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정당화: 메타서사에 의한 정당화

지식과 정당화: 메타서사에 의한 정당화

이 글은 료따르(Jean-François Lyotard)의 저작인 La Condition Postmoderne을 해석하면서 지식과 정당화의 문제에 관한 논의를 재구성한 것이다.(주1) 한편에서는 그의 논의를 따르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를 보존하면서 다른 관점들과 결합하거나 다른 관점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의 책 전체는 지식의 세 가지 정당화 방식을 논의하고 있다.

(1) 메타서사에 의한 정당화. 이것은 주로 계몽주의와 관념철학의 방식이다.

(2) 효율성과 최대 수행성에 의한 정당화. 이것은 자본주의적 중상주의에 의한 정당화 방식이다.

(3) 배리(Paralogy)에 의한 정당화. 이 세 번째가 포스트모던 과학의 방식이다.

그에 따르면 메타서사의 실패는 지식에 있어 효율성을 규준으로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이 역시 지식이 권력의 수단으로 지배되는 과정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도 잠깐 언급을 하겠지만, 효율성의 규준은 지식이 테크놀러지에 의존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이는 결국 돈의 문제로 나아가 지식이 경제권력의 수단이 되는 과정을 밟는다. 궁극적으로 그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배리에 의한 정당화 모델이다. 이 모델을 통해 그는 어떻게 하면 지식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하는 과정 속에 위치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고 있다. 료따르의 글이 중요한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여타 이론가들과는 달리, 지식과 정당화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모델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은 위 첫 번째 주제인 메타서사에 관한 것이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그의 생각을 한 마디로 간추려보면 이렇다: 지식은 그 자신을 인식론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

1

지식의 정당성에 관한 논의는 지식의 위상을 생각보다 훨씬 비관적인 상태에 위치시킨다. 건강에 대한 의식은 이미 질병의 상태라는 깡길램(G. Canguilhem)의 지적처럼, 지식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이 진정으로 참인가 혹은 어떻게 그 지식을 정당화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방법적 모색이든 형이상학적 추구이든, 지식과 정당성의 분리된 관계를 이미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식과 관련한 모더니티를 지식 자신에 대한 회의(懷疑)라고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회의를 최소한 두 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논리전개의 편의상 여기서는 한 가지만 언급하고 다른 하나는 뒤에서 다시 제기하겠다. 그 하나는 지식 외적인 요인으로, 사회적 생산 양식의 변화에 따른 결과이다. 특히 기술(매체)의 변화는 지식의 관건이 될 만큼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식 연구는 테크놀러지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으며(유전학, 생명공학 등), 지식의 보급이나 전수 역시 그 힘(인쇄 매체는 가장 구식이고 초보적인 방식이 되었다)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테크놀러지의 변화에 따라 지식의 성격이 달라질 것이다. 예로, 지식은 테크놀러지에 적합한 단위, 즉 계측 가능한 정보의 양으로(정보 단위로서의 비트) 처리되고 번역되어야만 적절한 사회 문화적 코드에 적응할 수가 있다. 정보 단위에 맞게 변환되지 못하는 지식은 폐기될 것이며, 새로운 연구방향 역시 테크놀러지의 처리과정에 적응하는 정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지식이 정보가 되어 양적 단위로 처리됨으로써, 그 가치는 교환에 집중된다. 반대로, 지식은 교환되기 위해 일정한 크기로 코드변환 되어야 한다. 그로 인해 지식은 이제 그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외면화되기 시작한다. 즉 지식은 그 자체의 내적 가치를 잃어버리고 교환 가치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연구하고 전파하는 지식의 생산과 유통은, 마르크스(K. Marx)가 시장경제의 상품과 관련하여 노동을 분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행위의 목적이 수단으로 변형되는 과정을 밟는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의 변화는 지식 뿐 아니라 존재 일반의 외면화를 초래하며, 이로써 지식의 영역은 그 자신이 원인이기를 그치고 다른 영역들과의 관계 속에서 텅 빈 외연적 차이만을 갖게된다. 따라서 지식이 그 자신을 충만한 존재로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수많은 타자와 대상들을 필요로 한다.(주2) 외연적 차이는 주체를 텅 빈 혹은 결여된 실재로 상정하면서, 끊임없이 다른 실재를 생산하고 불러들이는 효과를 낸다. 또한 자본주의는 실재를 사라지게 하고 끊임없이 다른 실재들을 만들어 내면서만 존속한다. 이런 이유에서 자본주의 메커니즘의 원리는 결합과 축적으로 집약되는 것이다.

2

외면화된 지식은 생산권력이 필요로 하는 정보 상품의 형식을 갖추고, 경제적 권력을 추구하는 자유 경쟁에서 중요한 수단이나 관건이 되고 있다. 지식의 이러한 중상주의화, 즉 화폐의 흐름과 동일한 방향으로의 지식의 순환은 나아가 국가 권력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경제권력은 과학이나 기술과 같은 수단을 점유하게 됨으로써 국가 권력에 상당한 위협이 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경제권력에 공권력이 의존하는 경향을 띠기도 한다.(주3) 정책 결정의 주체는 이제 과학이나 정보 기술 등을 소유한 권력의 몫이 될 것이다.

