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정당화: 최대 실행성에 의한 정당화

지식과 정당화: 최대 실행성에 의한 정당화

이 글은 료따르(Jean-François Lyotard)의 저작인 La Condition Postmoderne을 해석하면서 지식과 정당화의 문제에 관한 논의를 재구성한 것이다. 한편에서는 그의 논의를 따르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를 보존하면서 다른 관점들과 결합하거나 다른 관점으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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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연구 조사의 메커니즘은 두 가지 면에서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다. 개별 과학들을 단일한 원리로 증명할 메타서사의 실패는 각각의 과학적 진술의 발화자와 이를 수용하는 수신자의 관계에 더 복잡한 화용론적 규칙들을 요구한다. 우선 논증이나 논쟁 방식이 다양해지고 있으며, 다음으로 증명이나 증거확립의 수준이 복잡해지고 있다.

어떠한 지시적 진술이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발신자와 수신자간에 형성된 일련의 언어 규칙이 필요한데, 여기서 언어의 도입과 사용은 화용론적 조건에 부합해야 한다. 발신자는 자신의 규칙을 설정하고 이를 수신자가 동의할 것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과학적 진술을 표현할 특정한 언어가 제안되고, 이 언어에서 사용될 수 있는 특정한 상징들과 이 상징들의 정의를 모두 포함하는 공리가 설정된다. 또한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제안된 언어의 형식적인 표현기술이 채용되어야 한다. 물론 표현기술은 동의를 얻는데 있어 주요 관건이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 과학자들은 문장가이며 이야기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공리의 형식적 조건들을 제안된 언어가 어떻게 충족시키고 있는가이다. 이를 결정해주는 메타언어가 필요하며, 이 메타언어는 논리이다. 그러나 과학자가 하나의 공리를 결정하고 이 공리에 따라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진술을 생산하는 것과, 이번엔 반대로 과학자가 하나의 사실에 대해 진술하고 그 진술에서 사용된 언어의 공리들을 발견하려는 것 사이의 선택은,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험에 의해서이다. 즉 특정한 언어의 사용과 그 진술을 타당하게 하는 공리의 결정과 결정된 공리에 따라 운용되는 진술의 타당성은 서로 논리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그것은 발화자 혹은 발화자와 수신자간의 선택적 운영에 따른 결과인 것이다.

