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루한(Marshall McLuhan)

맥루한(Marshall McLuhan)

Note from The Medium is the message by Marshall McLuhan

  1. 『문화적으로 볼 때, 통제의 수단으로서 모든 것들을 쪼개고 분리하는 것에 오랫동안 익숙했지만,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는 떠올리면 놀랍다 ⇒ 모든 매체의 개인적 사회적 결과들(즉, 우리 자신의 모든 확장)은 우리들(신체)의 확장이나 새로운 테크놀러지에 의해 도입되었던 새로운 스케일로부터 비롯된다. ⇒ 자동화는 새로운 패턴의 연합관계를 낳는데, 1. 실업(부정적 결과), 2. 자동화는 사람들을 위한 역할들을 창조, 즉 이전의 기계적 테크놀러지가 파괴했었던 노동과 인간연합의 관계를 더 깊이 만든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어할 것이다. 즉 그것은 기계가 아니었고, 기계를 가지고 했던 것은 그 의미이거나 메시지였다고.』 ⇒ 기계는 관계를 변형시킨다는 말이, 양적인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본성적인 관계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2. 『기계기술의 본질; 파편화, 중심화, 인공적 인간관계를 패턴화한다; 인간의 노동과 연합의 재구성이 이러한 파편화 기술에 의해 꼴을 갖춤 ⇒ 자동화기술의 본질은 정반대; 철저히 완결적, 분산적이다.』 /// 『전광은 순수정보 ⇒ 메시지가 없는 매체 즉, 말로하는 광고나 이름을 부르는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메시지가 없는 매체이다. ⇒ 이 사실은 모든 미디어의 특징인데, 이것은 모든 미디어의 “내용”은 항상 다른 미디어라는 것을 의미한다. 글쓰기의 내용은 발화이며, 쓰여진 단어는 인쇄물의 내용이며, 인쇄물은 전신의 내용이다. “발화의 내용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그 자체로는 언어화되지 않은 사유의 실제적 과정”이라고 할 것이다.』 ⇒ 즉 언어로 되지 않은 사유의 실제적 과정 → 발화 → 쓰기 → 쓰여진 단어 → 인쇄물 → 전신 . . . ⇒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이 기술된다: 미디어는 다른 미디어를 담는 그릇이다. 미디어의 최하위단계는 무형적인 것이고, 최상위 단계는 무엇인가?

  3. /// 『추상화는 창조적인 사유과정들을 직접적으로 명시한 것 . . .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고안물이나 패턴들이 현존하고 있는 프로세스를 확대하고 가속시킴으로써 나오는 심리적 사회적 결과이다. 왜냐하면 모든 미디어나 기술의 “메세지”는 그것이 인간사회에 영향을 미쳐 나오는 규모나 보폭이나 패턴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철도가 인간사회에 가져다 놓은 것은 운동도 운송도 바퀴도 길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전의 인간의 기능들의 규모를 가속화하고 확장시켰으며, 총체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도시와 새로운 종류의 노동과 여가를 창조하였다. 사막에서든 북쪽 환경에서든 관계없다. 그리고 이것은 철도 미디어의 화물이나 내용과는 관계가 없다. 반면에 비행기는 운송률을 확장시킴으로써, 그것이 어디에 쓰이던 간에, 도시나 정치학, 그리고 연합의 철로 형식을 해산시키는 경향이 있다.

  4. /// 전등을 다시 생각해보자. 빛이 뇌수술이나 야간 야구경기에 사용되는가 그렇치 않은가는 서로 관련없는 문제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활동들은 어떤 점에서 전등의 “내용”물을 이룬다. 왜냐하면 이들은 전등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 이 사실은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는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미디어는 인간의 연결과 행위의 규모와 형식을 모양짓고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미디어의 내용과 사용은 인간의 연결의 형식을 모양짓는데 별 효과가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게다가, 그것은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모든 미디어의 ‘내용’은 우리로 하여금 미디어의 성격을 보지 못하게 한다. 다만 오늘날 산업에서만이 관련된 다양한 종류의 비지니스를 알게 되었다. IBM 이 사무실 장비나 비지니스 기계를 만드는 문제가 아니라, 정보를 처리하는 문제라는 점을 발견할때에, 비로소 분명한 비젼을 보게 된 것이다. General Electric Company는 상당한 수입을 전구와 빛체계에서 벌어들였다. 그러나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것은 AT&ㅆ에서 만큼이나 정보의 이동의 문제라는 점이다.

