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nedict Anderson의 Imagined Communities 발췌 요약

Benedict Anderson의 Imagined Communities 발췌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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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근대적 의미의 국가나 민족은 세계의 정치 경제적 질서 속에서 점점 달라지고 있다. 노동인구나 자본의 이동과 같은 국제적 신질서는 우리로 하여금 국가나 민족의 개념을 수정해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변형된 형태이긴 하지만 여전히 국가 전체주의나 종교적 민족주의 등이 실질적 질서를 구성하고 있거나 우리의 관념을 지배하고 있다. Benedict Anderson의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 』라는 책은 국가나 민족의 발생이 어디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각 집단들을 하나의 통일적 질서로 묶고 있는가에 관한 연구이다. 이 글은 바로 앤더슨의 저 책 중에서 상상의 공동체에 관한 중요한 논의를 담고 있는 제 2장의 요약이다. 상상된 공동체라는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이, Anderson은 민족주의를 근대적 형태의 종교라는 관점에서 둘을 비교하고 있다.   종교적 세계관의 큰 장점은 우주 안에서의 인간, 종(種)으로서의 인간, 그리고 삶의 우연성에 대한 그들의 관심에 있다. 수많은 종교들이 수천 년 간 존속된 것은 질병, 불구, 비탄, 노령, 죽음 등 감당할 수 없는 인간 고통의 짐에 대한 종교의 상상력 있는 대응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이러한 불가피한 고통의 짐(우연적인 힘)에 대한 의문들을 설명해 주려고 한다. 종교는 숙명을 연속성으로 변형시킴으로써 불멸의 모호한 암시에 (상상적으로)반응함으로써 죽은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 사이의 연결과 재생의 신비에 관심을 갖는다. 종교는 과학이 거부하거나 무시해버리는, 그러나 인간에게는 피할 수 없는 강한 외적 힘을 설명하려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종교는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18세기는 민족주의의 여명기이며 동시에 종교적 사고의 황혼기이다. 계몽주의나 세속주의의 출현에 의해 발생한 종교적 믿음의 쇠퇴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고통을 다른 방식으로 모색할 것을 요구했다. 낙원에 대한 믿음의 붕괴는 숙명을 종잡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운명을 연속성으로, 우연을 의미 있는 것으로 전환시키는 다른 형태의 세속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민족의 개념은 과거와 관계하면서 나타나지만, 동시에 그것은 한없이 미래로 들어간다. 우연을 운명으로 바꾸는 것이 민족주의의 마술이다.

18세기 말경에 출현한 민족주의는 의식적으로 주장된 정치적 이데올로기와의 결합이 아니라, 민족주의를 앞서는 큰 문화체계(이 문화체계는 민족주의 생성의 토양이자 민족주의와 상충되는 것이기도 하다)와의 결합에 의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적절한 두 문화체계는 종교적 공동체와 왕조이다.

1. 종교적 공동체

이슬람, 기독교, 불교 세계 등 위대한 문화들은 방대한 공동체의 개념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들은 대체로 신성한 언어와 글로 쓴 정본(正本)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상상될 수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이슬람 성경은 구어소통이 안되어도 소통을 가능케 하는 공유된 기호로서, 한자처럼 기호 공동체를 창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수학언어 등). 위대한 고전적 공동체들은 우주의 중심으로서 성스런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초 현세적 힘의 질서에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 한 것이다.