그렇다면 공리는 어떤 규준에 의해 타당성을 갖는가? 공리의 형식체계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조건을 갖는다. 우선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하나의 명제가 그 부정에 대해 일관성을 갖지 않는 체계는 그 명제와 그 부정을 동시에 인정하는 역설이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통사적 완결성을 가져야 한다. 하나의 완결된 체계에 새로운 공리가 첨가된다면 그 체계는 불안정한 구조를 갖게될 것이다. 또한 결정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어떤 진술이 그 체계에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는 효율적인 절차나 운영규칙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떠한 공리는 동렬의 다른 공리들과 구별되어야 하며 독립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괴델(Kurt Gödel)이 수학체계 내에서 논증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는 역설의 발생을 입증했듯이, 하나의 체계는 위와 같은 내적 완결성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모든 형식 체계가 그 자체로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공리의 메타언어인 논리는 일상언어에 의해 설명된다. 일상 언어는 보편적 동의를 추구하는데 수반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어떤 명제의 부정(하나의 진술에 반대되는 진술)에 대해서는 일관성을 갖지 못한다. 즉 그것은 역설의 발생을 허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방식의 정당화 문제가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지시적 진술이 진리라고 인정되기 위해서는, 그 진술을 결정하고 입증할 공리체계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또한 그 공리를 발신자와 수신자가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발신자와 수신자는 그 공리가 형식적으로 충족되어 있다고 인정해야만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과학은 그 내적 체계의 논리적 완결성에 의해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 담론 참여자들간의 계약과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언어(공리) 덕분에 유지될 수가 있다. 즉 과학의 정당성은 합의에 의해 결정된 기능적 규준에 의해 성립된다. 진리라고 결정할 수 있는 어떠한 규준이 미리 상정되고 그 공리가 수용되어야만 진술이 참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규준은 대체로 요망이나 규범에 의해 구성된다. 따라서 과학 지식에 있어 논증(의 진리)은 허용 가능한 논증 수단을 정의해주는 서술적 도약(최초의 인가)에 종속되어 있다. 이로써 과학 지식의 두 가지 특징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새로운 진술이 진리로 인정되는가 아닌가는 참여자들의 계약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 (2) 과학 지식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의 진보가 있다는 점. 하나는 확정된 규칙 내에서의 새로운 진술이나 논증이 제시되는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이로 인해 새로운 규칙이 창안되는, 즉 새로운 게임이 되는 측면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보편적 메타언어는 다양한 형식적 공리체계로 대체되고, 그 다양성으로 인해, 보편적이지만 일관적이지는 않게 된다. 하나의 완결된 체계에 위험수위의 정도를 가늠하는 부수적 요소로서 역설이나 배리가 오히려 이러한 체계에서는 새로운 진술을 발생시키는 추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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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지식에 있어 증거를 생산하고 확보하는 문제는, 지식이 전혀 다른 수준의 화용법과 결합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증거의 생산은 연구 조사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과학적 진술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고안된 논증 과정의 일부이다. 서사적 지식과는 달리 과학적 지식의 권위는 증거의 양에 달려있다. 그 증거가 과학자의 진술을 지지하거나 예증하는 경우 뿐 아니라 반증하는 경우에도 이 원칙은 달라지지 않는다. 과학 논문에서 인용의 양이 얼마 만큼인가는 그 논문의 권위를 결정하는데 있어 주요 관건이 된다. 이것은 인용의 수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인용의 양은 그것이 담고 있는 체적이나 용량과도 관계가 깊다. 보다 권위 있는 과학자에 의해 채택된 인용은 다른 진술을 하는 과학자의 권위를 입증하는 것이며, 이러한 관계는 상호 부조의 원칙으로 반복된다. 어떤 경우든지 인용이나 증거는 양의 체계이며 권력의 체계로만 작동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증거가 안고 있는 더 근본적인 문제는 채택된 증거가 어떻게 타당한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하나의 진술을 입증하고 증명하기 위해 선택된 증거는 그 자체의 증명의 요구를 안고 출발한다. 따라서 그 증거가 타당한 것이라고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 혹은 그 증거는 어떻게 생산된 것인가? 와 같은 질문이 제기되기 시작하면 증거 생산의 문제는 다른 담론으로 넘어가게 된다. 과학적 관찰은 주로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관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인간의 경험적 관찰은 그 정확성에 있어 한계를 갖는다. 감각이나 지각의 힘이 판명한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심지어는 방해물이 되고 있다는 점은 고대철학에서도 이미 제기되고 있는 문제였다.(주1) 여기에 테크놀러지가 주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기계 장치는 신체적인 감각을 대신하고, 이 보다도 더 정확한 양(量)의 체계로 구성된 인공적 보조장치이다.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가 우려했던 바와는 다르게, 여기서 문제는 테크놀러지를 불순한 것으로 간주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테크놀러지는 이 문제를 이미 넘어서 있다. 어쨌든 이러한 정황을 종합해보면, 테크놀러지의 변하지 않는 한가지 원칙이 도출되는데, 그것은 증거를 생산하기 위해 들인 에너지의 소모를 최소화하고, 그로부터 유도해낸 변화 즉 정보나 증거의 산출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테크놀러지는 증거 생산으로 하여금 정확히 (부르주아적) 경제 원리를 따르게 한다. 테크놀러지의 최대 실행(optimal performance)은 최소 비용과 최대 효율을 원칙으로 하면서, 정의 진리 아름다움과 같이 부르주아 경제원칙의 관점에서 볼 때 고비용 저효율의 원리를 갖는 가치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최대 실행성은 경제원칙에 입각한 합리적 효율성과 일치하는 게임인 것이다: “기술적 수(手)는 다른 기술적 수 보다 에너지를 덜 소비하거나,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면 좋은 수이다”(Lyotard 44).

