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한 욕망과 물질의 흉내

혼란한 욕망과 물질의 흉내

현대인이 자신의 위상에 불안을 느끼는 이유의 하나는 재물의 양과 행복이 비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물이 풍족할수록 더 행복해지고, 빈곤할수록 덜 행복해 진다는 식이다. 물론 재물을 양적으로 측정할 수는 있지만 행복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다들 생각하고 말한다. 물질적 부는 그 많고 적음을 잴 수 있는 척도가 분명히 있지만, 행복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딱 잘라서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없다고. 그래서 “더 많은 행복”이나 “더 적은 행복”, 혹은 “더 큰 행복”이나 “더 작은 행복”과 같이 행복의 많고 적음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원리상 무의미하고 공허한 용어법이라고. 마치 “더 크고 많은 음악” 혹은 “더 작고 적은 선율” 혹은 “더 큰 붉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non-sense이듯이, 그것은 non-sense라고. 그러나 생활 쪽으로 돌아서는 동안 non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sense만 찬란하게 남는다.

“더” 그리고 “덜”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습관은 생활이 물질이나 물건을 측정하고 비교하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바꿔야할 물건들, 소유한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지 비교하다 보니 그 소유자가 느끼는 행복감도 덩달아 비교가 되는 식이다. 심리적 가치를 물질로 둔갑시키는 예는 많다. 선물의 가격으로 애정과 존경의 정도를 재거나, 재산의 양을 인격이나 도덕 의식으로 치부하거나, 점수로 능력을 환원하거나, 등등. 이들은 모두가 양적인 가치와 질적인 가치를 혼동하는 데서 빠지게 되는 윤리적 오류들이며, 에피쿠로스(Epicurus)는 이를 “어리석은 생각(idle opinion)”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물건에 대한 욕망도 어리석은 생각의 한 예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면, 현대인이 그것을 실현하는 방식은 구매와 소비와 쇼핑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우리는 공허를 채우려고, 궁핍한 기분을 잊으려고 종종 쇼핑몰을 기웃거린다. 반대로 기업과 상인은 사람들이 쇼핑몰을 더 기웃거리도록, 그들이 더 공허해지고, 더 울적해지고, 궁핍을 더 느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아름다운 원피스 한 벌이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아 준다고 정말로 믿는 푼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쩐지 한 벌 장만하면 최소한 새로운 사람은 만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고급 승용차가 친구들 사이에서 본질적인 위신을 세워줄 것이라고 정말로 믿는 바보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쩐지 벤츠를 타고 동창회에 나가면 자신감 비슷한 것은 솟아날 것만 같다. 인간은 권리상 모두가 평등하다지만, 넓은 평수의 프리미엄 아파트 주민이 되고나니 옆 동의 꾀죄죄해 보이는 임대 아파트 주민들이 이 쪽으로 다니지 않도록 시멘트 벽을 세워달라고 민원을 넣고 싶어진다. 힘들게 공부해서 어렵게 정규직 노동자가 되었는데, 게으르고 무책임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같은 사무실에서 내 것과 차이 없어 보이는 크기의 책상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 그에게 “자리” 자체가 제공 되었다는 사실이 견딜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그 보다 더 크고 더 많은 행복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물질이 본질적인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맞는 말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는 덕담을 수긍하고, 최소한 수긍하고 싶으면서도, 우리는 왜 자꾸만 더 커지는 허기와 공허를 참아가며 물질을 더 선호하는 것일까?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이에 대해 귀여우면서도 날카로운 통찰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Objects mimic in a material dimension what we require in a psychological one.”(Alain de Botton, 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 London: Vintage Books, 2001. p. 65)

“물건들은 우리가 심리적인 차원에서 요구하는 것을 물질적인 차원에서 흉내를 낸다.”

이 멋진 말이 지적하는 것은,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이 품고 있는 근본적인 무능과 태만이다. 우리가 심리적인 차원에서 욕망하는 가치들, 가령 ‘사랑’, ‘우정’, ‘행복’, ‘자신감’, ‘자유’,…는 획득 자체가 쉽지 않을 뿐더러 이해하기 조차 어려운, 복잡하고, 쉽게 변하고, 실체가 없고, 미묘하고, 뭐가 뭔지 분간이 잘 되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그 정도를 잴 수 없는 심리상태들이다. 그들의 불가해한 심리적 질 때문에, 획득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그것들을 표현해줄 멋진 문구를 만들어 내거나, 그 기분을 대신해줄 어떤 물건을 찾는 일이다. 물건은 획득이 비교적 쉽고, 교환도 할 수 있으며, 맺고 끝는 분명한 윤곽선이 있으며, 좀 더 단단하게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심장(Heart, ♡)으로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이런 과정이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그는 자신의 감정이 어디에서 왔는지, 정체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단지 아는 것은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려온다는 ‘결과’ 뿐이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이제 “사랑=심장”이라는 도식이 생긴다. 사랑 받을 때 그녀는 행복감을 느낀다. 하지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사랑을 받을 때, 환희를 느낄 때, 눈 앞에서 화사한 꽃밭이 보인다. 이제 그녀는 한 다발의 꽃을 받을 때 사랑을 받는다고 느낀다. 이런 식으로 질주의 쾌감을 주는 자동차는 자유를 주고, 고급스러운 저택이 행복을 준다고 믿게 되었을 것이다. 물건들이 마음 속 욕망을 닮아가면서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획득하고 정복하려면 인내와 참을성이 필요한 감정의 복잡성을 감당할 수가 없어, 대충 닮아 보이는 물건으로 재빨리 얼버무리는 것이다(사실, 문학에서의 은유라든가, 심지어 언어 자체가 이러한 재빠른 얼버무림일지도 모른다).

얼버무리는 습관이 돌이킬수 없을 만큼 꼬이고 고착되면, 물신주의(fetishism)에서와 같은 ‘가치들의 전도’가 일어난다. 사랑을 대신하던 다이아몬드가 오히려 사랑의 원인이 되거나, 대저택과 자동차가 행복과 자유의 조건이 되는 식이다. 나이롱 스타킹을 부여잡고 우두커니 앉아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있는 물신주의자에게 스타킹은 더 이상 단순한 쾌락의 증표가 아니라 그 원인이자 조건이 되어버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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