또한 지식의 외면화는 지식주체의 도덕성에 있어 큰 문제를 야기한다. 지식이 경제권력의 수단이나 그 체계의 기능적 요소가 됨으로써, 점점 그 외부적 힘들에 무력해질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발생하는 도덕적 악영향이나 타락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과학 기술을 소재로 다루는 현대의 미국 영화들을 보면 이러한 현상들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예로, 인류를 위협하는 악한 천재). 여기서 지식 주체의 도덕성 문제는 지식의 정당화 문제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이 정당화는 규범을 제정할 수 있는 즉 입법의 권위를 부여받는 과정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과학적 진술이 정당하고 합법적인 것이 되려면, 그 규칙 제정자가 일정한 담론의 조건들을 규정할 수 있는 권한을 인가 받아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이러한 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누가 이 권한을 줄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지식의 정당성은 정치-윤리의 언어와 무관하지 않다. 즉 진리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정의를 결정하는 권한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지식의 주체가 지식 자체로부터 소외되는 과정은 동시에 정치-윤리로부터 분리되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과학이 지배권력에 더 매여있으며 나아가 권력 갈등에서 주요한 관건이 되고 있는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권력은 지식을 합법화하고 지식은 권력을 정당화하는 이중정당화의 문제는 더욱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지식과 권력은 다음과 같은 동일한 문제의 두 측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식이 무엇인지를 누가 결정하는가? 그리고 무엇이 결정되어야 하는지를 누가 아는가?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지식의 문제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지배와 통치의 문제가 된다”(Lyotard 9).

3

현대의 교육은 과학적 지식을 지식일반으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객관적 증거들과 이에 근거한 증명에 의해 확립된 과학적 진술들의 집합을 불변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대체로 과학적 진술이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 관계에 기초한 사변적이고 지시적인 진술에 근거하기 때문이다.(주4) 그 진술을 직접 실험하거나 경험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이에 어떠한 반론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흄(D. Hume)은 윤리적이고 규범적인 진술들(주5)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인과율에 기초한 과학적 진술들조차 어떻게 반복적 경험에 의해 발생한 것인지를 밝히고 있다(Hume 40~41). 우리는 지식을 좀 더 커다란 의미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지식은 단순히 지시적 진술의 집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나오는 지혜나 행위윤리 등, 과학이 포함할 수 없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실질적인 비결들을 말한다. 따라서 지식 일반은 지시적 발화 뿐 아니라 규범적 발화 혹은 평가적 발화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대체로 사변적 추론뿐만 아니라 실제적 경험이나 관습적 윤리와 관계를 맺으면서, 개인들간의 암묵적 동의를 발생시키기도 하고(미적 판단 등), 개인이 속한 집단이나 공동체의 규준을 형성하기도 한다(집단적 의례, 자치 규약, 윤리 등).

그런데 과학의 지시적 진술 외에 지식 일반을 형성하는 규범적 진술이나 평가적 진술은 주로 서사형식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주6) 그리고 이 서사형식은 전통사회 지식의 근간을 이룬다. 서사에 의존하는 지식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1) 서사적 지식은 그 자체 일정한 교육의 기능을 갖는다. 여기서 사회제도가 정당화되거나(신화), 기존 제도로의 통합모델이 제시되기도 한다(전설, 동화). 서사는 한 집단의 능력을 정의하는 기준이 되며, 개인들의 행위는 이 기준에 따라 평가되기도 한다. (2) 서사형식은 과학적 지식담론과는 달리 화용론적 상황과 문맥을 필요로 한다. 이야기를 통해 지식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참여자들의 다양한 형태의 능력들(묘사, 질문, 진술, 평가, 판단 등)이 발휘된다. (3) 서사적 상황에서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이야기 내용의 인물이나 대상 등의 사회적 위상이 결정된다. 즉 서사로 전달된 지식은 단순히 내용의 전달에 그치지 않고 화자나 청자 혹은 주인공이 됨으로써,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하고 들어야 하는지 등의 행위 규범들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 규범은 개인이 사회와 맺는 결속의 화용론적 규칙의 집합이다. (4) 서사는 일정한 리듬을 따라 진행되는데, 여기서 강세보다 운율이 리듬을 지배하게 되면, 리듬과 가락의 주기적 구분이 사라지고, 암송되고 있는 내용이 과거의 기억으로서가 아니라 현재적 행위로 전이된다. 즉 서사적 내용은 과거의 사실을 지시하지만, 반복적인 암송과 운율로 인해 과거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현재적 행위의 양식이 되는 것이다. (5) 서사를 취하는 문화가 과거를 기억할 필요가 없듯이, 이 문화는 전달되는 진술에 권위를 부여하는 구차한 절차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과학 담론에서처럼 서사자의 권위를 입증하기 위해 그 정당성을 분석하거나, 임의적으로 결정된 주체에게 서사적 권위를 부여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주7) 이미 보았듯이 서사 자체가 반복적 암송과 행위 속에서 이미 권위를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Lyotard 19~22).

서사적 지식은 지시된 내용을 증명하기 위해 외적인 증거나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이 선험적으로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반복 속에서 획득된 신념이기 때문이다. 서사는 믿음의 지배적인 하나의 형식이다. 그리고 이렇게 직접 정당성을 갖는 서사의 화용법과 지식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탐구하는 과학 담론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4

그렇다면 과학지식은 어떠한 절차를 통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료따르는 다음과 같이 과학담론의 몇 가지 특징을 제시한다(Lyotard 23~27). (1) 과학적 진술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며, 그 진술이 지시하는 동일한 대상에 대한 반대진술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2) 진술과 반대 진술의 공정함이 갖추어져야 한다. 즉 누구든지 하나의 진술에 대해 정당하게 찬성이나 반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청취자가 진술자에 맞먹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담론은 서로 겨눌 수 있는 대등한 쌍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3) 진술에서 지시된 내용은 사실과 부합해야만 한다. 그러나 증명된 진술이 사실과 부합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과학은 이를 변증법적인 토론과 형이상학적인 일관성으로 해결한다. 다시 말해 명제가 지시하는 대상은 증명할 수 있음과 동시에 토론에서 증거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모순되거나 일관성이 없는 증거가 제시되어서는 안 된다.