서사적 지식을 대신하여 등장한 과학적 지식은 더 많은 증거의 생산을 요구하며, 증거 생산의 최대 실행성을 현실화 할 기계 장치는 새로운 비용을 발생시킨다. 다시 말해 부(富)가 없으면 증거도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새로운 진술이 설득력을 갖는 권위 역시 있을 수가 없다. 지식의 검증 과정은 일종의 부의 검증 절차와 다르지 않게 된다. 이로써 최대 실행성을 지식 추구의 규준으로 삶는 경우에는 부와 효율성과 진리가 동일한 과정 안에서 서로 결합하는 등식이 성립된다: 부 = 효율성 = 진리. 돈이 없으면 연구도 증거도 효율성도 없다. 이로써 돈은 진리의 조건이 된다. 또한 부르주아 경제원리에 따라 지출은 곧 투자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며, 투자는 지출된 비용을 웃도는 효율성과 생산을 요구한다. 즉 부의 투자를 통한 최대 실행성은 잉여가치를 최대화하는 과정이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모든 문제는 언제든지 잉여가치의 최대 실현으로 귀결되는데, 따라서 지식 생산은 이윤을 창출하는 상품 생산 과정에 이르게 됨으로써, 즉 자본의 순화과정에 삽입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사회적 생산력이 된다. 애초에 테크놀러지로 하여금 생산성을 최대화하고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역할을 갖도록 촉구했던 것은 지식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부와 그 결과로서 권력에 대한 욕구였다. 과학 지식의 이러한 일련의 중상주의화는 컴퓨터화된 현대 사회에서 더 두드러지는 경향을 갖는다. 비교적 재 상업화에 유리한 테크놀러지 분야가 아닌 기초연구 분야나, 정신이나 해방이나 자유를 기치로 과거 메타서사에 익숙한 인문과학 분야는, 최대 생산성과 거리가 먼 만큼 경제 권력으로부터의 보조금 혜택도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최대 생산성에 근접한 거리에 포진된 분야에 따라, 연구자들의 취업 등급 역시 재배열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연구 목표는 이들에게 돈을 지불하는 (경제)권력의 담론을 확장시키는 과정과 일치한다. 과학자나 기술자들은 더 이상 진리나 자유가 아니라 권력을 위해 연구한다.

테크놀러지의 최대 실행은 증거 생산의 능력을 최대화하고, 따라서 제기된 진술이 참일 수 있는 능력도 증가한다. 과학 지식에 보조적 수단으로 도입된 기술은 최대 실행성의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진리를 결정하는 관건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술자의 최대 실행능력(기술 능력)의 증가는 진술의 권위의 증가를 의미하고, 권위의 증가는 발언의 기회의 증가를 의미하고, 이것은 나아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의 증가를 의미한다: “이러한 절차는 다음과 같은 틀 속에서 작동한다. 현실은 과학 논쟁에서 증명에 쓰일 증거를 제공하고, 사법적 윤리적 정치적 본질에 대한 설명과 확신을 제공한다. 따라서 모든 게임의 승리는 현실에 대한 지배에 달려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테크놀러지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테크놀러지를 강화함으로써 현실을 강화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공정하거나 정의로울 수 있는 기회도 증가한다. 역으로, 과학 지식과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위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테크놀러지의 제어능력 또한 효과적으로 강화할 수가 있게 된다. 이것이 권력에 의해 정당화가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권력은 좋은 실행성일 뿐 아니라, 효과적인 검증이자 훌륭한 평결이다. 그것은 과학과 법률을 효율성에 기초하여 정당화하며, 효율성을 과학과 법에 기초하여 정당화한다. 이것이 최대 실행능력을 기반으로 해서 조직되는 체계와 동일한 방식의 자기 정당화 과정이다. . . . 그러므로 권력의 증대와 자기 정당화는 이제 자료의 저장과 접근 그리고 정보의 운영 능력이 된다”(Lyotard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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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에 따른 생산의 최대화 혹은 효율성의 최대화를 정당성의 기준으로 간주하게 될 경우, 지식 연구뿐 아니라 그 교육에도 커다란 변화를 야기한다. 최대 실행성은 (고등)교육을 사회 체제의 하위체계로 편입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주로 체계이론의 관점에서 가능한 생각이다. 여기서 고등교육의 역할은 사회 체제가 실행능력을 최대로 실현할 수 있도록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교육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과정에 따라 기능화된다. 우선 고등교육은 국가 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획된 하나의 기능 분야가 되는데, 이는 대체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상품생산과 판매의 전문화에 따라 그 고유한 기능이 분류된다. 특히 첨단 테크놀러지 분야나 전문 기술 분야에 대한 수요가 점점 늘어나게 되면서, 교육은 이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기술 인력의 양성으로 나아간다. 기능화된 교육은 그 전수 내용 역시 확립된 지식의 조직적 체계에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학생들은 체제나 담론이나 제도 자체에 대한 실험적 지식이 아니라, 반대로 이들에 의해 분류되고 기획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회 전체의 실행능력을 최대화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실험적 지식은 혼란만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예로, 정규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매체(컴퓨터나 기계장치 뿐 아니라 언어나 사유하는 방법적 틀까지 포함)에 관한 확립된 사용법을 배우는데 집중해야하며, 매체 자체에 대한 담론을 원하는 학생들은 정규교육 외부의 네트워크에 들어가야만 한다. 때에 따라 정규교육 외부 네트워크는 사회의 역기능이 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고등교육이 기능화되고 있는 현대 사회의 주요한 교육적 갈등이 되고 있다. 이 갈등의 관점에서 볼 때, 교육의 객체는 두 가지 형태의 인간성의 기로에서 방황한다. 기능적 지식을 갖춘 기능화된 인간이 되거나 반체제적 인간이 되거나.