그러나 신성한 언어로 매개된 옛 공동체는 현대 민족들의 상상된 공동체와는 구별되는 특징을 갖는다. 우선 자신의 언어가 유일한 것이라는 자신감과 누구를 구성원으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그들의 개념이 그것이다. 신성한 언어가 과거의 위대한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는 매개체였다면, 그것의 실체는 현대인에게는 낯선 기호의 비 자의성에 있다. 중국, 라틴, 아랍의 상형문자들은 실재의 자의적으로 조작된 표상이 아니라 실재의 발현이었다. 예로, 알라(Allah)의 진리는 다른 언어와는 대체될 수 없는 진실한 기호인 아랍문자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진리를 재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진리언어는 개종의 충동(민족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으로 물들어 있다. 이것은 마치 연금술적 통합과도 같아서, 성스런 언어를 익히는 것은 곧 한 인간 본성의 전체적 성격이 종교적으로 개조 가능한 것이다. 결국 성스런 언어를 통한 개종의 가능성으로 인해 영국인이 교황이 되고 만주인이 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공동체들의 실제 영역이나 이 공동체들이 가능하게 되는 이유는 성서 뿐 아니라, 문자를 해독하고 소유하는 문제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사회집단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들은 주변 지향적이고 수평적이기 보다, 중심 지향적이고 계층적이었다. 전성기에 행사한 교황의 권력은 범 유럽적인 라틴문자 사용의 문사(文士)사회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에 의해 공유된 우주관에 의해서만 이해된다. 이 우주관이란 라틴어를 구사하는 지식인들이 지방어와 라틴어를 중개함으로써 지상과 천국을 중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상상된 공동체들의 무의식적인 일관성은 중세말기 이후 쇠퇴해 졌다. 이 이유는 신성성에 관계되는 두 가지이다. 1) 비 유럽세계에 대한 탐험의 결과. 그 예로, 마르코폴로의 구절을 보면, 그의 태도와 언어에서 “그들”과 “우리”의 구분을 확연히 엿볼 수 있고, “진실된 것”과 “가장 진실된 것”의 구분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주의자들의 언어(경쟁에서 우리가 최고라고 하는)를 예고하는 신앙의 영토화의 씨앗을 탐지하게 된다. 2) 성스러운 언어 자체의 점차적인 격하.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던 유일한 언어는 곧 신성함을 의미했다. 그러나 16세기까지 사회적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인쇄자본주의 등), 라틴어는 점차 몰락하고 프랑스어 및 다른 지역의 언어들이 확산된다. 즉 라틴어의 몰락은 옛 신성한 언어에 의해 통합된 신성한 공동체들이 분해되고, 복수화되고, 영토화되는 보다 큰 과정을 예시해 주고 있다.

왕조의 영토

왕권은 모든 것을 고위 중앙의 주위에 조직한다. 왕권의 정통성은 주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서 나온다. 주민은 시민(citizens)이 아니고 백성(jubjects)일 뿐이다. 현대적 개념에서 국가의 주권은 법적으로 구획된 영토 위에 완전하게 그리고 공평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중심부에 의해 정의된 옛 상상체에서 국가 간의 경계는 불분명하며 모호해 진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전 근대적인 제국들과 왕국들은 매우 이질적인 그리고 인접해 있지도 않은 사람들에 대한 통치를 오랫동안 계속할 수 있었다(왕국과의 연방조례나 결연은 일종의 귀족간의 흥정이다).

이 옛 군주국들은 전쟁뿐 아니라 성(sex)의 정치학에 의해 확장되기도 했다. 수직성이라는 일반적 원칙을 통해 왕조의 결혼은 다양한 인구를 새로운 정점 아래로 모았다(합스부르그가의 경우가 그렇다). 중혼이 종교적으로 금지된 왕국에서 층층이 쌓인 첩제의 복잡한 체계는 왕조의 통합에 필수 불가결하였다. 그러한 혼합은 높은 지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7세기 동안 신성군주제의 자동적 합법성은 서유럽에서 천천히 퇴조하기 시작했다(1649년 Charles Stuart의 처형, 1650년 왕이 아닌 평민섭정(plebeian protector)에 의한 통치 등). 1789년(프랑스혁명) 이후 정통성의 원칙은 큰 소리로 의식적으로 방어되었고, 그 과정에서 군주제(monarchy)는 반(半) 표준화된 모형이 된다. 1914년까지도 왕조국가들이 세계정치체계의 다수의 구성원을 이루긴 했지만, 많은 왕조들은 정통성의 원칙이 조용히 시들어가고 있을 때 <민족>이라는 표어에 손을 뻗고 있었다.

2. 시간의 이해

종교공동체와 왕국을 대체한 것이 민족이라고 보는 것은 근시안적이다. 성스런 공동체, 언어 그리고 혈통의 퇴조 밑에 세계를 이해하는 양식 면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중세 교회의 부조나 유리창, 초기 이탈리아와 플랑드르(Flemish) 화가들이 그린 그림 등 성스런 공동체들의 시각적 표상들의 특징적 모습은 <현대의 의상>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프랑스 버건디 지방의 농부의 모습을 닮은 그리스도, 이탈리아 토스카니 지방 상인의 모습을 한 성 마리아 등). 즉 기독교 세계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것들을 통하여 그 보편적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범 유럽적인 라틴어를 아는 문사(文士) 계층이 기독교인의 상상력을 구조화하는데 주요한 요소이지만, 언제나 개인적으로 구체적인 시각적 청각적인 창조물을 통하여 기독교의 개념들과 글을 모르는 대중에게 매개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우주적-보편적인 것과 일상적-세속적인 것의 병렬은 기독교세계가 아무리 방대하다고 느껴지더라도, 특정의 스와비안(Swabian)과 알달루시안(Andalusian) 공동체에게 세계는 자신들의 복사판으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현대 박물관의 복고정신에서 <셈족의> 모습이나 <1세기>때의 의상을 입은 성 마리아를 그린다는 것은 역사가 끝없는 인과의 사슬이라거나 과거와 현재의 급격한 단절의 반복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중세 기독교도들의 사고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우얼바하(Auerbach)의 말에 따르면, 이삭(Issac)의 희생과 예수의 희생과 같은 “두 사건 사이에는 시간적으로나 인과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관계, 즉 수평적 차원에서 이성으로 세울 수 없는 관계가 이루어진다. . . . 그 관계는 두 사건이 그와 같은 역사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 이해에 열쇠를 제공할 수 있는 유일자인 전능한 신에게 수직으로 연결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 . . 지금 여기는 더 이상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의 단순한 고리가 아니고, 과거에 언제나 있어 왔고 동시에 미래에 완성될 어떤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어떤 것, 언제나 있는 어떤 것, 단편적인 지상의 인과적 사건의 영역을 넘어버리는 어떤 것이다”.

