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사회와 총체성의 음모

소비사회와 총체성의 음모

소비 자본주의의 문화생산은 상품(과 그 교환)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문화를 제공할 테니, 돈을 달라!”), 우리는 그 문화적 내용 보다는, 무의식적이고도 집단적인 형식의 소비와 구매를 실천함으로써(구매 행위는 개인 취향의 전개가 아니다), 그 상품의 형식을 실현하고 있다. 좌측이든 우측이든, 상류든 하류든, 그와 같은 교환의 일상적 실천 속에서 우리는 사회에 범재하고 있는 신과도 같은 어떤 것에 대해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개인들의 집단적 소비실천은 마치 슈퍼에서의 구매행위가 사회 참여의 한 형태인 양 알레고리화되어, 무의식적인 환상을 통해 추상적 ‘총체성’의 관념으로 나아간다(“구매자는 소비주체이고, 소비 공동체의 일원이며, 경제의 주체이다.”). 그리고 미디어는 이 총체성을 관념적으로 입증한다. 미디어 안에서 우리는 익숙한 귀속감과 아울러 그에 동반되는 알길없는 어떤 허기를 느낀다. 그래서인지 텔레비젼과 스낵에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강한 밀착 관계가 있다.

Parallax_View_movie_poster

이러한 논의는 넓게는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미디어 이론(“미디어는 국가이고 세계이다”), 좁게는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민족 공동체(상상으로 만들어진 경험의 총체) 이론으로 연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 제이미슨(Frederic Jameson)은 총체성의 관념을 획책하는 모든 담론과 실천과 이데올로기를 ‘음모(conspiracy)’라는 용어로 처리한다. 그리고 음모에 관한 영화(첩보 영화, 정치 스릴러, 범죄 스릴러 등)들을 자본주의에서의 소비와 마케팅, 그리고 그 시스템이 형성한 총체적 공간, 충만하면서도 비어있는 공간속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의 정동의 초상을 묘사한다.

제이미슨은 파큘라(Alan J. Pakula) 감독의 ‘편집증 3부작’(Paranoid Trilogy)중에서, <암살자>(The Parallax View)에 등장하는 한 인물을 설명한다. 기자(주인공)는 음모를 밝히기 위해 신분을 속이고 패럴랙스 회사에서 모집하는 요원선출 시험에 지원하고(기자가 테스트 받는 장면보기), 나중에 이 회사에서 직원 한 사람이 기자에게 합격을 통지하기 위해 파견된다. 그는 기자에게 아주 상냥하고 차분하고 인간적인 유대감과 동정심 같은 것을 보여주고, 함께 일할 동료의 우정과 신뢰를 다지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동료애는 회사에 대한 충성심으로 확대되고, 결국 기자는 암살계획에 교묘하게 이용되어 죽음에 이른다. 제이미슨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체계와 기업으로부터 무의식적 임무를 부여받아 수행하는 “음모의 대리인”이라고 이 직원을 소개한다.

” … [이 영화는] 음모를 수행하는 주체들을 특별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을 말해야 할 것이다. 즉 그 거친 사람들, 원흉들, 음모의 가담자들 중에서 한 사람은 조용하고 차분하며, 서두르거나 재촉하는 일 없이 사람을 상냥하게 대하면서, 마치 그것이 기업의 태도인 냥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들은 [기업의 피해자들에 비해] 잘 차려입고, 잘 먹고, 말 그대로 개인적인 기질을 결여하고 있다[즉, 개인성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자신은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에 불과함을 분명히 한다]… 이들은 비교적 우리 사회에서 특권을 함축하고 있는 자들이다… . 그러나 그들 역시 착취당하는 인물들이다… . 임무에 사로잡힌 자들, … 그러나 이들은 희생자들이 사로잡혀 있는 공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임무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이 음모의 대리자들이 가지고 있는 근심은 웃는 얼굴로 신뢰를 보여주어야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 임무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기업 차원의 문제이며, 네트워크 또는 제도의 존속이나, 추상적인 혼란이나 태만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 [그 추상적 혼란과 태만 속에서] … 이들은 모두가 … 집단적 조직 그 자체의 텅 빈 공간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현존을, 강하면서도 상냥한 배려, 그 무게중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즉 어떤 목적의식에 골몰해 있지만 동시에 거기에는 무관심한 친절에다가 쏟아 붓는다. 그러나 이 같이 전혀 다른 종류의 배려는, 비개인화되어 있으면서도, 또한 그 고유의 불안, 말하자면 개인의 행위에 대해 어떠한 개인적인 결과도 파생하지 않는, 무의식적이고 기업 차원의 불안을 수반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이 흘리는 땀은 이중의 책무에 복무하고 있다. 하나는 그 집단적 책임이라는 뱃지로서. 그리고 클로즈-업의 친밀감 속에서 느껴지는 모든 불쾌함의 실체로서[즉,땀이란 성실과 노력의 도덕적 기호이므로, 동료애나 친밀감을 내포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축축한 습기로서, 불쾌감을 자아낸다]… . [그래서 땀은] … 간혹 가다가 다른 감각 수준 위에 투사된 하나의 지표인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친밀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발견을 뜻한다. 즉 우리가 무의식중에 하나의 집단적 네트워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의 발견. 그리고 멜로드라마가 없이도 우리가 얼마나 쉽게 상처받는지를 입증해주는 그 생소한 육체적 온기를 우리가 깨닫기 전에, 심지어는 고독한 순간에도 조차, 우리들은 이미 너무나 가까워져 있다는 사실의 발견[여기서 제이미슨이 말하는 가까움이란, 서로 시선을 주고 받으면서, 의식 속에 스스로 각인한 타자성(otherness)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형태의 가까움을 의미한다]. 사르트르에서 푸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들을 넘어 현대 페미니즘에서도, 시선(視線)은 특권적인 존재론적 공간이었으며, 그 공간 속에서 우리의 권력은 상실되고, 조작 가능한 객체들로서 극화되고 배치되었다… . [그것은 권력 공간, 즉 텅 빈 대타자(the absent Other)나 팬옵티콘 감시탑(Panopticon watch tower)을 투영하고 있다] … 음모는 승리한다… . 그러나 그것은 피해자들이 결여하고 있는 특별한 형식의 ‘권력’을 음모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음모는 집단적인데 반해, 피해자들은 각각의 소외된 상태 속에서 전혀 집단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Fredrick Jameson, the geopolitical aesthetic: cinema and space in the world system, Indiana: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 pp. 65-66.) [  ]표시는 역자의 주석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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