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의 <시적영화 IL Cinema di poesia>(1965)에 관한 몇 가지 발췌 노트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의 <시적영화 IL Cinema di poesia>(1965)에 관한 몇 가지 발췌 노트

1. 문학에서 영화로의 전환

“소설 기법을 사용해서는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느낌은 일종의 무의식적 자기치료를 통해 다른 기법, 혹은 영화기법을 사용하고 싶다는 욕구로 변했다… . 기법 변화로서 영화를 선택했다.” => 문학이 영화보다 깊이 있고, 본질에 더 근접할 것이라는 문학우월주의는 알게 모르게 속물근성의 발로이다. 그러한 속물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오로지 문학이 고급문화에 속한다는 장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문학이냐 영화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 접근을 가능케 하는가의 방법론적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가령, 구체적지각, 구체성, 직접성을 주장했던 김우창 교수가 영화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더군다나 소설도 아닌 시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은 그가 얼마나 자신이 선택한 방법을 정당화하고 고수하고 포기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지식을 이용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싶다.

2. 영화언어와 문학언어의 공통기호: 이미지 기호(im-segni)

3. 이미지 기호의 두 원형:
(1) 객관적 원형: 구어에 동반되는 제스처, 수많은 기호표식이 있는 현실,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 등 (2) 주관적 원형: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는 사람 속에 있는 기억과 꿈의 세계. 이미지기호의 주관적 원형은 기억과 꿈 혹은 ‘자기 자신과의 커뮤니케이션’ 이미지이다. 꿈은 이미지 기호의 연속이다. 그것은 클로즈업, 롱쇼트 등의 영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4. 언어기호(lin-segni)와 이미지기호, 문학언어와 영화언어의 차이:
문학언어는 역사적으로 세밀화, 정교화되어, 통사적 규칙에 따라, 내러티브 중심. 반면 영화언어는 거칠고 거의 동물적이며, 문법이전, 비합리적 유형, 통사적 규칙이 없고, 이미지중심. 통사이전, 역사 이전이기 때문에 근원적. 꿈의 형식, 주관성이 강조되는 “시적인 특징”이 있다. 왜 시적인가? 주관적, 기억, 꿈 … 산문처럼 인과적, 논리적, 선형적, 내러티브가 없이 파편적이고, 섬광에 의지하고, 이미지 중심적이고, 스타일과 채색이 중심.

5. 언어기호체계와 이미지기호체계 구성
언어기호체계는 사전으로 정리가 되어 있음. 문학작가는 사전에 마련된 단어들을 배열, 재구성. 반면, 영화작가는 사전이 없고, 중심이 없고, 무한한 가능성. 혼돈 속에서 이미지를 꺼내야. 사전에서 단어를 끄집어 내기 보다는 반대로 이미지로 사전을 구성하는 식. => 이는 영화사 전체에 걸쳐 스타일의 관계들을 만들어냄. 가령, 기차의 바퀴 이미지=시간을 나타내는 식

6. 영화언어의 주관적 경향
이미지 기호는 통사적 규칙이 없기 때문에 이미지의 선택은 주관적일 수 밖에 없음. 공통된 제도화된 사전이 없으므로, 현실에 대한 작가의 이데올로기, 경험, 기억, 주관적, 시적인 비전에 의존. 이미지 기호의 주관적 원형들이 이미지 기호에 ‘주관성’의 직접적 토대를 제공, 시적인 특징을 부여. “영화기호의 경향은 주관적이고 서정적인 표현 경향”

7. 시의 언어와 산문의 언어
문학언어는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이중적 성질로, ‘시의 언어’와 ‘산문의 언어’로 구분. 영화언어는 내러티브의 산문의 언어의 전통을 통해 객관성의 경향을 띠었지만, 네오리얼리즘이나 누벨바그 등에 이르러 주관성이 두드러지는 “시적인 영화”가 만들어짐. => 결국, 시적인 영화는 주관적, 비통사적, 시적, 근원적, 이미지, 스타일, . .