과학담론의 이러한 특징들은 간단히 말해 입증하고 반증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해 과학적 진술의 정당성은 증명과 논쟁을 통해 합의에 이르게 됨으로써 확보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담론이 이루어지려면 상대자(결국엔 동조자가 되어야 할)가 필요하다. 상대가 없으면 진술이 검증되지 못할 뿐 아니라 정당화될 수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변증법은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며, 심지어는 합의를 전제로 출발한다. 이런 정황을 고려해 볼 때 하나의 명제가 진실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진술의 진정성뿐 아니라 진술자의 능력(수사적 능력)도 포함된다.(주8) 그런데 어떻게 상대자를 찾을 것인가? 여기가 바로 과학 담론이 연구에서 교육으로 넘어가는 지점이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동조자가 될 맞수를 생산하기 위해 교수법이 등장한다. (1) 학생은 교수 보다 덜 알고 있어야 한다. (2) 그러나 학생은 교수와 동등해질 잠재적 능력을 가져야 한다. (3) 그리고 나서 이제 논쟁(변증법적 연구)을 통해 이미 합의에 이른 이전의 진술들은 반증할 수 없는 진리로 탈바꿈하여 교육에 의해 전수된다. 이런 식으로 학생은 연구의 변증법과 과학 지식의 생산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의 화용법과 서사적 화용법의 차이를 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1) 과학지식은 자기 종결적 의미를 갖는 지시적 게임만을 허용한다. 즉 진리 값을 결정하기 위해 진술은 지시적으로 끝나야 한다. (2) 따라서 과학지식은 사회적 결속을 위해 공유되는 지식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초월하여 그 결속을 지시한다. 이로부터 지식과 사회는 서로 외면적인 관계가 된다.(주9) (3) 과학지식의 지시적 진술과 사회와의 소외라는 위의 두 특징의 결과로, 이제 진술의 권위는 진술자에게만 부여된다. 따라서 지식이 언급하는 바에 따라 살려면, 심지어 인간에 관한 진술이라 해도,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4) 과학진술은 반드시 검증되어야만 전수된다. 그러므로 이미 입증된 지식조차도 언제든지 도전을 받아 반증될 가능성이 있다. 사실 입증은 (변증법적)반증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5) 따라서 과학담론에는 과거의 자료를 기억-저장하고 기획하는 통시적 시간성을 취한다. 즉 지식은 생산되기 위해 축적되어야 한다. 과학자는 과거의 자료에 통달해야하지만 동시에 이 자료로부터 벗어 나면서만 새로운 진술을 도출할 수가 있다. 서사적 지식과는 달리 과거는 (망각에 의한)행위의 양식이 아니라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서사지식과 대별되는 것으로서 과학지식을 논의함으로써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1) 과학지식이라는 것이 서사지식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임의적이며 자의적인 것임을 알기 위해서이다. 한마디로 과학적 명제들은 “일반적으로 설정된 규칙의 틀 내에서 게임 참가자들이 두는 수(手)이다. 이 규칙들은 여러 가지 지식의 종류에 따라 고유한 특색을 갖는다. . . . 그러므로 과학지식을 토대로 서사지식의 존재와 타당성을 판단할 수는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 . . (그럼에도) 포스트모더니티 속에서 ‘의미의 상실’을 탄식하는 일은 지식이 더 이상 서사적인 형식이 아니라고 애도하는 것이 되어버렸다”(Lyotard 26). (2) 서사지식이 논증과 증거에 의존하지 않고 전달 과정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반면에(그래서 서사지식은 과학 담론들에게도 관용적이다), 과학자들은 서사적 진술의 타당성을 문제삼고 논증이나 증거에 적절한 주제가 아니라고 결론짓는다. 이들은 서사진술을 야만성이나 후진성 등과 같은 완전히 다른 정신상태로 분류하고, 이러한 반계몽주의에 빛을 던져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Lyotard 27). 예로, 인류학의 일부 성과들을 보라.

5

과학지식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몇 가지 실천을 검토하면서 알게된 사실이 하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과학지식도 여전히 서사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는 점이다. 현대의 지식에서 서사가 사라졌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형태만 달리한 채 여전히 과학지식에도 남아있는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전통사회의 서사지식은 지시적 발화와 규범적 발화를 결합하면서 직접적인 정당성을 갖는다. 다시 말해 서사지식은 인식의 주체와 실천의 주체가 동일하거나 서로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또한 과학 지식에서 지시적 진술이 증명이나 반증 그리고 합의의 절차를 통해 어떻게 실천 주체의 규범이 되는지를 보았다. 합의가 논쟁의 전제이든 혹은 그 결과이든 간에, 합의된 내용은 교육을 통해 실천되는 것이다. 교육은 현대적 의미에서 서사지식의 절차가 된 셈이다. 전통사회에서의 개인은 공동체의 이러저러한 문화적 실천에 참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앎과 행위의 결합이 가능했을 테지만, 지식과 사회가 분리된 현대에 있어 교육은 이 간극을 메우는 매우 긴요한 절차가 되고 있는 셈이다.(주10) 과학 연구를 통해 합의에 이른 지시적 발화들은 교육을 통해 ‘. . .을 해야 한다’라는 윤리와 정의의 규범적 진술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의 절차를 통해 두 가지 중요한 정당화 서사가 서구의 모더니즘을 전후하여 기획되었다. 하나는 정치적인 서사로서 자유와 해방의 주체인 인류이다. 인류의 정치적 표현은 국민이며, 국민은 천부인권의 구성인자인 과학 지식을 누릴 권리를 갖는다. 이것이 좌절되었던 것은 현대 이전의 교회나 군주의 압제에 의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은 계몽의 빛을 되찾아야만 하며, 이는 전 국민의 과학 교육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 대중을 진보의 방향으로 인도하면서, 국가가 민족이나 국민의 이름으로 교육을 통해 통제할 때는 언제든지 이 자유와 해방의 서사가 뒤따랐다.

