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 베르제르

폴리 베르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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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Edouard Manet)의 가장 유명한 작품 Un bar aux Folies Bergère(1882)이다. 정면에 크게 바텐더의 모습이 보인다. 이름은 수종(Suzon)이다. 바텐더 같은 시중드는 직업의 여인들은 봉사의 의무 때문에 자존심이나 본래의 인격을 대놓고 드러낼 수가 없다. 배려, 미소, 바른 몸가짐, 이런 것들이 그에게 요구되는 직업상의 덕목이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고민이 담긴 표정을 보여주어선 안 된다. 그래서 그의 내면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수종이 고객을 기다리며 서 있는 잠깐 동안 짧게 떠오르는 상념들의 희미한 파노라마를 통해 자신의 삶과 미래 전체를 펼치고 있는 것 같다.

수종이 일하는 이곳은 19세기 파리에서 유명했던 술집 폴리베르제르(Folies Bergère)이다. 예술가, 연예인, 정치가, 사교계의 일원들은 이곳을 들락거리며 당대의 부(富)의 양지인 사치와 향락을 쏟아낸다. 수종은 꽃무늬가 가슴 아래쪽까지 수놓아진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녀의 뒤에 보이는 광경은 거울에 비친 폴리베르제르 내부이다. 그녀의 오른쪽 뒤에는 한 남자가 술을 주문하면서 서 있다. 거울에 비친 것이므로 사실은 그녀의 앞에 서있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거울 속의 그 남자가 실제로는 그녀 앞에 보이지 않는다. 남자가 그녀 앞에 서 있다면 그가 우리의 시야를 가리기 때문에, 우리는 바텐더를 저렇게 정면에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즉 남자는 비현실적인 구도 속에 위치해 있다. 또 이상한 것은 술을 주문하는 것 같은 그에게 바텐더는 전혀 시중을 들고 있는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냥 무심히 혹은 생각에 잠겨 정면을 주시하면서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거나, 다른 곳을 멍하니 응시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저 신사에 대해 혹자들은 마네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닌 가상의 인물을 거울 속에 그려 넣은 것이라고도 말한다. 수종에 대한 자신의 연민의 감정을 거울 속에 투사한 가상의 모델 즉 마네 자신이라는 것이다. 마네 자신의 설명은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또 혹자에 따르면 거울 속의 검은 남자는 방금 지나간 손님이 거울에 맺힌 자취, 또는 바텐더가 방금전에 지나간 손님과 나누었던 어두운 대화(매춘 제안 같은)의 잔상(Nachbild)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순간을 포착하면서 종종 공간의 불규칙성(irregularity)을 이용해서 시간의 경과(시간 속에서 공간은 항상 일그러져 있으므로)를 표현하고는 했는데, 이 장면 역시 그런 종류의 하나였다는 식의 해석이랄 수 있다. 이 또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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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그녀의 눈동자다. 손님의 시중을 들어야할 시간인데도 생각에 빠져 어딘지 모를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자세히 보면 그녀의 눈동자는 약간 비스듬히 자신의 오른쪽을 향해있다. 눈동자와 시선을 보면 약간 우울해 보이기도 하고, 눈물이 글썽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동경어린 시선으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별 생각 없이 멍하니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미술사가들은 이 바텐더의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많은 논쟁을 벌여왔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마네가 작품의 전면에 저렇게 큰 눈을 그려 넣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녀의 어떤 감정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대답은 아마도 그녀가 ‘바라보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뒤에 보이는 거울, 그 거울에 비치는 광경이다.

마네는 평소에 자신과 관계있는 사람들을 작품 속에 집어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모델뿐 아니라 동료 화가들,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친구들, 사교계의 지인들을 그림 속에 주인공으로 또는 조연으로 많이 넣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단순히 그림의 모델이 아니라, 관계를 맺으며 함께 지내는 동안 마네 자신의 감정과 예술에 많은 영향을 미친 실존의 사람들이다. 마네는 친구들을 모델로 삼아 자신의 감정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심리적 초상을 작품 속에 현존하게 한 자기지시 화법의 대가이다.

