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치(György Lukács)

루카치(György Lukács)

1.

소설 속에서 구성되고 있는 이질적인 추상적(비연속적인) 요소들의 결합된 관계들은 순수한 형식으로서 창조적 주체성의 윤리가 되지만, 이 윤리는 객관적 내용과 맞물리면서 의미의 변형을 이루어낸다. 즉 형식은 내용에 의해 수정되면서 내용과 균형을 이룬다: 주관성과 객관성(응결된 형식적 관계와 이 관계들의 통일성)의 균형과 상호작용. 소설의 규범적 내용을 이루고 있는 아이러니는 소설 속에 여러 가지 이질적인 요소들을 융합하는 과정에서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이 긴장하는 이원적 관계를 갖는다. 이 과정은 또한 감각적 형식으로서 하나의 관념과 현실 사이에 작가의 지혜나 의식(거리)이 매개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창조적 개인의 반성은, 삶 속에서 발생하는 (감각적)관념에 형식을 부여하고, 형식이 부여된 관념의 실제적 본성을 묘사하고, 이 실제적 본성(리얼리티)을 평가한다. 그러나 이 반성은 또 다른 반성의 대상이 될 뿐이다. 첫 번째 반성은 소박한 수준에서 짜여진 것으로 이번엔 보다 고차원의 반성에 의해 대체된다. 왜냐하면 첫 번째 반성은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망상이기 때문이다. 이 반성은 특정한 역사적 현실 속에서 목적론적인 운명을 맞는다. 하나의 순수한 반성은 또 다른 형식을 부여받아야 한다. 따라서 이것은 아이러니의 구조처럼 형식을 부여하는 행위들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지시적으로 확장된다. 이것이 위대한 소설의 우울증(melancholy)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작가의 단순함은 극단적 폭력을 겪고 그 반대적인 상태로 변화한다. 균형을 통한 긴장과 성숙. 서로가 서로를 극복하는 반성들의 불안정한 균형(소설가의 주관성은 첫 번째 단순성이고, 두 번째 단순성은 객관성). 형식을 부여하는 행위들을 통해 점차 고양되며 반성적이 되지만,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을 환기하기 때문에 결국 순환의 고리 속에서 자기지시만을 수행한다.

이런 식으로 소설은 증식(mature virility)의 형식을 띤다. 작가는 이제 순진한 신념을 갖지 않는다. 신념을 확신하기 위해 더 깊은 고통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가 깨닫는 것은 그 고통이 단지 끝없는 요구일 뿐이지 유효한 리얼리티는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작가는 두 방향에서 아이러닉한데, 한 방향은 그의 신념이 주인공에 향해있는 반면에, 다른 방향에선 이 신념이 언제나 실패할 것이라는 지혜에 향해 있다. 이것은 심오하게 깨달은 투쟁의 절망 뿐 아니라 그 포기조차도 여전히 희망이 없다는 더욱 깊은 절망으로 확장된다. 이 목적 없는 유희에 주인공(아마도 우리 자신)은 희생당한다. 이상과는 딴판인 세계에 적응하려는 의도의 비참한 실패. 그리고 아이러니로써 의기양양하게 현실을 묘사하는 동안 깨달은 사실은 리얼리티가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뿐만 아니라, 리얼리티는 또 다른 관념의 도전을 받는다는 점에서 최종적인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상과 현실의 아이러니컬한 투쟁적 관계; 고통은 오히려 이상화된 신념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지, 목적 없고 의미 없는 현실적 힘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성숙한 작가의 우울증은 서로 갈등하는 이중적인 경험으로부터 발생하는데, 한편으로는 확신에 찬 신념이 죽었다는 경험(신이 사라진 세계)이며, 다른 한편에는 외부세계가 절대로 우리의 목적과 방향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경험이다. 젊은 영웅은 이제 혼자가 되었다. 고립된 개인의 우울함. 우울한 영웅의 내면에는 안정된 세계와 불안정한 상태의 세계가 공존한다.

