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공지능이로소이다

나는 인공지능이로소이다

야구 중계를 본 지가 하도 오래되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근에 야구 중계를 보다가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희한한 장면 하나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심판의 판정을 판정하는 심판의 존재입니다.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운 상황을 두고 심판이 아웃을 선언합니다. 그랬더니 아웃을 당한 팀 불펜에서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며 비디오 판독—합의판정?!이라는 해괴한 용어로 인간적 sugar coating을 한—을 요청합니다. 잠시 후 판정이 오류였음이 밝혀지며 세이프가 선언 됩니다. 형식적 비효율성의 맨 얼굴을 폭로해버린 이 장면을 바라본 나는 아웃을 판정한 저 인간 심판의 존재에 대해 매우 복잡한 생각에 빠집니다. 나는 이것이 인공지능 또는 제4차 산업혁명에 직면한 인간의 애처로운 초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빠져나와 인공지능의 관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스포츠 분야 뿐만 아니라 사회계 어디에서나(특히 법조계) 깨닫게 되는 한 가지는 인간은 심판이 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입니다. 타인의 의견이나 특정한 상황에 쉽게 동화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망설임없이 현상을 왜곡하고, 심지어 권력이나 돈에 자발적으로 혹은 비자발적으로 매수 되기를 거리낌없이 하는 존재가 어떻게 공정하고 객관적인 심판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따로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단순한 도덕론자들인 언론 기자들은 그렇다고 믿는 것 같긴 합니다). 또 공정하고 객관적인 인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그렇다고 믿으면서 특정인에 대한 열광이 시작되어 다시 상황을 오염 시킵니다). 인간 자체가 이미 그럴 능력이 없는 겁니다. 마치 원숭이가 선천적으로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처럼 말이지요. 저 위의 인간 심판은 물론 공정하고 올바른 마음가짐의 소유자일 겁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으로서 가질 수 밖에 없는 감각체계 즉 몸 자체의 개인성이라는 한계 때문에 오류를 냅니다. 효율성의 차원에서 인간의 태생적 한계, 이것이 바로 알파고가 증명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수행하는 스포츠에서 인간 심판이란 뭐랄까 다소 이율배반적인 상황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선수와 심판, 즉 실천과 평가의 이 내재적 이율배반을 극복할 어떠한 초월성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예컨대 심판을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일임하는 방식 같은 것 말입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지 않은 채 사태를 평가하고 진위를 결정할 줄 아는 그런 객관적 존재. 인공지능 로봇도 한 가지 대안일 수 있습니다. 내용의 질적인 판단이 필요한 경우와 같은 보조적 기능 외에 모든 판단을 기계-주심이 하도록 하는 겁니다. 사실 인간의 질적인 판단 역시 의심스럽기도 하고, 또 질적인 판단 자체가 이미 주관적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질적 판단이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건 분명합니다. 질(quality)이란 순간이 아니라 지속하는 가운데 경험되는 것입니다. 지속은 보존하고 보존되는 어떤 중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아니 보존 즉 기억 자체가 중심의 형성 과정이기 때문에, 질적인 경험이라는 것은 형성된 중심이 내부가 되어 외부로 간주된 경험을 상대적으로 결정하는 주관성을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물질의 지속”이라는 생각은 모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피겨스케이팅이나 체조와 같은 것 외에 주로 기록 경기인 스포츠에서 질적인 판단이 얼마나 필요하겠습니까? 야구의 판정 체계 역시 많은 부분이 이진법적입니다. 아니 질적인 판단 자체를 할 줄 아는 로봇을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인간은 부심 정도의 위상으로 격하시키고요(그 조차도 위험하긴 합니다만). 사실 이미 많은 종목에서, 많은 분야에서 이러한 일들이 실현되고 있긴 합니다. 특히 법 쪽에서 움직임이 일어나야 합니다. 인간은 주심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판단의 주역이 되기엔 인간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진리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심한 경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기계에 일임 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인간적인 문제들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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