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 장커!

지아 장커!

얼마 전부터 사진으로 찍어 두고 싶은 광경이 하나 있었다. 내가 가끔 산책을 하며 걷던 곳인데, 거기에는 오래 전부터 건설 중에 있는 아파트 단지가 횡 하니 솟아 있다. 단지 주변에는 마치 SF 전쟁물의 로봇처럼 거대한 기중기가 듬성듬성 버티고 서 있다. 그리고 건설현장 앞쪽으로는 여기 저기에 낙서가 지저분한 시멘트 벽이 만리장성처럼 가로놓여 있었는데, 그 시멘트 벽은 건설현장과 앞쪽의 개천을 둘로 가르는 경계가 되었다. 사진을 찍는다면 시멘트 벽이 수평선처럼 프레임의 좌에서 우로 반을 쭉 가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벽 위쪽으로는 기하학적으로 힘차게 솟아오른 아파트 단지가 보이고, 아파트 단지 뒤쪽으로는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푸른 산과 하늘이 있다. 다음으로 벽 아래쪽엔 흉하게 여기저기에 나 있는 잡초와 낮은 등성이 있고, 더 아래쪽은 얕은 개천 물이 돌덩이들에 부딪혀가며 지저분하게 흐르고 있다. 잡초가 나 있는 둔덕 여기 저기엔 중년 혹은 노인 남자들이 더운 날씨에도 땀 복을 입고 앉아 그 지저분한 개천 물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이 극적인 광경은 동영상 보다는 사진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바람이나 물의 흐름 혹은 날아가는 새 외에는 움직임이 거의 없었고(낚시꾼들 조차 미동이 없어 보였다), 그 광경이 자아내는 어떤 첨예함을 순간적으로 담기에는 지속적인 붓질이나 글의 묘사 보다는 대기를 단번에 갈라내는 칼끝과도 같은 민첩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그곳을 찍고 싶다고 생각한 후로 1년도 더 지나 카메라를 들고 그곳을 찾았다. 여러 장을 찍었지만 아무래도 카메라를 잘 다룰 줄 모르는 탓이었는지, 내가 느꼈던 광경의 첨예함이 좀처럼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체를 가르는 칼이 그렇듯이, 셔터의 순간을 포착하는 심리적 속도와 무게와 균형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싶다.

카메라가 생산하는 이미지는 펜촉이 생산하는 이미지보다도 그 물리적 속성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다. 종교적인 의례와도 무관하지 않은 예술이 그렇듯이 분위기를 잡고 포석을 깔고 절차를 밟으면서 서서히 우리를 압도하는 대신에,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혹은 사진을 보는 순간 실제적 균열 같은 것이 파고든다. 물론 그러한 민첩함이 없이도 첨예함을 드러내는데 탁월한 예술가도 있다. 지아 장커(賈樟柯)가 바로 그 이다. 안토니오니(Michellangelo Antonioni)나 데시카(Vittorio De Sica)와 같은 네오리얼리즘이 부활한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그의 작품들은, 사회적 변화를 개인의 존재론적 몰락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된 심리적 저항과 병치시켜 놓으면서, 재빠르게 무언가를 포착하지 않고도 오히려 서서히 진행되는 걸음걸이와 오랫동안 주시하는 시선을 전광석처럼 날카롭게 한다. 변화를 그 자체로 목격하는 것 만큼 찌르는 고통을 맛보는 경험은 없다.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마천루 지각”의 장면들을 보며 가슴이 아픈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변화의 광경에 익숙해진 우리들로서는 고통스럽지도 그렇다고 무감각하기만 한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지아 장커의 작품에는 항상 두 가지의 세계가 평행한다. 2006년작『東』이나 2007년작 『無用』과 같이 예술과 현실의 관계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고 마치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나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이 두 작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향이지만—의 사진집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24city』, 그리고 특히 2004년 작품인 『世界』에서 다소 노골적이고 이례적으로 드러내고 있듯이, 급격한 변화 아래 그 존엄성을 상실한 육체들의 찰과상이 널려있는 세계가 한 편에 있고, 누군가에 의해(혹은 어떤 외계인들에 의해) 그 세계가 은폐되거나, 또 누군가에 의해 그 세계가 거부되어, 예술의 형태로 혹은 판타지의 형태로 고착된 매끈하고도 영원할 것 같은 그림의 세계가 다른 편에 있는 것이다. 무자비한 세계와 병적인 세계의 두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가 안타까운 것은, 언제나 후자의 세계는 전자의 세계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가령 『24city』에서의 그 놀라운 장면이 그것이다. 화려하게 분장을 하고 신화적인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어느 허름한 건물에 들어가 주민들에게 여흥을 주기 위해 그들 앞에서 노래와 춤을 공연한다. 다음 장면에서는 공연이 끝나고 배우 한 명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온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와 돌아 나오는 순간 그녀가 걸어가야 할 골목길이 갑자기 그녀의 뒷모습과 함께 화면 전체에 펼쳐진다. 외계식물들처럼 전선줄이 건물들을 휘감고, 빨래나 쓰레기 혹은 시멘트 벽에 낀 검은 자국 같은 삶과 시간의 부산물로 더럽혀진 그 골목길은 다름 아닌 판타지가 서식하는 토대이다. 영화 전체를 통해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이 토대 어디에선가 잠을 자고 꿈을 꾼 사람들이 날이 밝자 밖으로 걸어 나온다는 것이다. 처음엔 노동자가, 다음엔 빈민들이, 다음엔 배우가, 다음엔 명품으로 치장한 보따리 상인이, … 인물들이 대체되는 양상은 마치 토대의 이행—가령, 중국사회의 공장자본주의에서 소비자본주의로의—을 보는 듯 하다. 이와 유사한 장면은 이미 『東』에서도 제시된 적이 있다. 거기서는 어느 여성 모델이 낙원 분위기의 수채화를 위해 포즈를 취하는 작업이 끝나고 나서 옷을 갈아입고 소음과 매연에 질식할 것 같은 도심지의 귀가길을 나선다. 이것이 바로 서서히 움직이며 한참 동안 주시하는 지아 장커 영화 전체에 잠재되어 있는 첨예함이다. 끝나지 않은 모순을 가리키며.(여기엔 또한 현실과 관계하는 예술의 달라진 위상에 대한 지아 장커식의 날카로운 비평이 있다)

아마추어인 내가 찍은 그 광경 사진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사진을 보자마자, 아니 지아 장커의 작품들을 보자마자, 그 사진의 제목을 망설임 없이 떠올려 내었다: 지아 장커!

지아 장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