진리를 말해주지 않는 신은 이제 더 이상 신념에 찬 신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악마이다. 그의 힘은 여전히 유효하며 살아있지만, 더 이상 세계를 관류하지는 못한다. 우울한 영웅은 따라서 신에 정체되지 않고, 이 신과 동등한 등가적 존재로서 악마의 힘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이제 필연적 섭리는 우연적 무의미로 대체된다. 따라서 초월적 신의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계는 그 자체 내재성의 원리에 의해(인과적 질서) 인도되는 것이다. 이것이 비극의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강렬하게 고향(자아와 세계의 충만한 관계)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이제 이 열망은 자기 동일적(selfhood) 망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신을 잃은 존재가 내면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모든 사건들은 자신의 운명이 되며 모든 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소설을 신에게 버림받은 (비극적인)세계의 서사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주인공들의 심리는 악마적이며, 소설의 객관성은 의미의 미결정성을 인식한 성숙한 인간의 지식이다. 주관적 신념과 객관적 리얼리티간에서 갈등하는 우울한 존재의 성숙된 시간. 이것이 바로 역사철학적 순간이다. 또한 이 역사철학적 순간 속에서만 소설의 정신적 태도로서 생식력 있는 성숙함이 나타난다. 이렇게 성숙한 소설의 구조는 구체성으로 이루어지며, 내면성과 모험의 분리로 구성된다. 왜냐하면 내면성이란 세계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성숙한 인식이며, 모험은 이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신념을 굽히지 않으려는 왕성함이기 때문이다.

드라마적 영웅은 모험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가 경험하는 모험은 미리 결정된 운명에 도달하기 위한 노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연적인 과정으로서 일종의 교육이거나 시험에 불과하다. 이 모험은 위험하지 않다. 따라서 드라마적 영웅은 내면성을 알지 못한다. 내면성이란 영혼과 세계가 서로 대립적으로 이원화된 상태의 산물이며, 정신과 영혼간에 고뇌하는 일종의 거리이기 때문이다. 미리 결정된 운명 속에서 영웅은 짜여진 대로 영혼을 획득하게 될 것이며,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어떠한 적대적 리얼리티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모든 객체들은 단순히 그에게 준비된 운명의 표현에 불과하다(그래서 아마도 그는 진정한 영웅이지만, 자신을 증명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내적인 안정성이 이미 선험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며, 그의 운명은 모험과 증명으로부터 초월해 있기 때문이며, 운명을 형성하는 사건들은 그에게 단지 상징적 객관화일 뿐이며, 심층적으로 위엄을 갖춘 의례일 뿐이기 때문이다. 현대 드라마나 입센의 드라마에서 본질적으로 내적인 스타일이 없는 것은, 그 인물들이 시험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기인하며, 이들은 스스로 자신과 영혼의 거리를 감지했으며, 시험에 통과하고자 비참하게 노력하는 열망으로 이 거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

소설은 내면성의 모험을 말하는 장르이다. 소설의 내용은 영혼이 자기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며, 증명되고 시험되기 위해서 모험을 찾는 이야기이며, 그 자체 증명하고, 자신의 본질을 찾는 이야기이다. 내적인 안정성의 세계인 서사시는 이 본질적 의미 속에서 모험을 배제한다. 서사시의 영웅들은 다양한 모험들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 모험들이 궁극적으로 극복될 것이라는 신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신에 지배된 세계는 언제나 승리하는 것이다(이 경우 모험은 ‘신성한 장애물’이 된다). 그들의 삶을 채우는 모험들은 이상화된 객관성으로서 하나의 총체적 비전으로 제시된 세계의 부분적 요소들이라는 형식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서사시적 영웅은 (괴테나 쉴러가 말하듯이)수동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소설 영웅의 수동성은 필연적이지 않다. 영혼과 외부세계의 긴장된 관계 속에서, 영웅은 반드시 수동적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수동성이 소설의 필연적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만일 소설에서 영웅이 수동적 존재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특정한 사회적 심리적 맥락에서 나타난 특정한 인물의 유형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소설의 형식으로서 아이러니를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유리벽에 부딪친 상황이라 할까? 뚫고 나아갈 수도 없고, 그러나 또한 이 장애가 있는지 조차도 알지 못하는 상태. 작가의 아이러니는 신이 없는 시간 속에서 갈구하는 소극적 신비주의이다. 그것은 의미에 대한 불가지론의 태도와 같아서, 이 세계의 단순한 사실 외에는 더 이상 알기를 거부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거기서 깊은 확신이 생겨난다. 형식을 부여하면서 표현가능해 지는 확신. 알기를 욕망하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알 수 없게 됨으로써, 그는 진정한 실체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신을 만나고 감지하며 파악하게 된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러니는 소설의 유일한 객관성이다. 작가의 객관성은 그가 신과 어느 정도로 자유로운 관계인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Hebbel이 적었다. 신비주의자는 자신이 스스로 포기할 때 자유롭다. 그리고 신 안에 총체적으로 용해될 때 자유롭다. 신을 포기함으로써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그는 이제 오히려 신이 되고 지배자가 된다. 규범은 이제 스스로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이나 작품 속에서 규범이 실현되는 문제는 현존하고 있는 (역사철학적 의미에서)토대와 분리될 수가 없다. 초월적인 신의 형상을 열망하고 경험한 신비주의자조차도 여전히 자신의 역사적 조건들 속에서 존재하는 신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신조차도 역사철학적 관점에 의해 기술된 범주들 내에서만 완벽해 질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유가 가지는 이중적인 범주의 변증법이다. 이론적인 범주와 역사철학적인 범주의 변증법. 표현가능하고 형식을 부여받은 모든 것은 이 이중적 예속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표현되고 형식을 부여받는 것은 사물에 범주를 부여함으로써 거머쥐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역사철학적 맥락에서만 완성된 부분적 이해이기 때문이다.

