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주인

노예의 주인

타인을 지배하는 위치에 오르면 지배자는 자유를 획득하기 보다는 지배권의 첫 번째 가주체(pseudo-subject)가 된다. 조지 오웰(George Owell)이 단편 <코끼리를 쏘다>(Shooting the Elephant)에서 잘 보여주었듯이, 지배자가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박탈한 제국주의가 좋은 예이다. 주인이든 노예든, 갑이든 을이든, 지배권 하에 있는 한 둘 모두는 서로를 가두거나 서로를 빨아먹는 종속 관계를 형성한다. 둘은 피할 수 없는 운명적 결사체처럼 서로 징그럽게 꼬이고 꼬이고 꼬이고 꼬이고 꼬여버린다.

오웰은 1920년대에 버마 식민지에서 제국의 경찰로 활동한다. 식민지에서 그는 지배자 혹은 지배자 하수인의 역할을 통해 오히려 지배자와 제국의 자폐증적인 모순을 깨닫게 되는데, 그 한 일화가 바로 코끼리의 난동으로 인해 자신의 역할을 인식하게 된 사건이었다. 코끼리의 난동으로 혼란이 일어나자 식민지 원주민들은 지배자인 경찰에게 코끼리를 죽여 달라고 호소한다. 현장에 갔을 때 이미 잠잠해진 코끼리를 죽일 마음이 없었던 그는 그냥 돌아가려 했지만, 자신을 바라보며 지배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원주민들의 시선에 사로잡히고 만다. 마조키스트가 자신에게 매질 할 사람을 물색하여 그와 계약을 맺는 유머러스한 상황처럼, 지배자는 자신이 지배하는 사람들로부터 자기들의 주인이 될 것을 요청 받는 것이다. 이러한 마조히즘적 상황을 깨닫는 순간에 관한 뜻 깊은 구절을 읽어보자.

“그러나 그 순간 나를 따랐던 군중들을 둘러보았다. 엄청난 군중이었다. 적어도 이 천 명은 넘었으며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멀리까지 양쪽 길이 꽉 막혀 있었다. 싼티나는 옷 위에 달린 노란 얼굴들이 바다처럼 보였다. 이 작은 구경거리에 대한 기대로 모두의 얼굴에는 기쁨과 흥분이 넘쳤다. 그들은 코끼리가 곧 사격당할 거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들은 속임수를 부리는 마술사를 보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싫어했지만 마술의 총을 들고 있는 내가 그 순간 만큼은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갑자기 나는 그 코끼리를 결국은 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내게 그것을 기대했다. 그러니 나는 그렇게 해야했다. 이천명의 뜻이 내 등을 내리 누르며 저항할 수 없도록 떠미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 순간, 내가 손에 총을 들고 거기에 서 있었던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처음으로 동양 안에서 백인의 지배라는 무의미, 즉 공허를 알았다. 바로 여기, 무기도 없는 원주민 군중 앞에, 얼핏 일개 지도자처럼, 총을 든 백인인 내가 있었다. 그러나 실상 나는 뒤에 서 있는 노란 얼굴들의 뜻에 따라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우스꽝스러운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이 순간 알았다. 백인이 독재를 시작할 때 그가 파괴한 것은 그 자신의 자유이다. 그는 일종의 공허하게 폼 잡는 마네킹, 나리라고 하는 판에 박힌 인물이 된다. “원주민들”에게 지배자의 인상을 주기 위해 인생을 다 받치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모든 위기 때마다 “원주민들”의 기대에 부응해야만 하는 것이 지배의 조건이기에 그렇다. 그가 가면을 쓴다. 그러면 그의 얼굴은 가면에 꼭 맞게 자란다. 나는 코끼리를 쏴야했다. 내가 소총을 가져오라고 보냈을 때 난 이미 스스로 그 일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나리는 나리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는 단호해 보여야 한다.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분명하게 행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내 구두 소리에 맞추어 행진하는 이천명을 데리고, 손에는 총을 들고, 이 길을 쭉 따라가서,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서서히 사라질까ㅡ안돼, 그건 불가능했다. 군중들이 비웃을 것이다. 내 모든 인생은, 동양에 있는 모든 백인들의 인생은 비웃음을 당하지 않으려는 기나긴 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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