  5. /// 전등및은 소통미디어로서의 관심을 탈피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미디어연구를 실패하게 한다. . . . 왜냐하면 전등이 하나의 미디어로서 사용되는 상표를 밝힐때까지는 쓸모가 없기 때문 . . . 사용되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빛이 아니라 주목을 끄는 ‘내용'(혹은 진정 또다른 미디어)이 되는 것이다. 전 등의 메시지는 산없에서 전력의 메시지와 같다. 그것은 급진적이고, 만연되어 있으며, 분산적이다. 왜냐하면 전등과 전력은 그 사용에 있어서는 구별되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인간들의 연결에서 시간과 공간의 요소들을 지워버린다. 라디오나, 전신, 전화, 텔레비전 등을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서로들간의 깊은 연관을 만들어 낸다. <<사용되어야 미디어의 가치가 결정됨 ⇒ 전 등의 메시지는 산업에서 전력의 메시지와 같다 ⇒ 전등, 전력은 그 사용과는 구별되지만, 시간과 공간의 요소를 삭제시켜, 깊이 연관되게 한다 ⇒ 그래서 급진적이고, 만연적이며, 분산적이다>>

  6. /// 아주 좋은 인간의 확장의 문제를 연구하는 지침서를 세익스피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유명한 구절을 보자: “But soft! what light through yonder window breaks? / It speaks, and yet says nothing.” 오델로에서 리어왕에서 처럼, 망상들로 인해 변형된 사람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면서, 다음의 구절은 새로운 미디어의 변형적 힘에 관한 셰익스피어의 직관을 볼 수 있다. “. . . 젊음과 순결의 고유함을 욕되게할 그런 마력이 없는가? 그러한 것들에 대해 쓴 Roderigo의 책을 읽은적이 없는가?” 셰익스피어의 Troilus와 Cressida에서는, 거의 대부분을 심리적 사회적 소통관계의 연구로 집중되어 있는데, 작가는 사회적 정치적 여정이 (기술)혁신의 결과에 의존하고 있음을 언급한다. “경계가 심한 나라에 있는 섭리는 / 플루토스가 소유한 거의 모든 금싸라기까지도 알고 있다, / 닿을 수 없는 깊이에 있는 바닥까지도 찾아내고, / 생각으로 대신하고, 거의 신처럼/ 눈먼 요람속에서 생각이 모든 것을 벗겨버린다.” 미디어의 작용, 즉 그 내용과 프로그램과는 꽤 독립적인 미디어의 작용은 다음에서 잘 나타난다. “현대적인 사유에서(만일 사실이 아니라면) / 아무것도 작용하는 것은 없다, / So that is reckoned wisdom which / Describes the scratch but not the itch./ ” 어째서 미디어가 사회적으로 메시지인가를 드러내는 전체적이고 형상적인 지식이 의학이론에도 나온다. Hans Selye는 “stress of life”에서 자신의 이론을 들은후에 보인 동료연구자의 낙담을 말한다: “내가 들떠서 동물들을 불순하고 유해한 물질로 다루고 관찰한 것을 설명하려 할 때 그는 나를 보며 슬픈눈으로 말했다: ” 네가 지금 무슨짓을 하는지 늦기전에 깨달아야해. 너는 지금 쓰레기같은 약학을 연구하는데 온 인생을 버리고 있다고” . . . 최근의 미디어연구는 “내용”만을 다룰뿐 아니라 미디어와 그 특정한 미디어가 운용되는 문화적 매트릭스를 다루고 있다. . . ..

  7. /// General David Sarnoff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 현대과학의 산물들은 그 자체로는 좋거나 나쁘지 않다; 그것은 그 가치를 결정하는데 사용되는 방식에 있다” 이것은 최근의 몽유병화자들의 목소리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사과파이는 그 자체로 나쁘거나 좋지 않다; 그것은 가치를 결정해줄 사용방식에 있다” 혹은 “스몰팍스 바이러스는 그 자체로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 그 사용 방식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다”, 또는, “무기는 그 자체로 나쁘거나 좋지 않다; 사용방식에의해 가치가 결정될 뿐이다”, 즉, 만일에 . . . <<Sarnoff는 매체가 그 자체로는 좋고, 나쁨이 없고, 사용방식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고 하지만, 이것은 매체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데서 나온 말. 매체는 이미 하나의 메시지나 사용될 방식을 안고 태어난다. . . . 상품이나 생산물의 사용에서 뿐 아니라 생산물 자체가 이미 하나의 용도를 상정하고 있으며, 이는 그 자체로 사회적 관계 및 가치를 결정한다 . . . 미디어 자체가 이미 어떠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인쇄기술에 대해 그는; 인쇄는 쓰레기를 순환하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은 경전을 퍼뜨리고 철학자들의 생각을 퍼뜨린다. 그는 기술이 이미 우리 자신인 것에 자기 자신을 덧붙이지 못한다는 점을 모르는 것 같다. <<즉 미디어는 보다 완성된 존재를 만드는데 일조하지 않는다. 일조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자신에 의해 결정된다?>>