8. 자유간접 화법
문학에서의 자유간접화법은 작가가 등장인물의 정신으로 들어가, 혹은 인물의 심리와 언어와 스타일에 감염되어 그의 스타일로 말하는 방식 => 인용부호 없는 직접발화이고, 인물을 보다 직접적으로 보여주므로 자연주의적. 자유간접화법은 인물의 사회적 조건이나 상황에 대한 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면 인물의 언어는 그의 사회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그의 언어를 빌어 말한다는 것은 사회학적 심리적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회학적 심리적 계급의식: 자유간접화법의 특징이다. 따라서 자유간접화법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작가에게 사회의식이 있음을 의미한다. => 작가는 자신의 인물의 구어를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되살려내고,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 조건을 표현하기 위해 자유간접화법을 사용.

=> 중산층 문학에서(계급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즉 그 자신을 휴머니티 전체와 동일시하는), 자유간접화법은 일종의 구실(pretext)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세계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해석, 자신의 주장, 자신의 정치의식 등을 표현하기 위해, 마치 다른 계급의 직접적 상황에 처한 인물의 언어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유간접화법을 통해 인물의 입을 빌어 말하는 것이다.

9. 자유간접시점쇼트
문학에서 작가가 인물의 언어와 정신으로 들어가 현실을 표현하듯이, 감독은 등장인물의 시점을 통해 현실의 이미지를 제시… . “작가가 인물들의 발화를 재창조할 때, 그는 심리학적으로 그리고 언어학적으로 자신을 인물과 뒤섞게 된다. 따라서 자유간접화법은 작가의 언어와 비교했을 때 항상 언어학적으로 식별된다. 작가는 서로 다른 사회적 조건의 유형에 따른 다양한 언어를 다시 부활시켜 재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모든 언어학적 현실은 사회적으로 구별된 그리고 구별하는 언어의 총체이며, 그리고 “자유간접화법”을 사용하는 작가는 틀림없이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결국 이 깨달음은(인식, 자각) 일정한 형식의 계급의식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있을만한 “제도적 영화언어”의 현실이 존재하지 않거나, 있다고 해도 무한하다. 그래서 작가는 매번 이 무한성으로부터 자신의 어휘를 잘라내야만 한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어휘 속에서, 그 언어는 반드시 interdialectal 하고 international 하지 않을 수가 없다. because our eyes are the same the world over. They cannot take into consideration, because they don’t exist, special languages, sublanguages, slang–in short, social differences(눈은 특수언어, 하위언어, 슬랭, 즉 사회적 차이를 고려할 수가 없다. 왜냐면 그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Or if they do exist, as in fact they do, they are totally beyond any possibility of classification and use.”(177) 그래서 감독이 인물 속으로 들어가 그의 눈을 통해 사건의 변화를 설명하거나 세계를 표현할 때, 언어라는 도구는 무가치할 수 있다. => 가령, 농부가 바라보는 현실과 교양 있는 부르주아가 바라보는 현실은 다르다. 