다른 하나는 철학적인 서사, 즉 인식과 사유의 주체인 정신이다. 료따르는 여기서 베를린 대학 설립과 관련한 한 예(1807~1810년 사이)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Lyotard 32~33). 여기서 그 내력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다만 핵심적인 내용만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과학 제도 정책에 대한 훔볼트(W. Humboldt)의 보고서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그 자신의 진리기준에 따라서만 존재하는 과학이 민족의 정신적 도덕적 교육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식의 목적으로서 진리와 사회 정치적 실천을 요구하는 규범적 의무가 동렬에서 서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진술에는, 사실상 진리와 실천이 서로 분리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에 생긴 이 갈등은,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 있는, 자기 종결적 형식을 갖는 지시적 진술과 사회적 실천에 개방적인 규범적 진술간의 충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진리는 이제 인식의 문제 뿐 아니라 수행해야할 규칙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어떻게 서로 다른 형식의 진술을 단일화 할 수가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훔볼트는 세 차원의 정당화 기획을 마련하고, 이를 하나의 원리 속에서 통합하는 서사를 생각한다. (1) 보편적 지식(혹은 보편적 문법)의 기획. 이것은 실증과학의 몫이다. (2) 보편적이고 통합적인 윤리의 기획. 이것은 국가나 정치의 영역이 될 것이다. (3) 그리고 이 두 기획을 하나의 이데아 속에서 단일화하려는 기획. 결국 이 기획은 과학적 지식이 언제나 규범적 정당성과 일치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그렇다면 마지막 기획의 주체는 누구인가? 현대의 독일 관념론에 있어 철학은 언제나 과학 지식과 정치나 윤리의 기능적 한계들을 묶는 보다 거대한 하나의 주체를 상정한다. 진정한 지식의 주체는 이제 실증과학의 주체도 아니며 실천적 정치 주체도 아닌 사변적 주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주체는 단일한 하나의 정신 혹은 생명의 전개 속에서 분명해진다. 헤겔(F. Hegel)의 역사철학은 바로 이 주체가 현실화되는 과정의 역사를 거대한 메타 서사로 전개하고 있다. 이 서사는 메타서사이며 또한 서사자는 메타주체이다. 왜냐하면 이 주체는 더 이상 실증성에 묶여 기능화된 과학자들이 아니며 국가나 국민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다 초월적이고 보다 단일한 하나의 원리, 즉 하나의 체계이다. 그리고 이 체계는 과학을 비롯하여 이러 저러한 부차적인 기능적 주체들을 지시하고 호명한다. 사변적 지식은 국가나 사회 과학 등이 무엇인지를 정의할 자격을 스스로 갖추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할 수 있는 정당성을 자신 내부에서 찾는다: “이 역할은 차원을 바꾸면서 시작되는데, 자신의 지시대상(자연, 사회, 국가 등)에 관한 단순한 실증적 지식이기를 그치고 그 지시대상에 대한 지식의 지식이 되는 것, 즉 순수사변이 되는 것이다. ‘생명’과 ‘정신’이라는 이름 아래 지식은 자기 자신을 명한다”(Lyotard 34~35).

이와 관련하여 좀 다른 형식이 있다. 그것은 인식의 주체가 아니라 실천적 주체에게 그 권위를 부여하는 경우이다. 주체는 스스로를 지배하고 자기 자신의 규칙을 정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주11) 자신이 규칙과 법을 만들고 지켜야하는 문제. 따라서 이제 중요한 것은 지시적 진술(‘지구는 둥글다’)을 정당화하는 문제가 아니라, 윤리나 정의와 관련된 규범적 진술(‘. . .을 해야한다’ 혹은 ‘. . .을 하라’)을 정당화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실증적 지식은 이러한 윤리적 규범이나 도덕적 명령을 설득하고 현실화하는 기능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 지식은 인식이 아닌 실천의 주체를 위해 봉사하는 역할, 즉 국가나 사회의 목적에서 하나의 수단이 된다. 이러한 사회에서 과학적 진술의 유일한 기능은 자율적인 실천주체의 해방을 위해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마르크스주의도 그 한 예일 수 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지금까지 료따르의 논의를 따라 지식을 정당화하는 서사의 이러저러한 형태들을 살펴본 이유는, 이들의 내용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우선적 목적은 아니라는 점이다. 해방, 정신, 자율 등과 같은 정당화 서사의 내용을 비판하는 문제는 여기서는 부차적인 것이며, 논의의 범주 역시 다른 수준의 것이다. 우리가 이 서사들의 긴 내력을 살펴본 이유는 지식이 어떤 근거에 의해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는지, 다시 말해 어떠한 형식을 통해 그렇게 하는지를 보려는 의도였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6