  8. 갈브레이스나 떼오볼드, 로스토우등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고전경제학의 역설: 그것은 변화나 성장을 설명하지 못한다/그리고 기계화의 역설적인 측면은 그것이 비록 최대한의 성장과 변화의 원인인 것 같지만, 기계화의 원리는 성장의 가능성이나 변화의 이해를 배제한다. ⇒ 왜? 기계화는 모든 처리과정을 파편화함으로써, 그리고 이 파편화된 부분들을 하나의 연쇄로 짜놓으면서 달성되기 때문. ⇒ 그러나 흄이 말했듯이, 하나의 단순한 연쇄에서는 인과적 원리가 없다((반복에 의해 자의적으로 결정할 뿐)). 어떤 것은 다른 것을 따르면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음 ⇒ 변화만 있을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연쇄하면서 지시하지 않음 ⇒ 따라서 가장 위대한 모든 반전들이 전자성과 함께 나타난다. 이것은 사물들을 순간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연쇄를 끝낸다. 순간적인 속도로 인해, 사물의 원인들이 인식으로 다시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 그것들은 연쇄속에서 혹은 연관속에서 필연적으로 관련이 있지 않을때에도. . . ⇒ <<인과관계없는 단순한 연속은 기계화에 의해 처리과정이 파편화되면서 그렇ㄴ데. . . 이 단순한 연쇄에서는 인과관계원리가 없음 . . . 연결은 아무것도 내포하지 않음(표면적) . . . 그런데 연속의 순간이빠르게 진행됨으로써 자의적인 인과관계가 생김(흄). 혹은 반복을 통해 신념이 됨>>.

  9. 비행기가 소리장애를 주파하게 되면서, 소리 파장이 가시적으로 되면서, 소리가 사라지는 과정을 보면, 사물의 패턴이 순간성을 갖게되면서 이전의 사물의 형식이 그 극한의 형태를 띄게되고 새로운 형식의 사물이 등장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 . . 영화가 탄생하게되면서부터, 파편화된 것과 그것의 연쇄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보게된다 . . . 이 순간 우리는 단순한 기계주의를 넘어, 성장과 유기적 상호작용의 세계로 넘어가게됨 . . . 기계적인 것을 가속시킴으로써 우리는 연속과 연결의 세계에서 창조적 구성과 구조의 세계로 넘어간다<<영화에서처럼, 분절된 연속에 속도를 가하면, 창조적인 구성, 구조가 된다 ⇒ 연속과 연결은 종합활동으로서 구성과 구조의 창조로 간다 ⇒ 이것은 결국 도상의 체계로 가게된다>> ⇒ 영화매체의 메시지는 선형적 연결에서 구성적 배열로의 추이과정이다. 이 추이과정은 이제 “작동하면, 그것은 이미 퇴화된 것이다”라는 점을 산출해낸다 . . .

