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적인 것에의 중독

가시적인 것에의 중독

쉽고 편한 것을 택하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하지만 이러한 습성은 사물의 본질로부터 멀어지기가 쉬워서, 사물에 대한 해석이 단견에 머무르거나, 편협한 판단으로 자연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본질은 항상 뒤늦게 나오는 법이다. 우리가 시간을 단축시킬수록 그 본질의 지속력 역시 단축되어 꺼져버릴 소지가 크다. 이는 당연한 것인데, 본질은 사물의 핵심일 것이고, 핵심은 사물의 표면이 아니라 깊숙한 곳에 묻혀있기 때문이다.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려면 첫인상이나 단견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한참 동안 그 사물이 스스로 핵심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거나, 핵심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은 시간의 문제이고, 지속과 인내의 결과이다.

사람들은 추상적인 개념에 익숙해있지 않다. 쉬운 예로, 우리는 원(圓)이나 구(球) 보다는 달 또는 쟁반이라고 말해주길 원한다. 원과 구는 감각이나 물질적으로 아직 명확히 결정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뭔가를 그려보거나 쟁반과 같은 경험적 사물로 직접 치환하는 수고를 겪어야만 한다. 추상은 뭔가를 억지로 떠올리도록 강요하여 우리를 수고스럽게 하는 그 무엇이다. 멍하니 쉬고 싶은데 자꾸만 뭔가를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추상이 우리는 싫다. 그래서 들통난 무기력과 자책감을 보상하기 위해 추상적인 모든 것을 허황된 것, 뜬 구름, 위선, . . . 과 같은 오명으로 낙인을 찍는다. 이 오명에는 우리의 좌절감과 게으름, 나아가 뻔뻔스러움 같은 것이 감추어져 있다.

글 보다는 그림이나 사진 혹은 동영상을 찾는 습관도 마찬가지이다. 글에는 감각적 형태가 없다. 아른하임(Rudolf Arnheim)이 어디선가 “구상시”(concrete poetry)를 논의하면서 잠깐 언급했듯이, 글은 마치 거대한 선박의 부속들이 제각각 땅바닥에 널브러져 해체되어 있는 것처럼 기호 조각들로 나열된 꾸러미이다. 우리는 그 조각들을 하나씩 읽고 추상적 사유를 해서 그 부속들이 취하게 될 전체의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스스로 통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글의 능동성이 주는 정서는 아이가 도표도 없이 장난감을 조립하는 노고와 기쁨 이상이 있다). 추상에는 도표도 없고 기준도 없으며 기댈 곳이 없다. 위대한 안토니오니(Michellangelo Antonioni)가 감독한 “잠재성”에 관한 영화 Blow Up에서 어느 화가는 자신이 그린 해석 불가능한 추상화 한 점을 놓고 이렇게 말한다: “기댈 곳을 찾으면 다음에는 아주 쉬워져! 여기가 다리고 여기가 몸이야!” 글과는 반대로 그림은 조각들이 완성된 형태로 우리의 감각에 호소하기 때문에(추상화 역시 색채라든가 선이라든가, 리듬의 측면에서는 역시 감각적이다), 더 쉽고 물질적이고 명확한 접근이 가능하다. 결국 추상에 대한 우리의 거부는 지도 보다는 직접 데려다 주기를, 요리법보다는 요리 자체를 대령해주기를 기대하는 우리의 다소 뻔뻔스러운 바램, 다시 말해 세계가 하나의 완성품으로서 우리 앞에 제시되기를 바라는 노예의 도덕이 많든 적든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니체가 노예를 혐오했던 것은 그 뻔뻔스러운 무기력 때문이 아니었나?).

추상적인 것, 잠재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알려지지 않은 것, 지각되지 않는 것을 사유할 수 없는 영혼은 먼 미래나 깊은 과거를 볼 수가 없다. 미래와 과거는 당장에 눈에 보이고 잡을 수 있는 것 이상의 어떤 비전을 필요로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상태에 사로잡혀 있는 말초적 영혼은 도달하기가 어렵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1장에는 ‘소유로부터 벗어날 때 경험하게 되는 보편적이고도 묘한 세계’에 대한 언급이 있다(故常無慾以觀基妙, 常有慾以觀基徼). 바로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벗어나 그 “이전” 혹은 “이후”의 잠재적 세계에 도달하는 문제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잠재적 세계는 뭔가가 불명확하고 명확히 결정이 안 된 상태, 더 정확히 말해 저 위의 화가처럼 자기 스스로가 일점(-點)을 찍거나 최초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태이므로,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힘들고 불안해서 우리는 단단하게 기대어 잡을 수 있는 곳을 찾는다. 요즘의 소비사회에서는 불행하게도 그 기댈 곳이 주로 물질-상품-소유물이다. 공허를 식욕이나 쇼핑으로 채우려 하거나, 육체의 소유와 사랑을 쉽게 혼동함으로써, 충만에 도달하는 시간을 손쉽게 단축시킬 것처럼 보이는 물건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책을 읽고, 사색을 하고, 글을 쓰는 일들은 모두가 잠재적 행위들인데, 거기서 기댈 곳이 없어 답답하고 불안한 우리는 이를 견디기 어려워 자꾸만 감각적 물질과 대상 쪽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몰고 가려는 충동을 가누지 못한다. 책상에 앉았다가 곧 일어나 커피잔을 찾거나, 손에 쥔 볼펜에 눈길을 주거나, 인터넷 쇼핑몰을 뒤지거나, 담배를 물거나, . . .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더 깊은 허기와 공허와 싫증과 참담으로 끝나기가 일쑤이다.