우리는 이미 지식에 있어 모더니즘이 지식 자신에 대한 회의(懷疑)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를 두 원인으로 분류했으며, 첫 번째로서 외적인 요인은 이미 언급을 했다.(주12) 이 외적 요인은 정신과 해방이라는 대서사의 통일성과 정당화의 힘을 쇠퇴시킨다. 이제 그 두 번째로 내적 요인을 말해야겠다. 그것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니체는 절대적 권위에 익숙해 있는 정신이 어떻게 절대적 권위에의 깊은 욕구로 나아가는가를 보여주었다(니체 257). 이와 관련하여 관념철학은 다른 모든 개별과학을 통일하고 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지식의 지식으로 군림하고 있었음은 이미 살펴본 바이다. 그런데 이제 그 욕구는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시작한다. 자기 자신을 그 내부로부터 정당화할 수 없는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다. 이것은 사변철학이 실증 과학을 정당화했던 규준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제 사변철학은 자신의 정당성을 자기 자신의 규준 위에 위치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어떻게?

플라톤의 Symposium을 읽어보면 자신의 진술이 참이라는 각각의 주장들이 있지만, 담론에 있어 자기정당화의 문제는 의심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진술자들은 자신의 진술이 참이라는 것을 일종의 도약으로 해결하고 있는데, 바로 이 서술적 도약을 통해 논리적 전개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일단 이 서술적 도약에 성공하고 나면 문제는 쉬워진다. 내가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서술적 도약은 말하자면 인식론적 정립(position)을 의미한다. 이는 예를 들어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과정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글쓰기는 두 수준에서 진행되는데, 하나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의 논리적 전개이며, 다른 하나는 이 논리적 전개가 가능하기 위한 명제나 전제의 정립 즉 서술적 도약이다. 그리고 이 두 수준이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 문제는 이 서술적 도약의 발생이 무 규정적으로 제시된다는데 있다. 서술자는 이 단계에서 깊은 망설임에 직면하는데, 이러한 곤란은 서술자의 임의적 선택에 의해 해결된다(이것은 일종의 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이 곤란이 해결되고 나면 이에 근거한 논리적 전개는 수월해진다. 고대철학의 변증법이 논쟁과 합의에 있어 주요한 수단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서술적 도약에 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데리다(J. Derrida)는 형이상학에 대해 비판이 아닌 해체를 통해 이 도약의 문제를 이용한다. 그에 따르면 체계들 간의 논쟁은(하나의 진술은 하나의 체계이다)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정립된 각자의 진술들을 하나의 논쟁 안에서 동일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그것은 논리상 처음부터 합의의 지평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며, 나아가 변증법적이지도 않다. 이런 이유로 그의 해체 형식은 논쟁 대상과 동일한 양의 또 다른 진술(체계)로써가 아니라, 대체로 이 도약이 어떤 근거에 의해 발생한 것인가를 질문하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변적 진술을 보자: “과학적 진술은 하나의 보편적인 발생과정 속에 자신을 위치시킬 때에만이 지식이 된다”(Lyotard 38). 그러나 우리가 우선적으로 이 사변적 진술의 정당성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이 진술 자체가 어떠한 보편적 발생과정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는가를 물어야 한다. 또한 보편적 발생과정이 어떤 근거에서 존재하고 있는지도 보여주어야만 이 진술은 정당성을 갖게될 것이다. 진리의 정당성에 관한 질문이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올 때, 그것은 곧바로 허무주의를 낳는다고 니체는 가르친다. 허무주의는 궁핍한 상태 즉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다(『도덕의 계보』뿐 아니라 『권력에의 의지』여기저기를 보라). 료따르는 이를 “정당화 자체의 요구에 의해 야기된 탈정당화 과정”, “지식의 정당성 원리의 내적 침식”(Lyotard 39) 혹은 “서사의 회귀에 의한 배리”(Lyotard 60)라고 부른다. 만일에 여러 개별지식들을 통일하는 메타서사에 이러한 내적인 침식이 일어났다면, 이 지식들을 묶는 고리는 끊어질 것이다.

인류의 해방과 같은 서사 역시 그 내적 한계로 인해 문제가 야기된다. 계몽주의적 서사는 과학적 지식이 발견한 지시적 진술을 실천주체에게 교육함으로써 가능해지는데, 사실상 지시적 진술과 규범적 진술간의 논리적 연관이 없다. 예를 들어 “그 문은 닫혔다”라는 지시적 진술과 “그 문을 열어야 한다”는 규범적 진술을 연결시킬 수 있는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것이다(Lyotard 40).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이러한 연결이 가능한 것은, 인식주체가 실천주체로 전이되는 과정에 권력담론이나 정치담론 등과 같은 다른 영역의 새로운 진술들이 개입하기 때문이다(현실적으로 볼 때 새로 개입되는 진술들은 대체로 명령적 혹은 선언적 진술이다). 지식의 정당화 서사는 오히려 그 원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다른 절차의 진술이 요구된다. 이런 점에서 과학 지식이 운용하는 지시적 진술은 규범과 실천을 정당화할 능력을 상실한다. 지시적 진술은 규범적 진술과는 독립된 그 자신만의 발화 규칙들을 갖는다. 따라서 그것은 규범적 진술을 통제하거나 그것을 정당화할 상위원리가 되지 못한다.

