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파스칼

불특정 공간을 구성하는 서정추상 유파의 방식을 검토 중에 있다.

유파의 이미지들을 보면 이들이 “흰색”과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흰색은 선택을 강요하는 색이다. 그래서 흰색은 어둠 만큼이나 공포스러운 환경을 암시한다.

잠재성과의 싸움이나 갈등의 환경인 표현주의적 어둠과는 달리 백색 환경에서 우리는 선택적 상황에 열려 있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백색은 인간이 자신의 주체성을 순수한 형태로 경험하는 환경이다. 그것은 무한한 자유 속에 던져진 존재의 공포를 현시하는 색이라 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백색환경은 신 안에 있는 존재가 처한 선택의 상황이기도 하다.

백색은 모든 빛을 머금고 있으며, 모든 색을 단일한 하나의 특질로 묶어두는 신을 닮아 있다. 신 자체가 모호한 백색의 존재라 할 수 있다.

파스칼은 인간이 처한 이러한 백색환경, 즉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여 인간이 선택의 한복판에 이미 들어왔다는 것을 설득하려고 시도했던 사람이다. 냉소적 이성주의자인 리베르탱에게 그는 말한다: “당신은 이미 배에 올라탔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선택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즉 “선택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비-선택을 선택할 것인가?”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 대해 그가 독특하게 해석한 “내기이론”은 바로 이러한 선택적 상황의 불가피함과 선택의 정당성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신은 존재한다”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선택할 것인가? 가령, 전자의 선택이 승리한다면, 그 대가는 무한의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선택이 승리한다면, 얻어지는 것은 일생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이 존재한다”는 쪽에 판돈을 거는 것이 더 유익하고 합리적이다. 등등 . . .

볼테르나 발레리 등으로부터 “천박하고 세속적인 호교론”이라고 비난을 받았던 파스칼의 내기이론의 본질은 신의 존재 유무가 아니라, 종교적 주체의 믿음의 결정 문제였다. 미래의 불확실한 존재에 대한 믿음은 합리적 이성이 아니라 그의 존재양식(도덕적 필요, 물질적 필요, 심리적 필요 등)에 의존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성의 자기 인식 이전에 몸과 의지의 문제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종교적 믿음이란 신의 존재 유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수를 받고 성상 앞에 무릎을 꿇는 행위로부터 나온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파스칼의 설득 논리에는 “이익”, “효용”과 같은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감염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신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과학적 논증을 불러오고 공리주의적 해설이 필요하다는 사실만큼 신의 존재의 불확실성을 보여준 예는 없을 것이다.

파스칼의 내기이론과는 다소 무관한 내용. 파스칼을 검토하다가, 그의 <팡세>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한다.

나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행인들을 보기 위해 창가에 서 있는데 내가 그곳을 지나간다면 그는 나를 보기 위해 창가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는 유독 나만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그 사람의 미모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다, 만약 천연두가 그를 죽이지는 않고 그 사람의 아름다움만을 죽인다면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될 테니까.

만약 나의 판단력, 나의 기억력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잃지 않고도 이 특성들은 잃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육체 안에도 정신 안에도 있지 않은 이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이 특성들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므로 그것들이 나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특성들에 의하지 않고 어떻게 육체나 정신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한 인간의 영혼의 실체를 추상적으로, 그 안에 있는 특성과는 상관없이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있을 수도 없고 또 옳지도 않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특성만을 사랑한다.

그렇다면 지위나 직책으로 인해 존경받는 사람들을 경멸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단지 빌려온 특성들로 인해 사랑하므로. (Pascal, Pensees, Louis Lafuma 판 167번 노트)

파스칼의 오류는 특성들을 동질화했다는 점에 있다.
모든 특성들에는 위계가 있다. 육체적 욕구의 추구와 진리에의 욕구가 다르듯이.

따라서 지위나 직책으로 인해 존경받는 사람들을 경멸해서는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위나 직책을 존경하고 따르고 예속된 사람들을 경멸해서는 안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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