이들에게는 사물이 똑같이 보이지 않고,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가령, 농부에게 비는 위협적이거나 감사해야 할 그 무엇이지만, 부르주아에게 비는 로맨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규정화할 수가 없다. 그것은 순전히 inductive 하다. 따라서 실제로, 사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입각하여 있을 수 있는 보편적 언어의 수준에서 보자면, 감독이 지각할 수 있는 자기자신과 인물의 차이는 오로지 심리학적이고 사회적인 것이지, 언어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감독은 이 언어의, 즉 타자의 현실에 대한 가상적인 “시선”의, 어떠한 자연주의적 모방(mimesis)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177-178)<<파졸리니가 말하는 자연주의적 모방이란, 동질화된 언어의 재현이 아니라, 동물적이고 거친 이미지에 입각한, 비문법적 시적 이미지의 재현을 의미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것이 모방이 아니라 상호성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차이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것이지, 통사적 질서에 따라 동질화된 언어적인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다른 인물의 대화를 되살려낸다 해도 인물의 심리를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스타일을 통해서이다(“his activity cannot be linguistic; it must, instead, be stylistic.”(178). 언어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자유간접 쇼트의 특징은 언어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스타일의 문제. 자유간접 시점쇼트는 동질화하는 언어의 경향을 넘어서 있다. 영화에서의 이미지는 야만적이고 불규칙하며 공격적이고 시각적이며 꿈의 속성을 갖고 있는 원초적이고 근원적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내레이션 관심이 억압했던 표현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10. 강박화면
안토니오니의 <붉은 사막 IL deserto rosso>에서의 강박적 화면. 혹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혁명전야 Prima bella rivoluzione>에서, 신경증에 걸린 부르주아 여자의 눈에 비친 세계. 별 차이 없는 동일한 이미지의 두 시점을 계속 접근시키거나, 동일한 화면을 담은 두 쇼트를 연속시켜 가까이 보거나 멀리 보거나, 정면에서 보거나 비스듬히 보거나, 혹은 두 가지 다른 렌즈로 대상을 촬영하며 연속으로 제시하거나. 세부적이고 세밀한 것에 대한 집요하고도 반복적인 강조 =>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강박적인 고집이 생겨난다… . 신경증에 걸린 여자의 시각을 유미주의에 빠진 자신의 시각으로 대체 => 자신의 시각을 인물의 눈을 통해 표현하는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 <붉은사막>에서의 반주관적 경향: 연촛점의 반주관성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 첫 시퀀스부터 연촛점으로 시작되는 노래목소리 … 누구의 관점인가? 객관적 관점이 아니고, 아마도 주관적 관점처럼 보이지만, 누구의 주관인지 제시되지 않았다. 반주관적 관점? 감독 자신의 환상 같은 것? => 이 연촛점은 이제 여자와 함께 나온다. 노동자 파업 현장에서 노동자들 무리가 지나갈 때, 연촛점으로 제시 => 그리고 나서 여자의 뒷모습이 나오며, 그녀가 보는 과점으로 대체된다 => 완전주관도 아니고, 완전객관도 아닌 반주관 시점이다. 그 이후 여자의 신경증과 연촛점이 빈번히 나온다. => 그 외에 이상한 소리 => 그녀의 발작, 불면 … => 병원에서 만난 소녀에 대한 얘기 => 병원을 나가면서 스스로에게 질문: “내가 누구지?”