  10. 고도의 문학으로서, 기계화된 문화로서 영화는 고양된 망상과 꿈의 세계로 출현 . . . 큐비즘과 동시에 출현 . . . 곰브리치의 art and illusion에서 그는 “모호성을 근절하고 단번에 그림, 즉 인간이 만든 구성물, 채색된 캔버스를 읽으려는 가장 급진적인 시도”라고 주장 ⇒ 왜냐하면 규비즘은 하나의 대상이 갖는 모든 국면들을 한번에 동시에 하나의 관점 혹은 원근법적 망상의 국면으로 대체했기 때문 . . . 캔버스위에 삼차원의 개별화된 망상이 아니라, 큐비즘은 평면들과 모순 혹은 패턴이나 빛, 직물들의 드라마적 갈등이라는 하나의 상호작용을 세워놓음으로써, 이 작용이 각 부분들의 연루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를 말하고자 한다. <<큐비즘; 모든 국면들을 한꺼번에 종합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모든 대상의 국면이 하나의 관점이나 망상의 국면으로 제시 . . . 결국 하나의 관점을 이루는 종합활동은 어떠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11. 결국, 큐비즘은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제시하고, 위, 아래, 뒤 앞, 나머지 등을 이차원적 평면에 동시에 제시하여, 전체를 순간적으로 감각적 인식을 위해 관점의 망상을 제시한다. 순간적인 전체인식을 포착함으로써, 큐비즘은 어느새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는 단언을 하게된다. 이것이 바로 “연속”이 동시성으로 이동하는 순간, 즉 구조와 구성적 배열의 세계 속에서 보게되는 순간의 증거가 아닌가? 이는 또한 그림에서처럼 물리학에서 등장하는 것 아닌가?, 시나 소통은 또 어떤가? 관심의 특수화된 개별적 파편들은 전체적 장으로 이동하고, 우리는 이제 “매체는 메시지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된다. <<파편들의 시간적 연속이 동시성을 띠면서, 구조, 구성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이 메시지는 누구의 메시지인가? 이것이 브로디와의 대별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전자적 속도와 전체적 장이 나오기 이전에는 “미디어가 메시지이다”라는 말은 불분명하다. 메시지는, 겉보기에는, 사람들이 어떤 그림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 라고 질문할 때처럼, 일종의 “내용”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멜로디가 무엇에 관한 것인가 혹은 어떤 집이나 옷이 무엇에 관한 것이었나 라고 질문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한 문제에서 사람들은 전체적 패턴이나 형식이나 기능을 하나의 단일성의 의미로 존속시켰다. 그러나 전자 세대에서 이러한 구조와 구성적 배열의 통합적 관념은 너무 만연되어 교육이론이 이 문제를 떠맡아 왔다. 산술에서 개별화된 “문제들”로 고심하는 대신 이제는 구조적 접근이 수체계에서 힘을 가지며 아이들은 수이론이나 그 “집합체”에 관해 고민해왔다. <<전자매체를 통해서는 이제 처음부터 전체가 제시된다. 이제 모든 사유는 개별적인 것부터가 아니라, 전체를 통해 나온다>>

  12. 프랑스, 미국, 영국에서 문화적 차이 ⇒ 프랑스, 미국은 매체에 의해 단일성, 연속성을 가지게 됨으로써, 혁명이 가능 ⇒ 그러나 영국의 경우, 구술문화전통위에서 동질화되지 않고 지엽적이며, 따라서 단일성이나 연속성이 창출되지 않음 ⇒ 프랑스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매체로 인한, 문화적 동질성이 만연되어, 일시적 전체화가 가능했기 때문 . . . 인쇄문화; 단일성, 연속성 창출(Alexis de Tocqueville의 이론) 14-15쪽 ⇒ 그러나 영국의 경우 고대적인 구술전통과 불문법의 힘이 의회의 중세적 제도로 회귀하면서 새로운 시각적 인쇄문화의 단일성이나 연속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토커빌의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청각문화에서 시각문화로 변하면서 사유의 종합활동보다는 종합적 감각이 발생 . . . 물론 관념활동도 시각을 본질로 하지만― 예로, 이미지 구성 ―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종합을 구성하는가 혹은 종합이 구성되어 제시되는가의 차이일까?>> . . . 이러한 이유로 영국 역사에서 대부분의 혁명적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 혁명은 중세적 합법적 제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미국의 대통령권은 상당부분 개인적이며 독재적이어서 유럽의 독재보다 더 하다. . . .

  13. 영국과 미국에 관한 토커빌의 관점은 단일성과 연속성을 창출하는 인쇄술이나 인쇄문화의 사실 위에 토대를 가진다. 그에 따르면 영국은 이러한 원리를 거부하고 역동적이거나 구술적인 불문법 전통에 고착되어있었다. 따라서 불연속성과 예측불가능성이 영국문화의 특징이다. 인쇄문법은 구술적이고 비문어적인 문화와 제도에서는 어떤 메시지를 조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국 귀족 전통에 대해 매튜 아놀드는 야만적이라고 분류했는데, 그것은 그 힘과 위상이 문자성이나 문화적 형식으로서 인쇄문화와는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 . . 모든 매체는 그 자신의 가정과 추론을 경솔하게 부여하고 구성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 . . 예측과 통제는 나르시스적 무아지경의 숭고한 상태를 피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But the greatest aid to this end is simply in knowing that the spell can occur immediately upon contact, as in the first bars of a melody.