말을 함으로써 침묵에 도달하는 우회로, 범주를 통해서만 본질에 이르는 우회로는 불가피한 것 같다. 역사적 범주들(맥락)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을 때, 이 매개를 통하지 않고 침묵이나 본질에 도달하려는 희망은 단순히 중얼거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엔 토대가 없기 때문이다. 작가의 자유로움은 역사적 맥락에서 그에게 할당된 조건들에 의해 결정된다. 형식을 꾸미는 자로서 그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형식들과 맺는 규범적 관계를 가짐으로써만 신과 자유로와 질 수 있는 것이다. 형식의 내재성은 그 선결조건으로서 궁극적으로 선험적 존재와의 구성적 관계(심리적이지 않은 규범적으로 미리 준비된 관계)를 가지게 된다. 리얼리티의 창조로서 선험적 형식은 진정한 선험성이 이미 내재하고 있을 때(역사적 조건들) 비로소 존재한다. 작가의 (감각적)경험에만 정박되어 있고, 본질(고향)로는 되돌아오지 않는 텅 빈 내재성은 표면화된 내재성일 뿐이다. 이는 부스러기들만 보여줄 뿐이며, 이 내재성을 유지하지도 못할뿐더러, 심지어 이 표면조차도 구멍으로 가득한 수수께끼가 될 것이 뻔하다.

소설에서 아이러니는 신과 관계를 맺으면서 자유로움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아이러닉한 세계에 대한 이해는 곧 거리를 두고 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객관성으로서 초월적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직관적인 이중적 비전으로서 아이러니는 신에 의해 포기된 세계 속에서 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게 해준다. 주관성에 빠진 존재는 이제 자신이 몰입되어 있음을 보는 것이다. 사악한 아이러니는 메타적 본질을 가지면서 주체 안에 있는 악마성을 감지한다. 아이러니스트는 내성적 본질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동시에 실패할 운명을 타고났음을 알고 있다. 신의 권능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조차도. 무능한 구원자로서 신의 고통까지도. 그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존재이다. 아이러니는 주체성의 자기극복의 형태로 갈 수 있는데 까지 나아간다. 그래서 아이러니는 신이 없는 세계 속에서 획득할 수 있는 가장 우월한 자유이다. 그러나 또한 아이러니는 총체적 창조의 객관성을 위한 유일하게 가능한 선험적 조건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또한 이 시대의 대표적인 예술 형식으로서 소설이라는 총체성을 발생케 하는 것이다. 소설의 구조적 범주들은 우리가 보는 세계와 구성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2.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영혼과 작품 혹은 내면성과 모험간에 두 가지 유형의 불일치가 있는데, 하나는 영혼이 축소되어 외부세계보다 작은 유형이고(추상적 이상주의), 또 하나는 영혼이 외부세계를 압도하는 형태이다(낭만적 이상주의). 추상적 이상주의는 이상적인 것을 실현하기 위해 곧장 직선으로(외부세계로) 가려고 선택한 정신상태이다. 즉 악마에 현혹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상과 이념, 심리와 영혼에 거리가 있다는 것을 망각한다. 따라서 리얼리티는 마술적 암호를 찾음으로써 혹은 용기 있게 악마의 힘과 싸움으로써 구원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적인 문제의식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내면적 거리를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이다.