메타서사가 안고 있는 문제는 특정한 형태의 진술(지식)이 그 자신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다른 형태의 진술들과 맺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정신이나 해방의 서사가 정당성 자체에 대한 물음을 자신에게 되돌릴 때, 그것은 자신의 한계에 직면했음을 예증한다: 내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이것은 참이다! 하나의 진술이 타당성을 갖는 과정에서 한계에 직면했을 때, 그 진술은 반드시 새로운 진술을 요구하거나 다른 진술들과 동렬의 위상을 갖게 된다. 따라서 정신이나 해방이라는 메타서사의 기제아래 놓여있던, 실증과학이나 규범적 진술들의 주체를 단일화할 고리가 끊어짐으로써, 개별적인 지식 영역들은 상호 충돌하면서 자신들의 경계를 이루고 있던 구획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며, 이에 따라 새로운 지식 영역의 출현은 불가피한 현실이 되고 있다. 또한 지식의 영역이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함으로써 이 모든 연구들을 하나의 메타서사 안에 용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근자에 야기되었던 학제간 연구의 문제도 바로 이러한 현실에 기인한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의 지식의 조건을 이렇게 요약해보자: 철학적 혹은 인본주의적 메타서사가 자신의 정당화 임무에 실패하고 위기에 직면했다.(주13)

7

지금까지 지식에서 정당화와 서사의 문제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메타서사에 의한 지식의 정당화가 어째서 자기 자신을 탈정당화 하는지도 보았다. 그러나 료따르는 메타서사의 실패를 비관적으로 보지 말자고 제안한다. 지식의 정당화 문제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도 역시 제기되고 있으며 또 제기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체계의 문제이며 이로부터의 절대적인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주14) 그러나 문제는 지식의 정당성이 어떻게 제기되고 있는가에 있다. 지식에 있어 퇴보는 진리나 규범에 대한 물음, 즉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규범인지를 탐구하고 결정하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확립된 체계 안에 개별과학들을 묶고 이들의 정당성을 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거나, 이들의 정당성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지시적 진술은 규범적 진술을 정당화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메타서사는 단일한 원리 아래 다른 형태의 진술들을 정당화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오히려 메타서사의 배리는 우리로 하여금 지식의 정당화 자체를 문제제기 하도록 한다. 자신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한계에 직면할 때, 심지어 그 때에만, 지식은 그 한계를 넘어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간다. 새로운 형태의 지식이 발생하기 위한 조건은 확립된 지식의 내적 배리에 있다. 지식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 즉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懷疑)는 이런 의미에서 지식의 위상을 왜소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왜소한 것은 정당성을 확신하고 자신의 위상을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료따르가 포스트모던 지식을 일종의 게임으로 비유했다고 해서, 이 용어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아야겠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료따르의 논의를 수용하면서도, 그의 술어들 속에서 게임이라는 비유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비유는 우선 과학담론이 서사지식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인 진리가 아님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게임에서의 규칙은 계약 당사자들에 의거하고 있으며, 이로부터 당사자들의 관계는 동렬의 위상을 갖는다. 따라서 게임에서 당사자들이 제시하는 이러저러한 수(手)들은, 게임의 규칙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에도, 그 게임 자체를 새로운 흐름 속에 위치시킨다. 그것은 또한 주체의 새로운 관계를 전제한다. 단일한 체계 내에서, 그 체계가 부여하는 기능에 제한된 개별 지식 영역과 단일한 서사의 심층적 관계는, 각각의 지식으로 하여금 어떠한 다른 곳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이런 경우 우리는 심층을 표면으로, 다시 말해 우리가 확립했던 지식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드러내야할 필요를 느낀다. 료따르는 이때 요구되는 정당화가 바로 표면의 기술로서 배리라고 지적한다. 몇 몇 포스트모더니스트가 모순이나 부정이 아닌 역설이나 배리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개별적인 것들의 관계를 표면화함으로써 이들이 동렬의 위상을 갖도록 한다. 따라서 배리의 추구는 새로운 규칙이나 새로운 진술의 채용을 타당하게 한다. 심지어 그 새로운 진술이 심층적으로 확립된 체계에 위협적인 것이 되더라도 말이다.

표면화는 새로운 진술에 대해 개방적이다. 수학자들이 점, 선, 평행선과 같은 수학적 공준을 체계화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환원론에 빠지지 않기 위한 기제였을 뿐이지, 이를 토대로 다른 모든 공리들을 묶는 단일한 체계를 세우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잠정적인 규칙일 뿐이다. 만일 새로운 진술에 의해 이 규칙을 수정해야할 필요에 직면한다면(이것은 대체로 배리에 의해 발생한다), 그들은자신들의 규칙을 수정하고 새로운 게임으로 나아간다(예로, 비유클리트 기하학과 평행선 공준의 경우). 이러한 생각은 메타서사를 근간으로 하는 인본주의적 담론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지식이 솔선하여 자신을 회의하고, 포스트모던이 체계의 좌절을 통해 사유하듯이, 자신 안에 내재된 역설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는 것은 실천적 관점이든 이론적 관점이든 중요한 문제이다. 메타서사의 실패는 역설적으로 우리 자신의 한계에 대한 인식의 조건일 수 있으며, 나아가 그 조건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서사로 치닫게 한다. 실천적 지식에 대한 마르크스의 지적처럼, 우리는 우리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한다. 해답이 미리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에 상응하는 해답이 있다는 말이다. 해답은 이미 문제 제기 안에 내재한다. 마찬가지로 지식은 지식 주체가 어떤 문제를 제기하는가에 따라 그 자신만의 고유한 역사를 갖는다. 포스트모던 지식인들이 해답은 발견이 아니라 발명의 문제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고문헌

Anderson, Benedict.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London: Verso, 1983.

