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정치

회색정치

영미문학, 특히 영국문학의 핵심을 ‘모호성’이라고 규정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정도로, 이들 문학사를 뒤져보면 모호성을 추구하는 작가들이 아주 많다. 너무나 심오해서 무시무시한 회색빛의 대자연에 경도 되었던 멜빌(Herman Melville),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자연의 흐름에 실려 자신의 이득을 취한다는 “현명한 수동성”(wise passiveness)이라는 그야 말로 모호한 능력에 주목했던 워스워드(William Wordsworth), 마치 범신론적 신처럼 뚜렷한 실체를 파악할 수 없이 만물에 깃들어 있는 미적 존재와 그 능력을 찬양했던 키츠(John Keats), 그리고 키츠의 이 “소극적 능력”(Negative Capability)을 그 자체로서 육화했다고 키츠 자신이 찬양해마지 않던 바로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몰개성(impersonality)의 시인 엘리엇(T.S. Eliot) 등이 있다. 저 마다 방식과 강도는 다르지만, 이 시인들을 관류하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면, 그것은 너무도 맑고 투명해서 혹은 너무도 깊고 다양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색 안에 깃들어 있는 무/회색으로서의 수동적인 힘일 것이다.

회색은 스피노자(Baruch Spinoza)가 생각했던 “신-자연”의 색이기도 하고, 들뢰즈(Gilles Deleuze)가 암시적으로 주장했던 “시간의 색”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수동적 능동의 묘한 힘을 닮은 모습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정치가들을 간혹 접할 때가 있다. 온갖 공세를 받으며 위태롭게 수세에 몰린것처럼 보이는데도 정작 앞으로 나아가는 쪽은 그 자신이거나, 속을 드러내지 않는 은밀해보이는 행태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기만과 거짓의 두려운 의혹에 싸여있는가 싶지만, 정작 결정의 부재가 그를 가장 신뢰 받는 당사자로 이끌거나, 직접 나서서 싸우지 않는데도 어느새 승리자가 되어 있거나, 그의 답답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성마른 타인들이 그 침묵을 깨기 위해 질러대는 고함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거나, 거대한 귀의 소유자였던 유비 현덕(劉備 玄德)처럼 그 자신은 크게 특출하거나 뛰어난 능력자처럼 보이지는 않는데도, 이상하게 그의 주변엔 크고 작은 인재와 인파가 성운처럼 모여들거나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투명한 정신의 빛으로부터 불투명한 물질의 어둠에 이르는 온갖 명료한 색들을 포괄하고 수용하면서 그들을 강렬한 경계 위에 두거나 모호한 실체로 융합하는 회색의 힘을 연상케하는 것이다.

반면 회색은 부정과 소극성의 색이기도 하다. 괴테(J. W. Goethe)는 회색을 두려움의 색이라고 말했다. 다양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대담함을 잃어버린 우리는 계속해서 물감들을 섞고 색채들을 융합하면서 색을 가능한한 희미하게 만들어, 회색으로부터 빠져나오려던 시도가 오히려 회색 쪽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극적 행태 때문에 우리는 정치적 회색을 가장 경멸하고 기피한다. 그러나 정작 회색정치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많은데, 그 이유는 회색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이 그 소극성에 대한 탄핵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기만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거부했던 그 다양성이 사실은 우리의 정치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회색의 본질은 기만이나 이중성이 아니라, 바로 그것들을 다양성의 이름으로 폭로하고 다양성 자체를 긍정하는 부정-소극적 힘에 있다. 회색은 중립이 아니다. 회색은 결여의 색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초과의 색이다. 회색은 영원히 유보 상태에 있는 태도가 아니라, 다양성을 끌어들이는, 오히려 일관성을 결여한 색이다.

관대하게 용서하는 포용의 군주는 결국 백성들의 경멸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는 공언했지만, 그럼에도 그가 말한 최후의 승자로서의 군주는 언제나 회색을 지배하고 회색에 임하는 자였다: 마키아벨리즘의 아이러니는 그토록 반민주적인 군주에 대한 찬양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인간 안으로 들어와 현실적 삶의 다양성의 인식에 이른(그래서 결국 긍정할 수 밖에 없는) 정치관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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