완전한 삶의 내재성의 필수 요소로서 이 본능적인 거리감이 결여되면, 영혼이 축소될 경우, 이 영혼의 활동의 토대로서 객관세계 역시 축소된다. 따라서 이로부터 나오는 실제적 행위들 역시 축소될 것이며, 축소된 활동들 속에서 외부세계의 본질은 상실되어 현상들의 왜곡된 이미지들만 남게될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주관과 객관의 관계는 진정한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해괴망측한 미끄러짐과 상호 오해의 충돌이 될 것이다.

이것은 영혼이 유일한 것으로 규정된 강박관념에서 나온다. 그래서 이 강박관념의 내용이나 그 강도에 따라 상상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의 그로테스크한 대립관계가 강화되기도 하는 반면에 또한 영혼을 가장 숭고한 영역으로 고양시키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소설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다. 소설에서 이러한 이질적인 특성은 영혼이나 심리의 영역과 행위의 영역을 불일치하게 하는 요소이다. 이제 영혼은 초월적 존재가 되어 한편에서 쉬고 있으며 어떠한 절망도 탐구도 의심도 하지 않는 것이다. 내적 갈등과 긴장이 없는 영혼은 따라서 추상화된 활동과 행위를 만든다. 이런 이유에서 삶의 모험은 전혀 위험하지 않으며 모험은 예고된 구원 속에서 다양화 될 뿐이다.

이렇게 주관에 몰입된 내면성은 이 주관성 자체를 행동으로 이해하고 실행한다. 내면성과 외부세계와의 거리가 사라짐으로 인해, 이제 세계는 충만한 유기체로 이해되거나 사회적 관습에 취한 자기 동일적 관념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삶을 사는 개인의 행동은 자발적인 것이긴 하나 이데올로기적이다. 이러한 존재양식은 오로지 자신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어떠한 대항세력도 가지지 않은 (주인공에)정체된 모험을 통해서만 외부세계 속에서 그 자신을 표현할 뿐이다. 이렇게 영혼을 예술 작품처럼 만드는 이 고립은 또한 모든 외부적 현실과 자신을 분리하며, 악마에 의해 포섭되지 않은 영혼 외적인 모든 영역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한다. 따라서 내적으로 정향된 의미가 최대에 달하면 무감각의 최대에 달하게 될 것이며, 숭고함은 광기나 독단이나 열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순수 내면 지향적인 영혼은 외부세계를 간과하고 행위들의 가능성을 원자로 만들어 버린다. 즉 단편화함으로써 추상화된다. 외부세계는 이제 위험하지도 않으며 지루하고 의미도 없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자의적으로 꾸며지고 선택된 리얼리티에 대한 망상으로, 심리는 고착되고, 행위들은 양화(量化)되어, 고립된 모험 속에서 병든 무한함만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유형의 인물을 객관화함으로써 『돈키호테』가 추상적 이상주의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작가의 천재성에 의해 돈키호테의 영혼 속의 광기를 신성화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이 역사적 맥락에서(역사철학적) 통찰되었기 때문이다. 기사소설의 역사철학적 조건: 이것은 단순히 중세 기사로맨스의 패러디로 의도된 역사적 우연성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순수 형식적 요소들을 영속적으로 유지하려 했던 기사소설은 역사적 조건들에 의해 초월적 존재의 뿌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그 형식도 더 이상 내재적 기능을 하지 못하고 시들어버려 추상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 사회의 커다란 역설은 불완전함과 죄악으로 가득 찬 파편화된 삶과 완전하고 충만한 초월적 삶의 신성함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단테는『신곡』에서 이러한 이중적 세계의 총체성을 순수 서사시의 형식으로 그려내었다. 다른 모든 서사작가들은 초월성을 건드리지 않은 채 초월적인 것을 떠났으며, 따라서 감성적으로 감지된 삶의 총체성을 창조하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열망되긴 했지만 어떠한 내재적인 의미도 결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서사시가 아니라 소설을 만든다.

