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타주와 플랑세캉스

몽타주와 플랑세캉스

몽따주의 대가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은 영화 예술이 해야 할 일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고 창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몽따주는 재료로서의 현실적 파편들(쇼트, 세포, 사건 등)의 변증법적 기양(Aufhebung)이며,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창조 과정이다. 각각의 파편들은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서로 끌어당기기도 하기도 하며, 대립, 모순, 보충, . . . 범 우주적 파동 속에서 폐지되었다가 새로운 현실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반복한다.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중심이자 변화의 주체인 인간을 그러한 파동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필요한데, 영화 예술이 바로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분노와 같은 “비판의 본질적 파토스”의 영화적 창조가 그 예다.

반면에 네오-리얼리즘(Neo-Realism)을 옹호했던 바쟁(Andre Bazin)은 몽따주가 자연에 뭔가를 억지로 덧붙이는 행위라고 못 마땅해 했다. 그에 따르면 현실은 살아있는 것이고, 스스로 지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예술은 그 살아있는 지속에 관념을 덧붙여 왜곡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며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영화란 무엇보다도 “기다림”으로부터 출발한다. 영화가 문학이나 회화와 본성적으로 다른 그 고유의 미학이 있다면, 다름 아닌 다큐멘터리즘적 기다림이다.

전제정권에 의한 민중의 학살이라는 유사한 테마를 다루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영상을 통해 이 대조를 확인해보자. 첫 번째 영상은 에이젠슈타인이 직접 구성한 몽따주, 말하자면 새롭게 창조한 “비애”(pathos)의 이미지이다.

 

두 번째 영상은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포착한 살아있는 현실(약 2분간)의 이미지이다.

 

p.s. 그러나 서로가 다소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두 관점은 역사적으로 보면 사실상 그 구분이 모호해서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엄밀히 말하면 전자는 후자에 기반을 두고 있고, 또 후자는 전자를 추구하기도 한다. 예컨대 다큐멘터리에서 조차 John Grierson과 Robert Flaherty로 대표되는 대립적 관점으로 갈라지기도 하는데, 이들의 대립 또한 명확히 구분할 수가 없다. 우리는 단지 사후에 덩어리로 뭉뚱그려서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나눌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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