  14. 포스터의 “A passage to India”는 구술적이고 직관을 존중하는 동양문화가 합리적이고 시각적인 유럽식 경험패턴과 조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점에 관한 드라마이다. 물론 “이성적인”이라는 말이 서구에서 오랫동안 의미한 것은 “단일성과 연속성과 연쇄성” 등이었다. 즉 우리는 이성을 문자성과 혼동하고 있었으며, 이성주의를 하나의 테크놀러지와 혼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자시대에서 인간은 전통적인 서구에게는 비이성적인 것이 된다. 포스터의 소설에서 진리의 순간과 . . . 16쪽 둘째문단과 셋째 문단 다시 정리

  15. 문자성에 의해 파괴되는 부족성 . . . 문자성은 집단부족성을 파괴하고 개인적 고립화를 초래 . . . 마찬가지로 전자매체는 현대인의 문자성(literate)과 기계적 문화에 익숙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게 한다. ⇒ 그것은 우선 전자적 속도와 관계가 있는데 . . . 전자적 속도는 역사이전의 문화와 산업ㅈ의의 찌꺼기를, 비문자성과 반문자성과 후기문자성을 모두 뒤섞는다 ⇒ 새로운 정보와 끊임없는 정보의 새로운 패턴이 범람하고 근절되는 결과로서 다양한 정도의 정신적 파탄이 일어남 . . . Wyndham Lewis는 이를 “The Human Age”라는 자신의 소설군의 주제로 만들었다. 그 중 하나인 The childermass는 우선 가속되는 매체의 변화를 일종의 순수한 것들의 학살로 간주한다. 점점 정신이 구성되고 영혼이 형태화되는 테크놀러지의 효과를 알게되어 가면서, we are losing all confidence in our right to assign quilt. Ancient prehistoric societies regard violent crime as pathetic. The killer is regarded as we do a cancer victim. . . .

  16. 만일에 범죄자가 비 순응주의처럼 보여서 우리가 단일함과 연속적인 패턴에서 행동하는 테크놀러지의 요구에 순응하지 못한다면, 문자성을 가진 사람이 순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다소 감정적인(pathetic)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특히 아이나, 불구자, 여자, 유색인종 등은 시각적이고 인쇄기술적인 세계에서 불법적인 것의 피해자로 보일 것이다. 반면에, 사람들에게 직업 대신에 역할을 부여하는 문화에서 . . . 난장이 불구 어린아이는 자신들의 공간을 창조한다. 그들은 어떠한 단일하고 반복적인 단순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It’s a man’s world.”라는 말을 생각해보라. 동질화된 문화 내부로부터 양적인 관찰이 끊임없이 반복됨에따라, 이 구절은 소속되기위해 동질화되어야하는 그러한 문화속에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IQ시험이 그 예이다. 여기서 우리는 꼴사나운 표준들의 홍수를 만들어왔다. 우리의 인쇄문화의 편향성을 알지 못하고 우리는 단일하고 연속적인 습관들을 지성의 척도라고 여겨오면서, 청각이나 축각등의 다른 감각능력을 축소시켜왔다.<<사유의 여러층위가 있다; 1. 감각적 사유의 계열(시각적이미지촉발, 빛의 계열 / 청각적 이미지 촉발, 파동계열 / 촉각적 이미지 촉발, . . . ? / 미각 . . .?). 2. 기호적 사유의 계열(양적 기호 / 질적 기호 등) ⇒ 각각의 계열들은 인터페이스를 이루고 있다. >> ⇒ <<빛은 인간과 우주를 연결해주는 소중하고도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다. 빛은 우주에서 낼수 있는 최대속도인 초당 30만km의 속도로 우리에게 정보를 보내주고 있다: 빛의 메시지>> ⇒ <<매체가 메시지라는 말이 생소한 이유는 무엇일까? 메시지는 주관적 관념의 계열이기 때문이 아닐까? 어째서 매체가 주관적 관념의 계열의 문제가 되는 것일까?>>

  17. . . . 매체의 효과는 강하고 강렬한데, 이것은 매체가 다른 매체를 그 ‘내용’으로 취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내용은 소설 혹은 연극 혹은 오페라이다. 영화형식의 효과는 그 프로그램내용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쓰기나 인쇄의 ‘내용’은 발화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인쇄나 발화에대해 거의 전혀 모르고 있다.