동시성은 벤야민이 명명한 구세주적 시간(Messianic time), 즉 순간적인 현재에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과 가까운 것으로 아우얼바하는 본다. 사물을 이렇게 볼 때 한편(meanwhile)이라는 단어는 중요치 않다(성 어거스틴의 시간개념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당겨서 본다). 동시성의 개념은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되었는데, 그것의 출현은 세속과학의 발달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중세의 순간적인 현재에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나타나는 시간상의 동시성의 개념을 대체하게 된 것은 벤야민의 말을 빌리자면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다. 이 공허한 시간 안에서의 동시성은 이른바 시간을 가로지르면서 예언과 완성에 의해 표시되기보다는 시간적 우연의 일치에 의해 표시되고 이 시간적 우연의 일치는 시계와 달력에 의해 측정된다(“한편” 이라는 개념은 근대성의 기반을 이룬다).

시간의 개념의 변화가 상상의 공동체로서 민족의 탄생에 왜 중요한지는 18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상상의 두 형태, 즉 소설과 신문의 구조를 보면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소설과 신문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같은 것을 재현하는 기술적 수단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1. 소설의 구조(발작의 명작이나 스릴러물의 전형적인 구조): 이 구조는 확실히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 안에 있는 동시성의 표현을 위한 방편이거나 ‘한편’이라는 단어 위에 입힌 복잡한 방식이다. 소설의 구조상, 인물들은 서로 필연적인 연관이 없이 우연적인 관계들로 맺어진다. 그래서 이들은 소설 안에서 서로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소설의 인물들은 서로를 알지 못하고 전혀 다른 시간들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독자는 서로 전혀 알지 못하는 두 인물을 마치 서로 연관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해한다. 이렇게 이들을 독자들이 연결시키는 이유는, 1) 그들이 <사회들>안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회는 확고하고 안정된 사회학적 실체들이어서 인물들은 서로 알지도 못한 채 길에서 서로 스쳐 지나가면서도 사회의 구성원으로 연결되는 듯 묘사될 수 있다. 2) 인물들은 모든 것을 아는 독자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 독자들은 신처럼 모든 행위들(인물들 간에는 서로 알지 못하는)을 한꺼번에 본다. 사회적 유기체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통해서 달력의 시간에 맞추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를 따라 앞으로 꾸준히 움직이는 견실한 공동체로 민족을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다. 즉 모든 존재들은 시간이라는 틀에 (동질화되어)묶여지는 것이다. 예로, 1887년 필리핀 민족주의 아버지 호세 리잘이 쓴 소설 『놀리 메 탕게레』을 보면, 소설의 시작에서부터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달에 만찬이 행해지는 것을 놓고 마닐라의 다른 지역에서 서로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화제 삼고 있다는 이미지는 즉시 상상의 공동체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아직도 알아 볼 수 있을 안로그가에 있는 집 . . .”이라는 구절에서 그 집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우리-필리핀 독자이다. 소설의 <내부적 시간>으로부터 마닐라 독자들의 일상생활이라는 <외부적 시간>으로의 자연스런 진행은 등장인물과 저자와 독자를 포용하고, 달력상의 시간을 통해 앞으로 움직이면서 단일 공동체의 단결을 최면처럼 확인해 준다. 신원도 모르는 익명의 사람들에 대해 친근함을 가지고 말하는 소설의 어조도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독자의 익명적인 모호성의 반대에는 저자의 명성이 있다. 이 모호성/명성은 또한 인쇄자본주의와 관련을 갖는다). . . . 또 프란치스코 발다자르의 소설 『알바니아 왕국의 플로란테와 로라의 이야기』의 경우는 이야기가 중간에서 시작되고, 완전한 이야기는 회상의 역할을 하는 연설들을 통해 전달된다 . . . 또한 호세 호아퀸 퍼난데즈 드 리자르디의 소설 『가려운 앵무새』의 경우, 외로운 주인공이 고정된 사회학적 풍경 사이를 이동하면서 소설 안의 세계와 밖의 세계를 융합시키는 것에서 <민족적 상상력>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 하나의 예로 인도네시아인으로 공산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인 마스 마르코 카르토디크로모가 발표한 『세마랑 힛탐』이 있다. 여기서도 외로운 주인공은 『가려운 앵무새』처럼 복수의 세계들과 사실로 묘사된 사회풍경에 병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 소설에는 주인공의 이름이 익명으로 되어 ‘우리의 젊은이’로 언급된다. 마르코의 ‘우리의 젊은이’는 인도네시아인 독자들의 집합체, 따라서 은근히 배태되는 인도네시아인의 <상상된 공동체>에 속하는 젊은이를 뜻한다. 굳이 이 공동체를 이름으로 명시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마르코의 의도를 보면, 공동체는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이다.