이 작품 역시 그가 알고 있는 여러 명의 친구들이 등장한다. 가장 왼쪽 발코니에 모자를 쓰고 검은 복장을 한 수염 기른 신사가 보인다. 그는 당시에 유명했던 화가 뚜쉬(Gaston La Touche)이다. 그 오른쪽 옆에는 노란색 긴 장갑을 끼고 발코니에 기대어 옆을 보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있다. 마리 로랑(Méry Laurent)이라고 불리는 이 여자는 현재 마네의 정부이지만, 그 전에는 시인 말라르메(Stephen Mallarmé)의 정부였다. 원래 그녀는 사생아로 태어나 농부에게서 컸는데, 뛰어난 미모와 노래 솜씨를 무기로 일약 사교계의 꽃으로 성장한, 말하자면 고급매춘부이다. 말년에 기획했던 사계절 연작에서 그녀를 『가을』(L’Automne: Méry Laurent)에 배치한 것은 다소 의아스럽지만, 마네에게 로랑은 자신의 우울과 맞서는 활력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그녀의 왼쪽에는 자리가 비어있고 그 바로 뒤쪽에는 노란색 드레스와 검은 모자를 쓴 여인이 보인다. 당시에 유명했던 배우 장 드마시(Jeanne Demarsy)이다. 그녀 역시 사계절 연작 중 노란색의 『봄』(Spring)에 등장했다.(이 작품은 최근에 미국 LA의 게티 미술관(Getty Musuem)이 마네의 작품 중 최고의 가격 715억에 사들였다고 한다. 나는 이곳을 직접 방문하여 이 작품을 코 앞에서 감상했는데, 가격 때문이었는지 대단해 보였다). 빈자리에서 왼쪽에 보이는 여인은 발코니에 팔을 기댄채 오페라글라스를 들고 있다. 이 여인은 카사트(Mary Cassatt)가 그린 Woman in Black at the Opera(1879)에서 공연은 안 보고 남자들과 시선을 쏘아대며 글라스를 들고 있는 여인의 모습처럼 보인다. 추측컨대 마네는 이 그림에 찬사를 보내기 위해 이 모델을 삽입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옆에는 부채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니나 깔리아(Nina de Callias)로 보인다. 이 모델 역시 마네의 작품 Woman with Fans(1873)에 출현한 적이 있다. 그녀는 부자였다. 그리고 이국적이고 고상한 것들에 상당한 심미안이었다. 돈이 많아서인지 당시 파리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위해 살롱을 운영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부채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베르떼 모리소(Berthe Morisot)일 수도 있다. 그녀 역시 마네가 다른 그림들 속에서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적이 있다. 가령, The Balcony(1869)에서 모리소는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신비스러운 눈으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 Berthe Morisot with a Fan(1872)에서는 얼굴 정면에 부채를 들고 부채살 사이로 흘낏 쳐다보고 있다. Le Repos(1870-71)에서는 부채를 들고 검은 눈으로 무엇인가를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Berthe Morisot with a Fan(1874)도 있다.

이렇게 그림 속의 모든 인물들은 미모, 재능, 사치, 성, 문화, 예술 등을 대표하는 당대의 유명한 여성 인사들이었다. 수종이 멍하니 바라보는 것은 바로 이 여성들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오래 전부터 꿈꾸고 동경했던 화려한 세계, 그러나 자신의 처지와는 딴판인 세계, 현재의 신분으로는 결코 뛰어 넘을 수 없는 절망의 세계, 매일 바라보는 광경임에도 언제나 낯선 세계. 수종의 멍하니 슬퍼 보이는 시선은 바로 이 낯선 거리감과 동경 간의 해소할 수 없는 점근선 때문일 것 같다.

이 작품은 구도가 조금 특이하다. 작품의 핵심은 그녀의 눈빛과 그 시선의 방향에 있지만, 그와 아울러 그녀가 바라보는 대상 또한 구도상의 중요성이 있다. 그 대상들이 시선의 내용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마네는 고민했을 것이다. 앞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와 시선을 보여주면 그 대상들은 화폭에 담을 수 없고, 대상을 강조하면 그녀의 시선을 구도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 모두를 보여주려면 기껏해야 그녀의 뒷모습이나 옆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익히 알려진 자연적 공간의 구도이다. 하나의 공간 속에 두 존재가 동시에 공존할 수 없다고 하는 이 자연적 지각의 원칙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두 주제를 동시에 포착할 수가 있을까? 당대에 화가들 사이에서 주로 사용했던 방법이 바로 거울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마네 역시 거울을 이용한다. 그녀의 얼굴을 화면의 정면에 두고, 바라보는 눈동자를 약간 오른쪽으로 비틀어, 그 시선의 대상을 그녀 뒤에 걸린 거울에 반사되도록 그녀의 눈동자가 가는 방향에 배치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선과 대상, 주체와 객체, 또는 주관성과 객관성을 하나의 평면 위에 동시에 배치할 수가 있게 된다.