  18. 아놀드 토인비는 미디어가 역사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순진하게 이해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예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때 그는 진지하게 영국의 노동자 교육 연합과 같은 성인교육이 대중매체의 유용한 대항적 힘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비록 모든 동양사회가 이제 산업 기술과 그 정치적 결과들을 수용해 왔지만: “그러나 문화적 장 위에서 단일한 경향을 띠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 . . 이는 마치 문자를 배운 사람이 광고의 홍수에서 발버둥 치면서, 나는 광고에는 관심 없다고 허풍떠는 지식인 같다. 동양인들이 우리의 기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신적 문화적 유보가 그들을 살려내지는 못한다. 기술의 결과들은 견해들이나 개념적 수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우리의 의미체계나 지각패턴들을 바꾸어버린다. 진지한 예술가만이 오로지 형벌을 받지 않고 무사히 기술과 대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감각지각의 변화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19. 일본에서 자본매체의 유입이 삶의 지각 활동에 미친 영향 . . . 돈은 사람들의 감각적 삶을 재조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감각적 삶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그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의 승인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20. 토인비는 “etherialization”이라는 개념을 통해 미디어의 변형적 힘을 논하는데, 이것은 그가 보기에 모든 조직이나 기술에서 진보적 단일화와 능률의 원리이다. 대체로, 그는 이 형식들이 우리의 감각적 반응들에 적합하지 않게 되는 효과를 무시하고 있다. 그가 상상하는 것은 한 사회 속에서 미디어와 기술의 효과와 관련이 깊은 우리의 (관념적)견해들의 반응이다. 이것은 하나의 “관점”인데, 이는 인쇄기술의 결과일 뿐이다.<<실질적 반응, 즉 신체적 감각적 반응이 아니라, 관념적이고 추상적 반응이 매체의 결과이다. 이런 점에서 브로디의 매체론과 상당히 다르지 않은가? 맥루한이 보기에 매체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추상관념으로 만들어진 반응이다. 그러나 브로디는 기억과 물신적 반응을 도출함으로써 매체가 공통개념을 만들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매체의 부정과 긍정의 차이가 아닐까?>> 문자성이 발달하고 동질화된 사회 속의 인간은 다양한 것과 불연속적인 삶의 형식들에 민감해지지 않으며 감각적이지 않게된다. <<신체적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3차원의 망상(매체를 말함)을 획득하고 자신의 나르시스적 고착의 일부로서 “비밀스런 관점”을 갖게된다, 그리고 블레이크나 다윗왕의 시편에서 볼 수 있었던 바,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의 존재”이다라는 통찰을 거부해버린다.

  21. 이제 우리가 우리자신의 문화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인간의 표현의 기술적 형식에 의해 취해진 편견과 압력으로부터 좀 멀어지길 원한다면, 우리는 특정한 형식이 느껴지지 않았던 사회를 방문해야만 하며,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시기를 찾아봐야 한다. Wilbur Schramm은 Television in the Lives of Our Children을 연구하면서 이러한 전략적인 움직임을 감행한다. 그는 텔레비전이 보급되지 않은 지역을 찾아서 몇 가지 실험을 했다. 그는 텔레비전 이미지의 특정한 본질을 연구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실험은 “내용”위주의 것이 되었고, 시간을 관찰하고, 어휘를 감안했다. 한마디로, 그의 문제접근방식은, 무의식적이긴 하나, 문학적인 것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보고할 수 없었다. 만일 그의 방식이 1500년도 쯤에 도입되어 인쇄된 책이 아이들이나 성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했다면, 그는 인쇄기술로부터 산출된 인간적 사회적 심리변화에 대해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쇄물은 16세기에 개인주의와 민족주의를 창출해 내었다. 프로그램과 “내용”을 분석하는 것은 이 미디어의 마술적 힘이나 그들의 잠재적인 부담에 아무런 단서들도 제공하지 않는다.