Deleuze, Gilles. Masochism: Coldness and Cruelty. trans. Jean McNeil. New York: Zone Books, 1991.

Derrida, Jacques. Margins of Philosophy. trans. Alan Bass.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Hume, David. I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ed.. C. W. Hendel. New York, 1955.

Luria, Aleksandr Romanovich. Cognitive Development: Its Cultural and Social Foundations. trans. Martin Lopez and Lynn Solotaroff. Cambridge and London: Harvard University Press, 1976.

Lyotard, Jean-François. The Postmodern Condition: A Report on Knowledge. trans. Geoff Bennington and Brian Massumi.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4.

McLuhan, Marshall. 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 of Man. New York: McGraw-Hill, 1964.

Harvey, David. 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 Cambridge: Basil Blackwell, 1990.

니체, 프리드리히. 『권력에의 의지』. 강수남 옮김. 서울: 청하, 1988.

————-. 『도덕의 계보』. 김태현 옮김. 서울: 청하, 1999.

들뢰즈, 질. 『대담: 1972~1990』. 김종호 옮김. 서울: 솔, 1993.

부르디외, 삐에르. 『자본주의의 아비투스―알제리의 모순』. 최동철 역. 동문선, 1995.

옹, 월터.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이기우, 김명진 역. 서울: 문예출판사, 1995.

________________________

(주1) 이 글에서의 인용은 이 책의 영역본을 참고하였다.

(주2) 이와 관련하여 기술 매체는 타자성의 요구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다른 존재들을 끊임없이 불러들인다. 매체의 발달은 각 지식 영역들간의 교류 뿐 아니라 지배와 종속의 정치적 관계들을 거의 빛의 속도에 상당하는 빠르기로 활성화한다. 뒤에서 계속 논의하겠지만, 메타서사의 출현은 아마도 매체의 힘에 상당히 의존했을 것이다. 이것은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나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논의에서 발견된다. 앤더슨의 주요 논의 가운데 하나는: 전통사회는 타자 영역을 알지 못한 채 그 자신만의 고유한 서사형식을 보존할 수 있었고, 따라서 개인에 있어 공동체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발생했지만, 매체의 힘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현대사회는 매체의 추상적 결합능력에 의해 개인으로 하여금 추상화된 공동체를 갖게 한다. 이 기능은 우선 신문이나 소설 등과 같은 초보적 형식의 대중 매체에 의해서라는 점이다. 헤겔은 현대인들이 아침에 신문을 보면서 기도한다고 말하곤 했다. 중세인들에게 기도가 공동체를 형성하는 긴요한 매체였듯이, 신문은 현대인들에게 공동체를 형성하는 지배적 매체이다. 또한 맥루한은 매체의 전체화가 어떻게 개인들의 고유한 지각 체계를 변형시켜서 추상화하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기술매체 자체에 이미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매체는 우선 사회와 인식을 전체화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대 사회가 거대한 인류 공동체라는 관념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현대성의 기획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전체를 상상한, 전체화의 기획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은 반드시 합의를 전제로 하고 합의를 목적으로 하는 유기체적 지식에 의해 정당화된다.

(주3) 예로, 각 국가들은 IBM이나 Microsoft와 같은 다국적 기업 상품의 사용자들이다. 심지어는 중요한 정책결정 관련 자료의 처리조차 이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주4)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돈다”나 “물은 섭씨 100도에서 수증기가 된다”와 같은 지시적 명제를 들 수 있다. 이 명제는 발화자나 수신자의 모든 실천적 행위를 배제하고 오로지 참과 거짓이라는 판단의 실행만을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시적 진술은 사변적이며, 인식론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명제를 문장과 구분하여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것만을 명제라 칭한다.

(주5) 규범적 진술은 명령, 조언, 탄원, . . . 등과 같은 실천을 매개로 하는 진술을 포함한다. 화용론은 언어의 지시적 의미 뿐 아니라, 언어의 질료적 요인들과 실천적 의미까지도 포함한다.

(주6) 서사적 사고는 사물에 대한 이해를 추상적 개념보다는 공동체와 관련된 경험에 의존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야기를 통한 지식은 경험적일 뿐 아니라 구체적이다. 예를 들어, 서사 형식을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원’과 같은 추상적 도형을 이해하지 못한다. 대신에 이들은 이를 ‘달’이나 ‘쟁반’과 같은 실제 사물들을 통해 이해한다. 또한 이들은 추상적 성질을 갖는 명사나 대명사보다는 체험적 실사인 ‘형용사’나 ‘동사’등에 많이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이 같은 공동체 문화에 관한 재미있는 설명은 월터 옹의 책 79~92 를 참조하라.

(주7) 이와 관련하여 루리아(A.R. Luria)는 1931년에서 32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우즈베크 공화국과 키르키스 공화국 오지에서 구술문화에 속한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현장조사를 했는데, 원주민에게 사물의 정의에 관한 질문(“나무가 무엇인지 설명해 보십시오”)을 했을 때, 구체적인 사물인 경우에도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왜 그래야 하죠? 나무가 무엇인지 누구나 알고 있거든요. 아무도 나에게 그따위 설명을 듣지 않아도 되거든요”(읽고 쓸 수 없는 한 농부).(Luria 86)

(주8) 흥미로운 것은, 전통 형이상학에 따르면 진술자의 수사 능력에 의존하는 지식은 진리의 탐구에는 적절치 못한 지식이다. 진술자의 능력이 왜 중요한가? 여기서 수사적 운용은 진리에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심지어는 진리에 도달하는 과정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왜냐면 이때의 수사 능력이란 우회로를 통해 본질에 도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진리로부터 두 번 분리된 셈이다. 그래서 전통 형이상학에서는 문학 언어가 직접 지시하는 철학 언어에 비해 권위가 덜 한 것이 된다. 철학 담론 안에서만 결정된, 시적 언어에 대한 철학 언어의 우월함에 관해서는 Derrida “Tympan” Margins x~xxix를, 그리고 개념화할 수 없는 우회로를 철학언어로 개념화하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은유론에 대한 해체는 Derrida “White Mythology” Margins 209~244 를 참고.