이러한 구도는 사실 그 본질에 있어 영화적이라 할 수 있다. 이탈리아 영화감독 파졸리니(Pier Paolo Passolini)는 영화적 시선의 본질을 “반-주관적”(semi-subjective)이라고 정의했다. 가령, 전쟁터에서 폭격을 받아 시력을 잃어 가는 병사가 있다고 하자. 눈에 생긴 그의 상처를 보여주기 위해 감독은 그의 얼굴 모습을 정면 혹은 측면에서 카메라로 담는다. 이것은 그 병사에 대한 “객관적 관점”이다. 그러나 얼굴 모습을 외부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그의 주관적 상태를 알 수가 없다. 기껏해야 괴로움을 호소하는 그의 비명이나, 무엇인가가 잘 보이지 않음을 암시하는 몇 가지 행동들(더듬거나, 누군가를 부르거나)만을 간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는 그가 바라보는 어떤 대상을 흐릿한 연초점으로 보여주면서 쇼트 자체를 그의 주관적 관점으로 대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이미 병사의 주관적 관점이기 때문에, 그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는 사라져버린 셈이다. 영화에서는 이 자연적 지각의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파졸리니가 말한 “반주관적 시점”을 사용한다. 간단히 말해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흐릿한 연초점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카메라는 그의 객관적인 모습을 그의 주관적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객관성과 주관성을 동시에 포착할 수가 있다. 이와 유사한 예로, 달리는 사람을 따라다니며 보여주는 방식은 정지한 채 멀리서 바라보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운동의 역동성이나 박진감을 자아낸다. 사방이 막혀 갑갑한 빌딩 숲을 거미줄 하나로 자유롭게 날라 다니는 스파이더맨을 카메라가 그와 유사한 공중비행으로 따라다니는 촬영은 단지 그의 활공을 보는 것을 넘어 그와 동일한 쾌감을 느낄 수 있는 반주관적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마치 피사체의 스타일에 감염되거나 흉내를 내듯이 피사체의 주관적 상태의 관점에서 그 피사체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이런 반주관적 시점을 문학에서는 “자유간접화법”(free indirect speech)이라고 부른다: “그녀는 고통스럽게 안간힘을 쓰면서 주먹을 꼭 쥐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폴리베르제르의 홀을 바라보는 수종의 모습을 바라본다. 동시에 그녀가 바라보는 대상들, 그녀의 눈에 펼쳐지는 대상들을 그녀의 시선에 감염되어 바라본다. 특히 빛을 뿜어내듯 밝은 차림으로 가장 돋보이는, 그 신분에 비해 엄청난 도약을 해버린 마리 로랑의 광채를 바라보는 수종의 “부러움”이나 “동경”까지도 바라본다.

마네는 이 작품을 그릴 당시에 심한 중풍과 신경통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자신은 매독이라고 생각하고 곧 죽을 것이라고 자학했지만, 사실은 항상 앉아서 작업을 하는 화가의 직업병이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는 전쟁 때 다친 것 때문이라고도 전해진다. 그는 점점 걷기도 힘들어졌고, 손의 마비 때문에 붓조차 제대로 쥘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활기찼던 젊은 날에 드나들며 사교계의 친구들과 어울리던 폴리베르제르는 더 이상 쾌락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는 이곳을 방문조차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곳은 미래의 고통스런 날들을 예기하는 지옥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로랑의 활력과 광채도 더 이상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었다. 노란 장갑에 차양이 넓은 숙녀 모자를 쓰고 들떠있는 로랑은 마네가 더 이상 줄 수 없는 미래의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두리번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제 가장 낯선 사람이 되어 자기와 나누었던 덧없는 환락을 다른 남자들과 나눌 것이다. 마네는 그녀와 폴리베르제르의 모든 것을 잃어간다.

마지막 방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네는 이곳을 떠나는 아쉬움과 슬픔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이 환락의 공간에 극적인 상황을 부여한다. 폴리 베르제르는 마네에게는 상실해가는 과거의 쾌락이지만, 바텐더 수종에게는 미래의 절망적인 동경이다. ‘마네-수종’은 거울 속에 반사된 두 개의 고통, 사회가 지워준 고통과 자연이 주는 고통을 바라본다. 반-주관성이나 자유간접화법과 유사한 중복시점을 통해 마네는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 덧없는 세계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바텐더의 동경어린 눈 속에 가져다 놓는다. 그 눈동자 속에는 “상실”과 “동경”이라는 서로 다른 서정주의적 감정이 연접(conjunction)한다.

 

폴리 베르제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