  22. “Communication in Africa”라는 보고서에서 Leonard Doob은 한 아프리카인이 매일 저녁 BBC뉴스를 듣는 것에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말이다. 매일 아침 7시에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발화에 대한 그의 태도는 우리가 멜로디를 듣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소리의 공명하는 억양(resonant intonation)은 충분히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17세기 우리의 선조들은 아직까지도 이러한 원주민들의 미디어에 대한 태도와 유사한 것을 공유하고 있었다. “The Art of Speaking”에서 프랑스인인 Bernard Lam이 표현했던 다음과 같은 감정상태에서처럼 소박했던 것이다: ” 그것은 신의 지혜의 효과이다. 신은 인간을 행복하게 창조했다. 무엇이든 그의 대화(삶의 방식)에 유용한 것은 그에게 유쾌한 것이다 . . . 왜냐하면 영양물을 주는 모든 음식은 맛있는 것이며, 소화되지 않고 우리의 몸에 체화되지 않는 다른 것들은 맛이 없기 때문이다. 담론은 말하는 사람이 편치 않으면 듣는 사람도 즐겁지가 않다; 즐겁게 듣지 못하면 쉽게 말할 수가 없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영양과 표현의 평형이론이다. 지금 우리는 파편화되고 전문화된 몇 세기가 지난 후에 미디어에 대해 다시 이렇게 연구하고 있는 . . .

  23. Pope Pius XII는 오늘날 미디어에 관한 중요한 연구가 있을 것에 대해 진중히 생각했다. 1950년 2월 17일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사회의 미래와 그 사회의 내적 삶의 확고함은 소통기술의 강화와 개인의 반응 능력간의 평형을 어떻게 유지하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이러한 예견의 실패는 몇 세기 동안 흔히 있어왔으며 인류에게는 총체적이었다. 무의식적이고 순종하는 방식으로 미디어 효과를 받아들이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벽없는 감옥에 갇힐 것이다. A.J.Liebling이 “The Press”에서 지적했듯이, 인간은 아무리 목적지에 도달하게 해줄 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자신이 어딜 가고 있는지 모르면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했다. 각각의 미디어는 또한 다른 미디어나 다른 집단을 때려눕히기 위한 강력한 무기이다. 결과는 이렇다. 현재세대는 예술과 연예의 세계에만 국한되지 않는 복잡한 전쟁들 중 하나이다. “War and Human Progress”에서 J.U. Nef 교수는 선언한다: “우리 시대의 전면전은 지적 실수의 연쇄의 결과이다. . . “

  24. 만일에 미디어의 형성적 힘이 미디어 자체라면, that raises a host of large matters that can only be mentioned here, although they deserve volumes. 즉, 기술적 미디어는 석탄이나 목화나 기름과 마찬가지로, 주성분이나 원료라는 점. 한 사회의 경제가 목화나 곡물이나 고무 생선, 가축 등과 같은 한 두 가지 주요 성분에 의존한다면, 그 사회는 뚜렷하게 볼 수 있는 조직 패턴을 가지게 될 것이다. 몇 가지 주요 성분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경제적으로 극단적 불안을 야기할 것이며, but great endurance in the population. 미국 남부인들의 파토스와 유머는 바로 그러한 제한된 성분들로 이루어진 경제 속에서 새겨진 것이다. 왜냐하면 몇 안 되는 상품이나 품목들에 의존해서 구성된 사회는, 대도시 사회가 신문을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품목들을 하나의 사회적 제약으로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목화와 기름은, 라디오나 텔레비전처럼, “고착된 부담”이 되어 공동체의 전체 정신적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만연된 사실은 그 사회의 문화적인 독특한 기호를 만들어 낼 것이다. 삶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성분들, 즉 코나 다른 모든 감각들을 통해, 지불되어야 한다.

  25. 우리 인간의 감각들은(모든 미디어는 이 감각들의 확장이다) 또한 우리의 개인적 에너지에 대해 고착된 부담들이며, 그것은 또한 개인들 각각의 인식과 경험을 구성한다. 우리의 감각들은 칼 융이 말했던 또 다른 연결로 지각된다: “모든 로마인들은 노예들로 둘러싸였다. 노예와 그 정신들은 고대 이탈리아를 메웠으며, 모든 로마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내부적으로 노예가 되었다. 왜냐하면 삶은 끊임없이 노예들만 있는 분위기에 처해있었으며, 무의식을 통해 노예들의 정신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러한 영향권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가 없었다.”

-메모-
⇒ 추상화, 즉, 감각적 경험과는 관계없는 추상화된 자동운동을 만듦. 즉, 추상적 운동이 됨. 허위적 연결(15번), 관점의 망상; 11번

⇒ 추상적 운동은 인식 체계의 추상화, 동질화를 낳음; 5번 참조 . . . 에테르화와 관련된 논의(20번). 12번도 검토

⇒ 맥루한이 보기에 미디어는 미리결정된 사유를 제공하며 그 자체 미리결정된 사유이다. 정리. 맥루한이 보는 미디어; 조작장치, 이 조작으로 메시지를 만듦(13번 참조) // (7번참조); 매체는 가치가 배제된 물질이나 대상적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자신의 주관적 형식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 자체 하나의 형식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매체는 메시지인 것이다. 그것은 이미 . . . 칸트적? 흄적? => 맥루한이 보는 매체의 본질: 공간과 시간의 최소화 ⇒ 추상화. 에케르화 // “메시지”는 일종의 코드; 그는 매체를 표상체계, 코드화된 표상체계로 생각하는가?