2. 신문: 마르코의 주인공은 세마랑 길가에서 불쌍한 부랑자의 시체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신문에 난 기사를 읽고 그것을 상상한다. 상상의 공동체는 여기서도 발견되는데, 그는 그 가련한 부랑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는 개인의 삶이 아닌 표본이 되는 사람을 생각한다. 근대적 문화의 산물인 신문의 허구성이 여기서 발견된다. 신문에 편집된 수많은 사건들은 행위자들이 서로 알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독자적으로 일어난다. 그들을 신문기사에 넣고 병치 시키는 자의성은 그들 사이의 연관이 상상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이것이 편집과 문필 관행의 본질이다. 이 상상의 연결은 두 개의 간접으로 연결된 출처에 기인한다. 1) 단순한 달력상의 일치. 신문에 있는 가장 중요한 상징인 맨 위의 날짜는 본질적인 관련(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제공한다. 신문의 소설적 형식은 구성면에서 다음 번의 재 등장을 기다리며 등장하는 인물이 사라져도 어딘가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확신시킨다. 2) 책의 형태로서 신문과 시장 사이의 관계. . . . 쿠텐베르그 성서의 출판이래 비대해진 출판 시장을 보면, 책은 현대식으로 대량 생산된 첫 공산품이었다. 책 시장이 다른 상품시장에 의해 왜소해졌지만 책이 수행한 사상의 보급이라는 전략적 역할은 근대 유럽의 발달에 가장 중요하였다. 책은 산술적으로 계량화된 다른 형태의 물질상품(설탕, 직물 등)과는 달리 똑같이 재생산될 수 있는 개별적이고 스스로 완비된 물건이다. 책은 자급자족성을 갖고 있다. 신문은 하루살이 같은 책이다. 신문이 인쇄 직후에 폐품이 된다는 것 때문에, 허구로써의 신문을 거의 정확히 동시에 소비하는 엄청난 대중의식을 창조한다(설탕소비와 비교해보라). 이 대중의식은 조용한 사적(private)인 시간에 행해진다. 그러나 각자는 그가 행하는 의식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동시에 반복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하루 한나절의 간격으로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반복 속에서, 세속적이고 역사적으로 시간이 측정되는 상상의 공동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신문독자는 알지 못하는 익명의 누군가가 똑같은 것을 보게 된다는 상상된 세계를 일상생활에 뿌리 내리고 있다. 현대 국가의 각인인 익명성에 대해 공동체의 확신을 창조하면서 신문은 현실 속에 조용히 침투해 온다.

민족을 상상하는 민족주의의 기원을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1) 특정한 경전언어가 진리와 불가분의 관계이기에 존재론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제공한다는 개념. 2) 사회가 상위 중심부(우주적 신성한 섭리에 의해 통치하는 군주) 밑에서 이 중심부를 둘러싸고 자연스럽게 조직된다는 믿음(지배자는 경전처럼 모든 존재에 내재해 있었기에 충성심은 반드시 위계적인 구심점을 향해 있었다). 3) 우주관과 역사가 구별되지 않고 세계의 기원과 인간의 기원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보는 시간의 개념. 이 개념들은 서로 어우러져 존재의 일상적인 운명(죽음, 상실, 예속)에 어떤 의미와 구원을 제공하며 인간의 삶을 사물의 본질 자체에 굳게 뿌리 내리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개념들의 퇴조는 경제변동, 사회적 과학적 발견, 소통 발달 등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형제애와 권력과 시간을 의미 있게 서로 연결하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인쇄자본주의는 급격하게 증가하는 많은 사람들이 심오하게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연결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출처>

앤더슨. 베테딕트.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 윤형숙 역. 나남.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