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로봇

자유와 로봇

automaton3생명과 로봇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부드러운 몸을 이루는 유기물과 단단한 결정체의 금속의 차이? 그러나 질료나 물질의 차원으로 더 들어간다면 생명과 로봇을 구분하기는 더욱 어렵고 모호해질 것이다. 사이보그(Cyborg)의 관점에서 볼 때는 더욱 그렇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생명체가 존재하며, 유기물로 된 로봇 역시 존재한다. 그렇다면 기능적 차이에 있는 것일까? 로봇은 생명체의 기능들(날개, 다리, 몸통 등)을 모사하고 흉내 내는 존재가 아닌가? 마찬가지로 생명체가 본능의 수준에서 행하는 수 많은 반복의 형상들을 보면 생명을 기계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미리 결정된 체계를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봇 인형을 딸(Francine Descartes)처럼 데리고 다녔던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말할 것도 없고, 이후 유럽의 많은 유물론자들에 따르면 생명체란 다름 아닌 기계이다. 기능 역시 생명과 로봇을 구분해주는 본질적인 차이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생명과 로봇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예컨대, SF 영화에서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고 생각해보자: 푸르고 광활한 해저도시가 펼쳐진다. 카메라는 점점 해저도시 속으로 더 가까이 달리샷(Dolly Shot)으로 들어간다. 거대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해저도시 건물들 쪽으로 다가가는 동안 중간 중간에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는 물고기들이 보인다. 물고기 몇 마리가 자유롭게 헤엄을 치며 카메라 쪽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자연의 물고기가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로봇 물고기들이다. 생김새는 금속을 이어 붙인 모습을 하고 있다. 자연의 물고기가 아닌 로봇 물고기가 관객의 눈 앞에서 나타나는 순간, 관객들은 물고기들의 ‘자유로운 헤엄’에 의구심을 품으며 틀림없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렇게 질문을 던질 것이다: 저 물고기들이 ‘왜’ 저기에 있지? 적의 침투를 감시하기 위한 정찰 물고기들인가? 해양의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모니터 로봇인가? 아니면 이곳이 바로 바다 즉 물이 있는 곳임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기능인가? 아니면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단순한 장식인가? 등등. . . 자연의 물고기였다면 하지 않았을 질문을 우리는 로봇 물고기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로봇의 필연적 존재성이며, 따라서 생명체와 로봇을 본성적으로 구분해주는 차이이다. 로봇은 존재 이유를 갖는다. 로봇은 그냥 저기에 저렇게 뚝 떨어진 실존으로서, 그 어떤 의미나 이유가 아니고서도 거기에 존재ㅡ따라서 우리가 그 존재의 정당성에 대해 질문을 하지도, 할 필요도 없는ㅡ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누군가를 위해 존재한다. 즉 소외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봇만큼 종교적인 존재도 없다. 로봇공학의 자본주의적 환상을 훌륭하게 그렸던 <에바>(EVA)라는 동유럽 영화에서, 한 로봇 과학자는 고양이 로봇 하나를 애완동물처럼 데리고 다닌다. 그 고양이 로봇은 생물체처럼 마음대로 뛰어다니고, 호기심을 가지기도 하고, 반감을 가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도망을 다니기도 한다. 그것은 ‘진짜’ 고양이처럼 행동하면서, 마치 자신의 생명적 의지를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주인을 따라다니며 진짜 고양이 흉내를 낸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이런 고양이가 필요한 것일까? 고양이가 멸종했기 때문에? 먹이를 주어야하고 배설물을 치워야 하는 진짜 고양이는 거추장스러워서? 과학자는 이 고양이를 프리(Free) 로봇이라고 불렀다. 태엽장치나 프로그램이 없이 제 멋대로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고양이가 자아내는 자유의 흉내는 대단한 넌센스이며 우스꽝스러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제멋대로 하도록 고안된 로봇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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