(고등)교육은 사회체제가 존속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적 실행력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의 내적 결속력을 강화한다. 따라서 지식은 인류의 자유나 해방과 같은 과거의 정당화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 체계로 간주된 사회가 그 실행능력을 최대로 현실화하는 과정에 기술적 정당성을 제공한다. 실증주의 이론과 같이 사회가 하나의 단일한 통합체를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는, 한 사회의 제도교육뿐만 아니라 사회의 역기능의 위험을 안고 있는 외부 지식 영역까지도, 유기체의 생존을 강화하는 자기조절 능력의 한 기능으로 축소될 수가 있다. 어느 경우든지 지식은 유기적 사회의 생산적 효율성 즉 실행능력을 극대화하는 기능적 요소가 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한다.

최대 실행성을 원칙으로 하는 지식의 전반적인 효과는 교육기관을 기존의 권력에 복속시키는 것을 주요 원리로 하고 있다. 지식이 이데아의 실현이나 인간의 해방과 같은 그 자체의 목적이기를 그치게 되면, 그 주체는 이제 더 이상 대학의 연구자나 학생들만의 고유한 사항은 아니다. 예컨대 학교 예산에 대한 연구자들의 권리는 할당된 액수를 효율적으로 잘 관리하는 자율성 정도로 제한되어 있음은 이미 오래 전 일이 되고 있다. 이렇게 최대 실행성에 의해 정당성을 갖는 지식의 추동력은 더 이상 메타서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테크놀러지의 실행능력에 의존하여 잉여가치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경제)권력에 있다. 따라서 학생을 비롯하여 국가와 교육기관은 하나의 새로운 진술에 대해 “그것이 진실인가?” 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이러한 질문은 지식의 중상주의의 맥락에서 “그것은 잘 팔릴 수 있는가?” 이며, 나아가 권력의 확장 맥락에서 “그것은 효율적인가?”로 귀결될 것이다(Lyotard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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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대 실행성에 의한 지식의 정당화 모델이 반드시 비관적인 상태인 것만은 아니다. 어떤 경우든지 학생들과 연구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생산양식에 따른 기술모델에 직면해야만 했으며 좋든 싫든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테크놀러지는 신체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지식의 실행능력을 강화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술강화는 현실을 팽창시키고 이를 다룰 수 있는 능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이다. 인간의 물질적 한계를 테크놀러지가 대체한다고 해서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상력의 차원에서 더 많은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뿐 아니라, 더욱 강도 높은 상상력이 요구되고 있다. 오히려 이 문제는 교육담론에서 더 연구되어야할 과제이다. 연구자들이 이제 더 이상 도서관을 찾기보다는 온라인 네트워크로 연결된 메모리뱅크에 접속하거나, 매체가 전달하고 있는 내용보다는 컴퓨터 단말기의 사용법을 배우는데 더 익숙해져 있다는 점이, 지식의 위상이 격하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정신의 생명이나 인류의 해방과 같은 과거 메타서사의 정당화 관점에서 볼 때에나 적용될 수 있는 일이다.