(원문요약 및 주석, 178 ~)
“이들의 구체적인 예로서, 안토니오니, 베르톨루치, 그리고 고다르 – 여기에 브라질의 로차(Rocha), 혹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포만(Forman)을 들 수 있다.
(1) 안토니오니(<붉은 사막>에서)의 경우, …
For example, those two or three out-of-focus violet flowers in the foreground in the shot in which the two protagonists enter the house of the neurotic worker; and those same two or three violet flowers which reappear in the background, no longer out of focus, but aggressively in focus, in the shot of the exit.(즉, 두 남녀가 집으로 들어갈 때에는 전경에 연촛점으로 커다랗게 꽃이 화면을 차지 했는데, 두 남녀가 집에서 나와 출구에 있을 때 배경으로 보이는 그 꽃이 연촛점이 아닌 인포커스였다) Or, consider the sequence of the dream, which, after so much delicacy of color, is suddenly conceived in an almost blatant technicolor (in order to imitate, or better, to reanimate through a “free indirect point-of-view shot” the comic-book idea that a child has of tropical beaches).(즉, 꿈 장면에서, 상당히 섬세한 색채가 나온 후, 갑자기 완전히 노골적인 총천연색으로 상상되고 있다(이는 “자유간접 시점쇼트”를 통해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만화책의 열대해변을 모방하거나, 더 정확히는 재생하기 위해서이다)). Or, consider also the sequence of the preparation for the trip to Patagonia, the workers who listen, etc.–that stupendous close-up of a distressingly “real” Emilian worker, followed by an insane pan from the bottom up along an electric blue stripe on the whitewashed wall of the warehouse.(즉, 창고에서 노동자들에게 사업설명을 할 때, 배우가 아닌 실제의 노동자들의 얼굴을 커다랗게 클로즈업한다. 그리고는 정신이상자와도 같은 패닝을 하면서 화면을 천천히 옮기다가 아래에서 부터 점점 흰색 벽을 따라 올라가면서 푸른색칠한 페인트 줄무늬를 따라 천장에 오르다가 부서진 전선줄에 이른다. 그리고는 인물의 약간의 한숨과 다른 곳을 바라보는 모습이 나온다). 이 모든 것들은 깊고, 신비스러운, 그리고 이따금 아주 엄청난 형식적 관념에서의 강렬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안토니오니의 환타지를 자극한다.(여기서 말하는 형식적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그러나, 본질적으로 영화의 조건이 바로 이러한 형식주의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극도로 의미를 가지는 스타일 운용의 두 가지 측면을 검토하고자 한다(이는 또한 베르톨루치와 고다르의 경우가 같은 것이다). 그 과정의 두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the sequential juxtaposition of two insignificantly different points of view of the same image; that is, the sequence of two shots which frame the same piece of reality, first from nearby, then from a bit further; or, first frontally and then a bit more obliquely; or, finally, actually on the same axis but with two different lenses. This leads to an insistence that becomes obsessive, as it becomes the myth of the actual, distressing, autonomous beauty of things.(동일한 이미지를 다른 관점에서 연속으로 병치하여 처음엔 정면, 다음엔 비스듬히 등, 혹은 실제로는 동일한 축에서 두 개의 다른 렌즈를 쓴다. 여기서 고집스러움이 생겨나고, 이것이 강박적이 되어, 현실적이고, 괴로움을 주고, 자율적인 사물의 아름다움의 신화가 된다)
The technique of making the characters enter and leave the frame, as a result of which, in an occasionally obsessive manner, the editing comes to consist of a series of “pictures”–which we can call informal–where the characters enter, say or do something, and then go out, leaving the picture once again to its pure, absolute significance as picture. This picture is followed by another analogous picture, where the characters enter, etc. So that the world is presented as if regulated by a myth of pure pictorial beauty that the personages invade, it is true, but adapting themselves to the rules of that beauty instead of profaning them with their presence. (인물을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게 하는 테크닉으로, 간혹 강박적인 방식으로, 편집이 일련의 “그림”으로 구성된다… 들어와서 말하거나 행동을 하고 나가면, 그림이 다시 한번 순수하게 비워지고, 비로소 화면으로 절대적인 의미가 나온다. 이 그림은 다른 유사한 그림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세계가 재현되는 방식이 마치 순수한 회화적 미의 신화에 의해 조절되는 것처럼, 인물이 침범하여 들어가고, 그러나 자신들의 존재로 그 미를 훼손시키기 보다는 그 미의 규칙에 적응해 가는 것처럼.)
따라서 “강박적 프레임”이라고 하는 영화의 내적인 법칙은 형식주의의 만연을 결국 해방된, 그래서 또한 시적인 신화로서 제시한다.
그러나 이 해방이 안토니오니에게 어떻게 가능할까? 간단하다. 전체 영화와 일치하는 “자유간접 시점 쇼트”를 위한 “스타일상의 조건”을 창조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붉은사막>에서 안토니오니는 더 이상 자기자신의 세계에 대한 형식주의적 비전을 일반적으로 벌어지는 내용(소외로부터 비롯된 신경증의 문제)에 투사하지 않는다. 초기에는 약간 어설프게 뒤섞긴 했다. 그 대신에, 그는 자신의 신경증적 인물 속에 자기자신을 뒤섞음으로써 세계를 바라본다. 그럼으로써 그녀의 눈을 통해 보이는 사실들을 재생한다(그녀는 사고가 아니라, 전문적인 보호가 필요한데, 이미 자살기도를 했다) 이러한 문체상의 장치를 통해, 안토니오니는 그의 가장 심층적으로 느끼는 순간을 해방시킨다: 그는 결국 자신의 눈을 통해 보이는 세계를 재현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경증자의 비전을 자기 자신의 심미주의적 착란적 시각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이 전면적인 대체는 두 개의 있을 법한 비전의 유사성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 It is clear that the “free indirect point-of-view shot” is a pretext, and Antonioni took advantage of it, possible arbitrarily, to allow himself the greatest poetic freedom, a freedom which approaches–and for this it is intoxicating–the arbitrary.(자유간접 시점 쇼트는 일종의 구실로서, 안토니오니는 이를 이용하고, 어쩌면 자의적으로, 자신으로 하여금 가장 탁월한 시적 자유를 허용한다.)

