이 나오는데, 하나는 프롤레타리아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식의 운명적 니힐리즘이고, 다른 하나는 그 반대로 니힐리즘에 안주해버리는 노예들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스콘티의 귀족주의는 단순하지는 않다. 니힐리즘 역시 두 수준이 나온다. 하나는 안토니와 같은 처지에 있으면서도, 안토니의 저항과 구성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회의적이며, 그의 실패를 내심 바라는 노예같은 경멸스러운 이웃 어민들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을 지배하는 선주-상인들이다. 이들은 노예의 니힐리즘을 빨아먹으며 살아가는 니힐리스트들이다. 안토니는 이 둘 모두를 비판한다. 이 두 수준의 니힐리즘이 하나로 통일되어 나타나는 마지막 장면: 안토니가 선주-상인의 착취로부터 벗어나 독립하려는 시도에서 실패한 후 어쩔 수 없이 다시 그들에게 돌아갔을 때, 선주-상인은 어딘가 덜떨어져보이는 모습으로, 그러나 거만하게 앉아  의기양양하고, 야비한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그가 기대고 앉아 있는 뒤 쪽의 하얀 벽에는 Mussolini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니체가 추구했던 “도덕비판”이 보여주고자 했던  “지배와 피지배의 영원회로(eternal circuit)”로 요약될 수 있는 핵심적 명제를 읽게 된다: “지배 당하는 인간만이 지배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Ludwig ~!!! 그리고 Leopard ~!!! 비스콘티 영화의 본질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귀족의 몰락”이다. 문제는 이 귀족의 몰락이 귀족에 의해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본성이 자신의 삶을 붕괴시키고 있음에 대한 통찰. 그러나 돌이키기엔 너무 늦은. 본성 안에 갇혀 자연(시간)과 분리되어 살아가던 귀족이 삶과 자연의 통일을 감각적으로 깨닫게 되는 순간. 이것을 귀족주의의 니힐리즘적 탄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지만, 들뢰즈는 오히려 이 탄식을 “예술의 조건”이라고 규정한다. 들뢰즈는 비스콘티를 프루스트(Marcel Proust)와 비교하여 말하고 싶어했던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저 본질에 대한 통찰이 인간의 삶과 자연이 하나로 통일되는 시간에 대한 통찰이며, 너무 늦어버린 즉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해주는 것은 바로 본질에 대한 감각적 통찰로서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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