⇒ 그러나 맥루한은 미디어의 변형적 힘을 언급하면서, 미디어의 또 다른 측면을 제시(변형적 힘). 9번부분이 그 예 ⇔브로디와의 연결 (브로디와 대립적인 관점이 아님; 브로디는 맥루한의 매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맥루한이 잠깐 언급한 변형적 힘을 보완한다)

⇒ 브로디; 미디어는 여전히 절단과 부분들이 전달

⇒ 그러나 절단과 부분들이 전달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과정은 종합적 사유활동요구

⇒ 종합적 사유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기억; 기억은 단순히 정보의 저장이 아니다. 두뇌가 기억을 저장한다는 것은 터무니 없듯이, 미디어의 본질은 기억의 저장이 아니라, 정보와 자료의 저장일뿐. 기억은 구성적이고 변형적 힘을 갖는다.

⇒ 바로 이 변형적 힘이 맥루한이 말했던 미디어의 변형적 힘(9번); 일종의 인터페이스인 미디어의 재현이 아닌 구성성의 예; sheilds의 구절 참조.

  • 맥루한의 한계를 지적; 기억, 종합활동 혹은 사유활동이 능동적임. 즉, 정신의 문제가 개입 ⇔ 브로디를 약간 첨가하면서, 브로디 자체도 극복하는 과정으로? ⇒ 메시지/이미지(물신, 언어로 전달 안됨) ⇒ 영화; 내러티브측면/이미지측면(언술불가능) ⇒ 몽따쥬; 사유를 강제하는 과정으로서(들뢰즈, 이미지-사유 참조) ⇒ 자연적 지각/영화적 지각; 베르그송은 이 둘을 동일하게, 그러나 현상학은 이를 상이하게 . . . ⇒ 자연적 지각; 인간의 눈 / 영화적 지각; 카메라의 눈; 자유간접화법에서처럼 상반된 둘 이상의 존재가 공존하고 있다. 서로 독립적으로, 집합을 이루고 있다 ; 그러나 자연적 지각에는 이것이 없다. 특권화된 관점으로부터 고정된 점만이 있다.

  • 이제 매체와 그 내용 뿐 아니라 매체가 전달하고 이동시키는 매개물들은, 하나가 다른 하나의 근거가 되지도, 다른 하나를 설명하는 심층적인 관계를 이루지도 않는다. 매체에 의해 전달되는 내용은 이미 또 다른 형태의 매체일 뿐이다(McLuhan 8): 매체는 이미 그 자신의 매개이며, 매체를 담는 그릇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또 다른 매체를 필요로 한다.

  •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매체의 형식적 표면운동과 관련하여 맥루한이 집중하는 것은 그것의 심리적 사회적 결과에 있다. 문제는 무엇이 이동하고 전달되는가 그 자체에 있지 않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동하고 처리되는 패턴과 형식에 있는 것이다. 맥루한에게 매체가 안고 있는 문제는 매체들간의 이동과 처리가 사회 속에서 인간들이 맺는 관계나 규모에 미치는 영향이다. 매체는 다른 매체를 전달하고 처리하고 이동시킨다는 것은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의 변형을 의미한다. 운송수단이나 소통수단이 점점 가속화되어 그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사회적 관계의 양적 변화가 아니라 질적변형이 일어난다. 맥루한은 매체의 운동속도가 이러한 질적변형을 가능케 했다고 보지만, 운동속도에서 시간이 제거되고 나면 . . . ?

  • 맥루한이 말하는 매체의 문제를 기호학에서 말하는 동기화(motivation)의 문제로 생각해서는 안됨(예를들어, 문자매체와 도상매체의 이행을 동기가 낮은 것에서 높은 것으로의 이행, 즉 상징에서 도상으로, 그래서 해석능력이나 노력이 많이 필요한 것에서 적게 필요한 것으로의 이행의 문제); 물론 그는 온도를 통해 매체를 구분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말하는 것은 매체의 온도가 아니다. 매체의 사회학 혹은 매체의 정치학.

맥루한(Marshall McLu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