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는 아버지가 아니다

판사는 아버지가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의 인터넷 여론조작 사건에 대해 법원이 “정치개입”은 인정하지만 “대선개입”은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관련기사보기) 이 해괴한 판결이 보여주고 있는 “자기 배리(背理)”는 사실관계에 대한 무지 때문도 아니고, 사실에 대한 잘못된 판단 때문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실 관계는 명백히 드러났고, 판단의 주체 역시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도 왜 이런 판결을 내렸을까? 왜 법이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고, 판사들이 법에 먹칠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당연히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대선개입을 인정하면 선거가 무효라는 선언을 한 것이고, 이는 정권에 대한 명시적인 부정이다. 판사는 자신이 국가 전체와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졌을 것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까? 묵인을 할까? 아니면 부정을 할까? 누구”편”을 들어야 할까? 판사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의 “편”을 들지 않을 수 없는 강요에 직면해 있는 존재다. 그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무 자르듯 판결을 내릴 수도 없을 것이다. 양심에 따르자면 정권을 부정하고 싶지만, 그로 인해 초래될 일들은 판사 자신과 가족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이 될 것이므로, 대선개입을 인정한다면 “가장으로서” 안일한 처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정동적인 긴장 속에서, 이도 저도 아니면 제3의 다른 출구를 찾아야 한다: “정치 개입은 인정하지만 대선 개입은 아니다” 같은. 묵인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묵인 같기도 하고, 부정 같기도 한. 어찌보면 절묘한 출구 같기도 한, 유머가 아니라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저 판결의 배리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해소하기 힘든 어떤 내면의 싸움이다.  누군가의 편을 들거나, 누군가를 이롭게, 또는 해롭게 하기 위해 법이 개인의 목소리가 될 때, 법은 가장 추해지고 악랄해지지만, 동시에 이미 자신의 권위 뿐만 아니라 모든 법적 상황을 보잘것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안쓰럽기까지 한 저 유머러스한 판결의 출구전략은 바로 법조인들이 스스로 법을 부정할 수 밖에 없는 고역스러운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중요하게도, 그로부터 우리는 법의 주체가 법조인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판결은 법이 처한 현실을 폭로하기 위해, 그가 의도 했든 하지 않았든, 엉성하게 법복으로 덧 대어진 한 사람이 사회에 던지는 어떤 메시지나 제스처는 아닐까? 어쩌면 사회가 그에게 부과하고 허가한 책임과 특권이 그 사람이 어색하게 걸친 법복으로는 버틸 수 없을 만큼 너무 무겁고 뜨겁고 벅찬 것일지도 모른다. 또는 그 사람이 입기에는 법복이 지나치게 크고 무거웠을지도 모른다. 아니 법복을 입기에는 그 사람이 지나치게 보잘 것 없는 신체와 영혼의 소유자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회가 법복의 권위를 천박하게 폄하하거나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적 양심이나 두려움을 배제한 순수한 법적 판단이나 비개인성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가 망상인지도 모른다. 판사는 아버지가 아니다. 그도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누구로부터? 무엇으로부터? 신이 아닌 판사는 자신이 내린 판결에 대해 누구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는걸까? 상징적 권력인 4-5년 계약직 대통령으로부터? 설령 판사가 아버지라고 해도,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실질적 주체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는걸까? 법으로부터??!!

법으로 들어가기 위해 법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을 질식시킬 정도로 법은 원래 과묵한 것이다. 최소한 현대의 법은 그렇다. 행위의 명령이나 지시가 아니라 그냥 무언의 법칙처럼 작동한다는 점에서. 그런데 법이 이토록 수다스러운 것이었나 싶을 정도로, 언제부터인지 법률인들은 미디어로 몰려들어 말들을 쏟아낸다(아니 너무 과묵해서 해설이 필요한 건가?). 이 새로운 미디어 풍조에서도 엿볼 수 있는 바, 자신을 해명하고 설명해야 하는 법의 이 웃기는 자기배리의 상황들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근본적이고 철저한 자기 교화 없이, 법은 또 이번엔 어떤 절묘한 출구전략을 선보일 것인가?

판사는 아버지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