데이터 처리의 새로운 방식의 등장과 그에 따라 정보공학 특히 텔레마티크 분야와 같은 새로운 언어의 습득은 대학에서 필수적인 과목이 되고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할 것이다. 물론 테크놀러지의 최대 실행성이 지식을 양적으로 증가시키고 지식들간의 네트워크를 가속화함으로써, 보다 효율적인 연구와 교육의 성과를 창출하고 있다고 해서, 지식을 단순히 정보산업의 한 기능으로 제한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일 것이다. 연구조사와 교수법이 정보의 획득 능력이나 전수능력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기능적 지식의 실행능력조차도 보다 많은 양의 자료를 기억하거나 보다 다양한 종류의 단말기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자료를 운용하고 활용하고 조직하는 능력은 연구조사와 교수에 있어 매우 중요하며 오히려 현대사회에서 관건이 되고 있다. 컴퓨터화된 사회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서로 이질적인 자료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하고 배열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이것이 현대사회에서 필요한 상상력이 될 것이며, 이는 게임에서 새로운 수를 창출하는 능력으로 전환된다. 이 능력은 지식 습득능력만이 아니라 오히려 지식을 생산하는 능력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 위해 지식 전수가 단순한 정보의 전달로 제한될 수 없으며, 여러 연구 분야를 결합하고 조합하는 능력을 키우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사회 과학 분야에서의 학제간 연구 방법이 과거의 연구 방법에 상당한 도전을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학제간 연구는 메타서사의 탈정당화 시대에 등장한 지식 현상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여러 지식들간의 관계를 표면화하는 결과를 예증하고 있다. 새로운 진술과 새로운 지식의 출현은 과거의 메타서사 아래 집결된 심층적 관계로부터는 도출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지식들간의 관계가 표층적 위상을 갖는 한에서만 개방적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테크놀러지의 궁극적인 목적이나(경제권력의 목표와 일치하는), 그것의 정의로운 활용을 명령하거나 권고하는 메타언어나 메타서사를 생산해 낼 수는 없지만, 실행능력을 최대로 증가시키는 아이디어를 더 효율적으로 제기할 능력은 있다. 특히 프로젝트에 따른 팀 작업은 특정한 모델 내에서 최대의 실행능력을 성공적으로 발휘할 수 있음은 오래 전부터 사회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 한 명의 교수는 확립된 지식을 전수함에 있어 메모리 뱅크 네트워크보다 뛰어나지 못하며, 새로운 진술이나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상상하는데 있어서도 학제간 팀들보다 뛰어나지 못하다.

여하튼간 확실한 것은 최대 실행능력을 규준으로 하는 지식의 등장은, 그 궁극적인 추진력이 권력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식의 단순 재생산(교육)이든 확대 재생산(연구)이든 간에 탈정당화와 효율성의 우월함에 의해 과거의 연구나 교육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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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이런 의미에서 철학의 역사는 증거를 생산하는 수단에 대한 다소간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듯 보인다. 감각을 배제하는 추론 철학, 감각과 화해하려는 신체 철학, 감각의 현상을 추론하는 현상학, 감각의 능력을 정신적 직관으로 승격시킨 생기론 . . . 등.

본 글은 2001년 가을에 작성된 미발표 논문을 다시 수록한 것임.

 

지식과 정당화: 최대 실행성에 의한 정당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