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된 이아고의 슬픔에 대한 스피노자의 대답

거세된 이아고의 슬픔에 대한 스피노자의 대답

가치를 선과 악으로 구별하지 않고 좋음과 나쁨으로 구별하는 것은 가치를 순수 형식적 관계로 표면화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에 따르면 악이란 사물의 본성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의 ‘관계의 해체’이다. 그러나 더 본질적으로 악은 새로운 관계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신의 관점에서 보면 관계들의 해체(악)는 다른 결합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관계들로의 이행이다. 절대적 가치로서의 선과 악의 심급이 좋음과 나쁨의 심급으로 치환되면서 가치들은 상대적 관계를 형성한다. 가치들의 상대적 관계는 동등한(동일하지 않은) 능력을 가진 신체들간의 만남을 긍정한다. 절대적으로 선한 것과 절대적으로 악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존재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대적 가치인 한에서만 그렇다. 좋은 것과 선, 또는 나쁜 것과 악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가치들을 순수 형식적 관계로 표면화 한다는 것은 이 둘을 구분하고, 모든 선과 악이라는 종교적 배후를 관계들로부터 걷어내는 것이다. 나아가 가치들의 표면화는, 표면 위에서의 만남이 언제나 우연적이며 상대적인 한에서, 모든 신체 관계들의 우연적 만남을 긍정한다.

우연적 만남의 긍정은 죄의식과 대립한다. 슬픈 정념의 도덕적 원인인 죄의식(또는 양심)은 수동성의 산물이다. 수동성이 죄의식과 슬픈 정념을 불러오듯이, 슬픈 정념 또한 수동성을 불러들인다. 수동성, 죄의식, 슬픈정념에 사로잡힌 영혼은 자신의 존재를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마치 계시처럼, 타자로부터 찾는다. 그에게 있어 원인은 타자에게 있으며, 자기 자신은 그 결과 혹은 목적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그는 자기 앞에 주어진 모든 현실적 관계들을 명령으로 받아들이거나 복종해야 할 법칙으로 이해하거나 자기 자신으로 귀결시킨다. 그에게 있어 삶은 필연적 운명이다.

그러나 우연의 긍정은 능동적인 신체들 간의 관계를 긍정한다. 자신 안에 존재의 원인을 내포하는 존재들의 관계 양태를 결정하는 윤리적 토대는 더 이상 선과 악이라는 ‘심판의 체계’가 아니라 ‘좋음’과 ‘나쁨’이라는 질적 차이로 대체될 것이다. 절대적 가치가 상대적인 것으로 바뀌면서 존재는 관계들의 양태의 문제로 귀결된다.

수동적 존재의 슬픈 관계를 이루는 도덕과는 반대로 능동적 존재들의 관계가 존재론적 윤리학의 테마이다. 윤리학은 신체들이 좋은 관계를 맺는가 혹은 나쁜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그들을 분류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좋은 관계는 신체들이 서로간에 관계들을 형성하면서 각각 자신 안에 깃든 본성적인 것을 완성하거나 자신의 능력들을 보다 완전한 것으로 증식시킬 때이다(음식물의 경우). 반대로 나쁜 관계는 자기 자신의 신체를 구성하는 고유한 관계가 다른 신체와의 관계를 통해 해체될 때이다(혈액을 해체하는 독의 경우). 좋은 관계는 신체의 능력이 보다 완전한 것으로 이행하는 한에서 기쁨을 생산하고, 나쁜 관계는 신체의 능력이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한에서 슬픔을 유발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체는 ‘지속’과 ‘연장'(extension)의 속성 안에 존재한다. 신체는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유지하고 나아가 보다 완전한 것으로 자기 자신을 확장하려는 노력 속에서 전개된다. 그런 이유에서 좋은 관계는 신체들 각각이 적합한 관계들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완성시키는 과정이며, 나아가 이 관계는 신체들을 기쁨의 과정으로 유도한다. 이와 같이 능동적인 것들 간의 우연적인 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만남의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된다: 수동적 존재의 ‘심판과 계시의 관계’가 아닌 능동적 존재의 ‘정동과 양태에 기반을 둔 관계’.

능동적 존재는 만남들 속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속성을 표현하는 다른 신체들을 ‘선택’한다. 자신에게 적합한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를 구별하는 ‘능력’과 ‘역량’을 통해 신체들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표현하고, 자신의 능력과 조응하는 한에서 기쁜 만남을 조직하고, 다른 신체의 능력들을 자신의 고유함 속에서 발견하고, 이들과 결합하고 통일을 이루면서, 자신의 능력을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끈다. 그리고 적합하지 않은 신체에 대해서는 부정하기 보다는 (선택적으로) 거부한다. 왜냐하면 부정은 슬픔의 보존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능동적으로 결합하는 모든 신체들은 명령이나 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정동적이며 양태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만남은 그 자신의 원인에서 조직된 것이며, 선과 악으로 나누어져 필연적으로 결정된 관계를 내포하지 않으며, 죄의식과 슬픈 정념을 유발하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 반대로, 슬픈 관계 즉 신체를 결합하는 고유한 결합이 해체되는 관계의 경우, 신체는 더 이상 지속과 연장이라는 고유한 본성을 유지할 수 없다. 슬픈 관계 속에서 신체는 수동적이다. 신체가 수동적이 되면 더 이상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표현할 수 없으며, 자신의 능력과 조응하는 다른 신체를 선택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보다 큰 완전성으로 자기 자신을 이끌 수 없다.

“우연한 만남에 따라 살아가고, 그 결과들을 수동적으로 겪지만, 정작 자신이 겪는 그 결과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나타나고 자신의 무능력을 드러낼 때마다 한탄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열등하다고, 혹은 예속적이라고, 혹은 약하다고, 혹은 미련하다고 말해질 것이다”(질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2001. 39쪽.).

한탄과 미움과 예속과 나약과 미련함에 사로잡힌 영혼은 삶을 무지 속에서 관철시키려 하기 때문에 삶을 폭력이나 기만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수동적 관계 속에서] … 어떻게 좋은 만남보다는 나쁜 만남을 만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죄의식으로 인하여 어떻게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원한 때문에 어떻게 타인들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고, 그리하여 자신의 고유한 무능력, 자신의 고유한 예속성, 자신의 고유한 질병, 자신의 고유한 소화불량, 독약 그리고 독물을 어떻게 도처에 퍼뜨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같은책 40; [ ]표시는 인용자의 첨가)

윤리학이 절대적 가치로서의 선과 악을 상대적 양태로서의 좋음과 나쁨(기쁨과 슬픔)으로 치환했을 때, 자신의 능력과 본성에 적합한 것(좋은 것, 기쁨을 유발하는 것)과 결합하고, 적합하지 않은 것(나쁜 것, 슬픔을 유발하는 것)을 거부하는 과정은 우선적으로 자신에게 속한 본성과 능력이 어떠한 정동과 양태들로 이루어졌는지를 아는 과정이며, 따라서 다른 것들과의 결합과 해체의 과정에서 자신에게 속한 본성과 능력에 적합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상대적 가치와 우연적 만남의 긍정은 단순히 가치에 대한 순간주의나 관계의 수동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치의 ‘내재적 판'(the plane of immanence) 위에서 신체들간의 우연적인 만남은 각자의 능동성을 전제하며, 이러한 능동적인 만남들이 조직되기 위해 필요한 가치의 상대성은 각자들간에 내재하는 공통성을 전제한다.

 

거세된 이아고의 슬픔에 대한 스피노자의 대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