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공간 또는 삶의 시간

삶의 공간 또는 삶의 시간

그의 생태주의적 발상 자체는 많은 부분에서 좋은 의도를 담고 있다. 요지는 결국 산업이 만든 공간 환경의 비판이라 할 수도 있고, 공간을 구획하는 여러 모델들에 대한 소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적해야 할 대목이 없지 않다. 우선 공간과 시간을 혼동해서 언급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부분. 시간의 관점에서 제기했어야 할 문제를 자꾸 공간으로 바꿔서 얘기하는 바람에, 삶을 닫힌 것으로, 혹은 닫으려는 욕망으로 해설하고 있는 것이다. 공간을 주체의 중심으로부터 설명하는 것이 좋은 예다. 마치 아인쉬타인이 공간을 시간으로 해석한 것처럼, 그는 시간을 공간으로 해설한다. 예컨대, 차를 마실 때의 심리적 공간, 집에서 살아가면서 내면화되는 공간에 대한 의식적 경험, 등등. 그리고 이 공간의 개념을 설명하는 기초 논리는 원근법적인 것, 즉 삶의 필요에 따라(그리고 광학적 논리에 따라) 지각 작용이 질서화 한 멀고 가까운 것의 관계(먼 것은 작게, 가까운 것은 크게 보이는), 그리고 그 중심에는 모든 경험의 주체이자 의식을 가진 내가 존재한다고 하는 방식의 설명이다. 그는 원근법적인 공간 구성이 우리의 본능적 필요에 부합하고, 또 그렇게 해야 “마음에 드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원근법은 엄밀히 말해 경험적 원리라기 보다는 관념적 원리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정말로 원근법에 일치하는 방식으로 경험할까? 우리의 감각이 과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대의 화가들은 원근법을 지키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삶의 원칙이나 경험의 원칙을 무시해 버리기 때문이 아니라, 원근법이 규정할 수 없는 감각적 질서의 특이성, 오히려 우리의 실질적 경험의 질서를 이루고 있는 비원근법적 감각의 영역에 대해 눈을 떴기 때문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집안에서의 삶의 경험 역시 원근법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원근법이란 대기상태까지 감안하여 넓은 공간에서 그 공간을 활용하고 재현하기 위한 인식 체계에 기반을 둔다. 따라서 그것은 문화사적으로 볼 때 남성적 공간의 재현방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원근법은 공간의 시각적 지배와 관련이 있지 삶의 느낌과는 거리가 있다. 집안에서만 생활했던 여성들(지금은 또 다르겠지만)에게, 가려진 빌딩과 폐쇄된 공간의 미로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원근법은 공간을 지각하는 올바른 원리가 될 수 없다. 환경에 따라 사물들은 이차원적 평면으로 보일수도 있고, 행동을 중심으로 하는 동물의 지각과 달리, 비행동적인 생물체의 지각은 클로즈업이나 흐름의 형식으로 형성될 수도 있다. 그것은 중심이 없는 4차원, 5차원, n차원까지 무한하다.

이런 식으로 그는 시나 예술을 감성적 형식으로 이해하면서 무뚝뚝한 이성이 잘 보지 못하는 영역으로서의 구체적 지각, 구체적 경험, 몸의 감각과 같은 개념으로 삶을 설명하고 해석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인간중심적이고, 의식중심적이고, 관념론에 가까워 보인다. 후설이나 메를로 퐁티(그가 많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와 같은 현상학자들이 의식을 사물과 화해시키기 위해, “사물로 지향하고 있는 의식”이라는 개념을 창안했지만, 결국은 의식 안에 닫혀버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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