단테처럼 이제 소설은 삶에 역점을 두었으며 더 이상 모든 존재의 구성적인 통일성을 찾는 출발점으로서 신을 수용하지 않았다. 돈키호테와 맞서고 있는 기사로맨스 역시 신과의 필연적이고 초월적 관계를 상실했다. 그것의 신비적이고도 요정신화와 같은 수사적 장식들은 이제 진부한 겉치레로 저하된 것이다. 물질(역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신(영혼, 주관적 이상)은 오로지 악마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신의 역할을 사칭하고, 신의 섭리로부터 버림받은 세계와 초월성이 결여된 세계에서, 위험하지만 아름다운 마술의 정원으로 낙원을 꾸며놓았다. 그는 이제 산문을 쓰기 시작한다.

최초의 가장 위대한 소설은 기독교의 신이 세계를 포기할 때 시작되었을 것이다. 인간이 혼자가 되고, 자신의 영혼에서만 의미를 찾고, 실체를 찾을 때. 고향은 어디에도 없으며, 역설적 고착으로부터 해방되어, 내재적으로 무의미하게 버려진 시기에. 돈키호테는 최초로 내성적 세계가 외부세계의 따분한 저속함과 전쟁을 치른 작품이다. 그리고 또한 최초로 내면성이 승리한 작품이다.

3.

삶이 부여하는 운명보다 영혼이 더 넓기 때문에 일어나는 부조화가 있다(19세기 소설의 경우). 이 부조화는 영혼이 행위를 통해 외부세계와 갈등하면서 ― 이것이 소설의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 스스로를 실현하려고 하는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 충만하고 완결된 형태의 순수 내면적 현실이, 외부세계의 현실과 겨루게되면서, 자발적인 자기신뢰를 통해 스스로를 진정한 현실로 즉 세계의 본질로 간주함으로써 나오는 부조화이다. 이로써 또한 내적 현실과 외부세계의 동등함을 실현하려는 모든 노력이 실패한다는 것이 작품의 주제가 된다(낭만적 이상주의).

이 경우 내면성은 우주와 같아서 그 자체 내에 안주하게 된다. 추상적 이상주의가 초월적 세계를 가정함으로써 현실과 투쟁하는 양태라면, 낭만적 이상주의는 자기 내면으로 안주하고 도피하려는 경향을 띤다. 추상적 이상주의의 심리구조가 외부세계와 객관적인 관계를 띠면서 외부세계에 무제한적인 활동을 보여준다면, 낭만적 이상주의는 오히려 수동적으로 도피하여 외부적 갈등을 피하려 한다. 이러한 소설의 유형에는 서사적 상징이 사라지고, 형식이 파괴되며, 통일성을 잃고, 분위기와 반영의 구조적 연쇄가 일관적이지 않게 되어, 감각적으로 의미가 가득한 이야기들이 심리적 분석으로 대체된다. 따라서 묘사되는 세계는 원자화되고 의미를 결여하게 되며, 관습이 지배하고 두 번째 자연(문화)이라는 개념이 실현되는 세계이다. 여기서 삶의 형식적 객관화는 영혼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예로 사회적 삶의 형식적 객관화로서 직업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며, 결혼, 가족, 계급이 내적인 삶에서 별 의미가 없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면성을 완전히 독립된 세계로서 승격시키는 것은 단순히 심리적 사실이기보다는 현실에 대한 나름대로의 판단에 기인한다. 자기 충만은 역설적으로 자기 방어적인 표현인 셈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이것은 내면 세계가 현실 속에서 포기되었음을 의미하며, 주체의 자학적인 투쟁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서정성이 너무 강해 더 이상 순수한 서정적 표현을 할 수가 없게된다. 유일한 본질로서 내면성을 소유한 주체는 이제 외부세계와 극단적이고 부정적으로 대면하지 않고 외부세계를 자의적으로 정복해 버린다. 결국 외부세계를 망각함으로써 이제는 내면으로 도피조차 하지 않는다. 또한 현상적으로 원자화된 단편들을 끌어 모아 새로운 창조물로서 순수한 내면성의 서정적 우주에 녹여 버린다. 반면에 서사적 내면성은 늘 반성적 태도를 취한다. 이것은 서정주의처럼 단순히 거리 없는 상태와는 대조적이다. 그래서 서사적 내면성의 표현수단은 부수적이 되며 분위기와 반성의 특징을 띠는 것이다. 분위기와 반성은 소설의 형식적 구조를 결정하는 요소이다. 따라서 이러한 방식은 외부세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긍정적인 중요성을 갖게된다.