(주9) 우선 과학자들은 전문적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며, 이러한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과학자 사회의 코드를 이해할 수도 접근할 수도조차 없다. 료따르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이것은 과학제도와 사회 간의 관계 문제인데,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러한 지식을 가진다고 해서 이 외재성이 해결될까?(Lyotard 25)

(주10)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교육은 이미 확립되었거나 합의된 진술만을 전수하는 과정이라고 말할수 있다.

(주11) 현대적 의미에서 법의 정당성은 상위 원리로서의 선(Good)에 의존하는 고전적인 의미의 법과는 그 궤도가 다르다고 들뢰즈(Gilles Deleuze)는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적 의미에서의 법은 선이라는 초월적 규준이 아니라 내재적인 정당성을 가지는 순수 형식으로 존재한다. 들뢰즈는 이것이 칸트(I. Kant)와 카프카(F. Kafka)의 관점에서 본 법이라고 지적한다. 예컨대, 법을 지켜야하는 사람은 법을 준수하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법을 준수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순수 형식으로서 법의 실체를 아는 길은 오로지 법을 위반하고 그 법적 결과인 처벌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법은 대중을 선으로 이끄는 도덕적 대리자가 아니라, 스스로 순수형식의 상위원리가 되어 죄를 생산하는 기계가 된다. 법과 관련하여 죄의식의 발생에 관한 문제와 이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도착적 저항기제에 관한 논의는 들뢰즈의 책 <마조히즘: 냉정과 잔혹>(Masochism: Coldness and Cruelty), 81~90을 참고하라.

(주12) 그 외적인 요인에 덧붙여 한 가지 더 말하자면, 그것은 하비(David Harvey)가 자세히 설명했던 유연적 축적(대략 1930~60년대에 걸친)에 의한 사회적 재배치의 결과라는 점이다. 초기 자본주의의 위기(대공황을 비롯한 전반적인 이윤율의 저하 및 이에 따른 실업증가)가 케인즈 경제학 및 뉴딜 정책과 같은 유연적 조절정책에 의해 어느 정도 극복되면서, 좌파에게 있어 공산주의적 대안은 좌절되고, 경제 주체는 개인주의적 욕구를 제한적으로나마 안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유연적 축적의 결과 주체의 개인화 혹은 파편화와 이에 따른 좌파의 좌절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은 Harvey 141~172 를 참조하라.

(주13) 하비는 유연적 축적을 자세히 설명하고 나서, 그러나 여전히 자본주의는 변하지 않았다고 적는다(Harvey 189~197). 그의 의도는 자본주의가 여전히 억압적 구조로 작동하고 있으며,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스트의 파편화된 메타서사는 자본의 거대구조에 맞서기 힘들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렇다고 해서 정신의 메타서사를 다시 복원시켜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부르디외(P. Bourdieu)의 아비투스(habitus)를 잠깐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선진 자본주의와 이식된 자본주의(제3세계나 식민지국가들) 사이에 동일시 할 수 없는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그에 따르면 이식된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하층 계급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행위성향(합리적으로 계산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등의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여전히 전통적 성향을 고수한다. 초기자본주의 노동계급과 이식된 자본주의의 하층 노동계급을 동일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환원할 수 없으며, 이들의 성향 체계 자체에 서로 다른 리듬이 존재하며, 체제에 대해 서로 다른 반응을 가진다. 혁명의 견지에서 볼 때도 이들은 동일한 주체가 아니라는 점이 요지이다. 하나의 단일한 체제 안에서도 각 장(field)들마다의 고유한 아비투스의 리듬이 존재한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자본의 억압 구조는 이 리듬들 속에 더 미시적인 방식으로 침투해 있으며, 각각의 장에서 주체의 아비투스를 통해 서로 다른 양태로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주14) 결과적으로 볼 때, 이를 주장하는 것과 비판하는 것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재미있는 예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Anti-Oedipus를 출판한 후 기자들과 대담하는 자리에서, 이 책이 제시한 정신분열 분석이 결과적으로 정신분열증을 낭만화 한 것이 아닌가라는 오역의 가능성에 대해 한 기자로부터 비난 섞인 질문을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 . 오역의 뒤에는 반드시 정치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 . . 우리는 과정으로서의 정신분열증과 치료 받아야할 임상적 실체로서의 정신분열을 구별짓고 있습니다. . . . 우리는 이 단어들의 정신의학적 의미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회적-정치적으로 규정된 의미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우리가 그 말들의 병리학적 적용을 몇 몇 경우로 제한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들뢰즈 54). 실제로 데이비드 하비는 정신분열적 주체라는 용어를 병리적 실체로 이해한다. 이에 대해서는 Harvey 352 를 읽어 보라.

 

본 글은 2001년 가을에 작성된 미발표 논문을 일부 수정하여 다시 수록한 것임.

 

지식과 정당화: 메타서사에 의한 정당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