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두 형식

앎의 두 형식

지식 혹은 앎이란 무엇일까? “지식이 있다” 혹은 “알고 있다”라고 말할 때는 신중하게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예컨대, “나는 이것에 대해 지식이 있다”, 혹은 “나는 그에 대해 알고 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인지, 어떻게 알고 있다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거나, 최소한 자신에게 확신을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앎은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형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푸코(Michel Foucault)는 자신의 저서 『비정상인들』(Les Anormaux)에서, 한 사회가 “정상”과 “비정상”을 어떻게 구분하고 규격화하는지를 분석한다. 사회가 비정상이라고 규정한 대상은 크게는 괴물이라고 불리는 기형인이나 범죄자를 비롯하여 작게는 예의 없음, 좋지 못한 버릇, 자위행위, . . . 등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중요한 두 가지의 앎의 형태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17세기 유럽에서 사법체계와 권력이 범죄자에 대한 앎을 어떤 식으로 형성하는지에 대한 간략한 메시지를 발췌하여 읽어보자.

“[…] 권력의 메커니즘은 너무나 강하고, 그 과잉은 너무나 의식적으로 계산되어 있어서 죄의 처벌은, 죄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성질을 규정할 필요가 없었다. 권력의 메커니즘은 군주의 의식 안에 거대한 범죄를 흡수하고, 그 안에서 그것을 과시하며, 마침내 그것을 말살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다. 이런 점에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거대한 범죄의 성질 같은 것은 있을 필요도 없고, 있을 가능성도 없다. 거대한 범죄의 성질은 없다. 범죄와 그 주변 사이의 투쟁, 격분, 악착스러움만이 있을 뿐이다. 17세기말까지 사람들이 한번도 범죄자의 성질에 대해 질문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권력의 체계가 이러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은 제기될 필요가 없었거나, 혹은 그것을 아주 주변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몇몇 텍스트에서, 특히 브뤼노가 1715년에 쓴 <범죄적 질료에 대한 고찰과 격언들>에서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다. 판사는 피고인을 연구해야 한다. 그의 정신과 습관, 활기와 육체적 상태, 나이, 그리고 성별을 검토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그의 영혼으로 침투해 들어가기 위해 범죄자의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와 같은 텍스트는 내가 방금 이야기한 모든 것을 다소 거칠게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텍스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판사에게 범죄자에 대한 앎을 요구하는 것이 범죄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범죄가 저질러졌는지를 알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판사는 제대로 죄인을 심문할 수 있기 위해, 즉 심문의 엉큼한 계약을 그의 주변에 잘 엮어 놓아 그로부터 진실을 짜내기 위해 죄수의 영혼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죄수가 판사의 앎의 대상이 되는 것은 진실을 간직한 주체로서이다. 그것은 결코 죄를 저지른 범죄자로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일단 자백을 하고 나면, 바로 이 순간부터 이 모든 앎은 처벌의 결정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대문이다.”(『비정상인들』(Les Anormaux), 박정자 역, 동문선, 2001, pp. 107-108).

푸코의 글을 통해 이렇게 유추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악착스러운 필요에 따른 목적에 이용하기 위한 앎이 있고, 그 자체로 목적인 앎이 있다. 또는 “정보”로서의 앎이 있고, “이해”로서의 앎이 있다. 푸코에 따르면 판사들이 범죄자를 연구하는 이유는 범죄자 그 자체가 궁금해서도 범죄의 본질이 궁금해서도 아니다. 다만 규정된 법 체계 안에서 그의 행위가 범죄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그가 범죄자로서 적합한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해, 처벌의 기준을 확정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앎의 방식은 범죄의 본질을 아는 것이 아니라, 범죄행위의 확인과 인지(認知)이다. 이렇게 사법체계의 앎의 사후형식 때문에 법은 범죄를 사라지게 하거나 교정할 수가 없고 오로지 처벌(반항이나 반란의 ‘가능성’이 있는 범죄에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애초의 범죄 보다도 더 가혹하고 잔인한)만을 가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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