이와 같은 심미적인 문제는 그러나 근본적으로 윤리적 문제이다. 주관이 우월한가 객관이 우월한가하는 위계적 질문은 유토피아에 관한 윤리적 문제이다. 너 나은 세계의 상상력이 윤리적으로 정당한가의 문제. 그렇다면 이러한 윤리적 문제에서 볼 때, 외부세계의 객관적 현실을 배제하고 자기만족적 행동으로 입증이 가능한 것인가? 예술적이고 인위적인 수단으로 꿈의 세계로서 내적 현실을 창조하는 것은 망상적 해결일 뿐이라는 것이 그 대답이다. 영혼의 열망은 타당하고 매우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상상적 미몽의 상태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현실적인 문제와 연관 되면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열망의 자기만족으로 끝난다면, 스캇(Walter Scott)의 소설처럼 내적인 공허함으로 인해 소설에서 이념(역사철학적 의미에서?)의 실현이 불가능할 것이다. 현실도피는 무용지물이며, 그것은 행위와 영혼, 외적 운명과 내적 의지의 부조화만 초래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윤리의 문제는 필연적인 행위와 가능한 행위의 (관계)문제이다. 주관성에 빠진 인물 유형의 본질은 능동적인 존재이기보다는 관조적 존재일 뿐이며, 따라서 서사적 재현을 통해 심미적 인물을 형상화하는데 있어 난관은, 도대체 어떻게 망상적이고 겁 많은 인물을 실질적 행위로 끌어들일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주인공이 현실에서 필연적으로 패배함으로써, 존재의 즉자성(being-there)과 당위성(being-thus)이 서로 조우하는 지점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소설의 임무이다.

낭만주의적 이상주의는 추상적 이상주의의 뒤를 잇고 있는 역사철학적 단계이다. 전자가 현실에 대한 유토피아적 요구에 의해, 현실의 맹목적인 힘에 의해 개인이 패배하고 있는 형태라면, 후자에서 이러한 개인의 패배는 주관성의 선결조건이 되고 있다. 전자로부터 전투적인 내면성을 지닌 영웅주의가 생겨났다면, 후자로부터는 문학적 창조자로서 이 영웅은 삶을 형상화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을 가지게 된다. 또한 전자의 경우 외부세계가 이상이라는 모델에 의해 재창조되어야 했다면, 낭만주의의 경우는 작품 그 자체로서 완결되고 있는 내면성이 자기자신의 형상화에 적합한 질료를 제공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낭만주의 문학은 존재의 당위적 근원을 인식하고 그 결과로서 자기 자신을 자기 실현에 유일한 질료로서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삶 자체가 문학이 되는 것이다. 낭만주의 작가는 문학을 창조하는 신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실패하는 운명 속에서 환멸을 경험한다. 이것이 환멸의 낭만주의이다.

선험적 고향과 단절하게 되면서 비로소 시간이 구성적일 수 있었다. 마치 무아지경으로 고양된 신비주의자가 피조물로서 제한성을 벗지 못하고 시간의 세계 속으로 내려와야 했듯이 말이다. 본질을 염원하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주제로 하는 소설에서만이 시간은 형식과 함께 나타난다. 서사시에서는 의미의 내재성이 너무 강해서 시간은 그 의미 내재성에 의해 지양된다. 즉 서사시에서 삶은 삶으로서 영원성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소설에서는 의미와 삶은 서로 분리되고, 따라서 본질적인 것과 시간도 분리된다. 결국 소설의 모든 내적 줄거리는 시간의 힘에 저항하는 싸움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가 있다.

 

루카치(György Luká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