추상적 사유에 대한 거부, 그리고 사물의 잠재적 징후로부터 발산하는 비전에 대한 무지, 다시 말해 물질적 가시성에의 중독은 단순하기 그지없는 영혼의 표상이다. 또 단순한 인간은 자신의 편견에만 사로잡혀 있지 않고 주변 사람들조차 그 단순성으로 보기 때문에, 윤리적으로도 실패한 사람이 될 소지가 크다. 단순한 눈에 비친 모든 것은 진부하고 따분하고 지리멸렬해 보이기 때문에, 타자가 무가치해 보이고 경시할만한 대상으로 여겨진다. 현대의 악은 도덕적 종교적 타락이 아니라 진부함, 바로 진부한 시선이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와 새커리(William Makepeace Thackeray)가 잘 지적했듯이, 진부함의 사회적 원천은 주로 저널리즘에서 출발하는데, 기자와 언론인의 도덕적 타락은 개인의 품성 문제와 경제적 문제 외에도, 그 직업 활동이 취하는 선천적 성질에 기인하는 것이다.

물질에는 심층적인 것이 없다. 그래서 그 양태가 항상 가시적이다. 행위가 가해질 때 물질은 즉각적이고도 분명하게 반응한다. 우리가 의지에 따라 만지는 대로, 물리적 질서에 따라 주무르는 대로, 그것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화답을 한다. 적절히 온도만 맞는다면, 물질은 우리의 요구에 반하거나 거짓말하는 법이 없다. 인간이 물질과 싸움을 벌이거나 투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물질이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 아니라 침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질에 대한 우리의 무지는 순전히 우리 자신의 문제일 뿐이다. 물질에 대한 우리의 행위가 얻게 될 그 결과에 있어 기만적인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 물건에 대한 우리의 중독성의 근원이 있다. 행위에 대한 결과의 즉각성과 명쾌함은 우리에게 어떤 희열감을 주는데, 이 희열감 때문에 우리는 자꾸만 그것들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공원에서 모형 비행기를 날리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적당한 조작을 통해 조립을 해서 그것을 공중에 날리는 순간, 그들은 물질과 자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묘한 질서에의 희열을 느낀다. 또 위키(Wiki) 프로그램이나 설치형 블로그 프로그램을 자신의 서버에 설치하고 필요한 설정을 바꾼다. 서버에 설정된 파일을 올리고 다시 이를 웹브라우저로 확인한다.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바뀐 것을 보고는, 물질적, 현실적, 가시적 실현을 확인한다. 그 순간 자신이 신이 된 것 같은 희열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즉각적 변화로부터 오는 희열감은 창조의 기쁨이기 보다는, 어떠한 질서에 대한 확신과 그 질서로부터 배제되지 않은 자기자신,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참여의 안도감 같은 것이다. 주어진 요소들을 짜맞추고 조립하여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되었음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안도감을 느낀다. 플라톤(Platon)이 말했던 “획득의 테크네(techne)”가 주는 희열, 혹은 조립품이 주는 기쁨이란 이러한 것이다.

간혹 작가들조차도 이러한 희열감의 함정에 빠진다. 글쓰기의 본질인 잠재적 역량을 키우는데 힘을 쏟는 대신, 새로운 단어와 표현체를 찾고자 열망하는 것이다. 실상 잠재적 역량이 너무 얕고 짧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대신해줄 적절한 육체와 옷을 찾길 바란다. 그래서 일상적 단어나 문장으로도 충분히 표현이 가능한 경험 위에 어울리지 않는 육체와 옷을 입힌다. 그들의 언어는 너무 수사적이고 장식적이어서, 우리의 눈과 마음은 그들이 어질러 놓은 장식물들을 구별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왜소한 역량에 비해 입은 옷이 너무 커서 공허해지는 것이다. 시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 산문은 지속력이 있어야 하므로 속이기가 쉽지 않은 반면, 시는 쉽게 현혹시키고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를 쓰기 보다는 읽을 줄 아는 것이 더 어렵고 비범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

물질성의 공허함은 패션(Fashion)이 창출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패션이란 새로운 취향의 창출이 아니다. 그것은 진부함을 생산하는 운동이다. 왜냐하면 유행이란 단순히 감상이나 유희를 넘어서 구매와 연관이 있어야만 하는데, 구매는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이나 실험정신 혹은 탐구정신의 소산이기 보다는, 따분하고 공허한 심리 혹은 진부한 삶 일수록 더 강렬해지고, 또 그러한 삶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한 구절의 시 보다는 신상품 원피스가 더 반갑다. 친구들 틈에서 나를 더 우쭐하게 만들어줄 것 같은 것은 바로 후자이다. 다루기도 쉽고 결과도 명확한 물질성에 비해, 비물질적인 것은 언제나 느리고 더디다. 나의 글 한편이 내 삶을 바꾸어 놓았는가? 나의 도덕과 의로움이 이 사회를 변화시켰는가? 언제쯤이나 도래할지 알 수 없는 그 심연의 시간을 기다릴 수 없어, 우리는 계속해서 울긋불긋한 물질로, 대상으로, 쇼핑몰로, 물건들로, 상징들로 되돌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나중에 나오기 마련인 그 무엇에 등을 돌린 우리의 삶은 공허하다.

가시적인 것에의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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