(2) 베르톨루치의 경우
프레임의 강박적 부동성은 베르톨루치의 <혁명전야>에서 전형적. 그러나 안토니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베르톨루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안토니오니의 관심을 끄는 것과 같은 세계의 파편, 즉 프레임에 가두어지고, 그 프레임에 의해 자기충족적인 비유적인 미의 조각으로 변형되는 파편이 아니다. 베르톨루치의 형식주의는 훨씬 덜 회화적이며, 그의 프레임잡기는 그림에서처럼 신비스러운 자율성을 가진 수많은 조각들로 현실을 세분하면서, 비유적으로 현실에 작용하지 않는다. 베르톨루치의 프레임은 약간 사실주의적인 하나의 표준에 따라 현실을 고수한다(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Charlot에서 Bergman에 이르는, 고전주의로 이어지는 시적 언어의 테크닉에 따라). 현실의 조각이라는 프레임의 부동성은(the river Parma, the streets of Parma, etc.) 깊고도 불확실한 사랑의 고상함을 입증한다.
실제로, <혁명전야>의 전체 스타일 시스템은 아주 긴 “자유 간접 시점 쇼트”로서, 젊은 신경증 이모라는 인물의 지배적인 정신상태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안토니오니의 경우 신경증 여성의 비전을 감독 자신의 형식주의적 비전으로 완전히 대체한 것과는 달리, 베르톨루치에게서는 그러한 전면적 대체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신경증 여성의 세계비전과 작가의 비전의 상호오염(a mutual contamination)을 발견하게 된다. 이 비전들은, 불가피하게 비슷한 것으로, 쉽게 식별되지 않는다–그들은 서로에게 드리워져 있다; 그들은 동일한 스타일을 요구한다.
프레임과 편집리듬의 “고집스러운 휴지(insistent pauses)”. (로셀리니의 네오리얼리즘이나 그 밖의 신화적 리얼리즘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장치들의 계획적인 리얼리즘은, 쇼트나 편집리듬의 비정상적인 지속이 일종의 기술적 반감이 터질때까지 계속됨.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이러한 고집스러움, 특히 지엽적인 것의 특정 세부에 대한 집착은 영화의 방식과 관련하여 어떤 일탈에 가깝다: it is the temptation to make another film. 간단히 말해 그것은 저자의 현존을 의미한다. 비정상적인 자유로 자신의 영화를 초월하고, 끊임없이 그것을 포기하도록 하는, 그래서 갑작스러운 열망이 끼어드는, 결국 이는 자기자신의 활력적 경험의 시적 세계(poetic world)에 대한 잠재적 열망에서 나온다.<<말하자면, 누군가와 대화를 하거나, 무슨 일을 하거나, 일상적인 생활을 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신경증적 비전 혹은 시적 비전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어떤 사물을 뚫어지게 주시하면서, 그러나 그것에 포커스를 맞추지는 않은 채, 자신의 시적 비전에 빠지는 경우. 사물들이 비스듬이 보이면서, 사물의 객관성과 나의 주관성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는 상태. 이것은 일탈적 상황이다. 이는 얼굴이 하얗게 비워진 상태이고, 긴장이 없고, 질적 변화가 없는 얼굴이지만, 그렇다고 어떤 대상을 강렬하게 추구하는 사유도, 근엄한 얼굴도 아닌, 일종의 일시적 delirium 착란상태이다. 얼굴에 드러난 주관성. 예술가들의 신경증적 비전이다. 이것이 파졸리니가 말하는 거짓된 객관주의의 과정에 의해 신비화된 주관성, 즉 자유간접주관성이고, 이러한 이미지를 지배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시적영화이다. 안토니오니 등>> 다 드러난 주관성의 순간, 위장하고 있는 듯한 “자유 간접 관점 쇼트”의 결과인 거짓된 객관주의<<즉, 건성으로 보는 것, 실은 주관성에 빠져 흐릿하게 보이는>>의 과정을 통해 주관성이 완전히 신비화된 영화에서 주로 나온다. 한마디로 말해, 주인공의 정신상태에 의해 산출된 테크닉–방향감각을 잃어, 좌표를 파악하지 못하고, 세부적인 것에 강박적이 되고, 강제적인 친절에 끌리는(attracted by compulsory kindness)–하에서, 적잖이 신경증적인 감독에 의해 보이는 세계가 계속해서 표면으로 올라와, 어떤 우아하고, 애가조의 정신에 의해 지배된다. 그는 결코 고전주의자가 되지는 않음.

(3) 고다르의 경우
그와는 반대로 고다르는 거칠고(brutal) 약간 저속하다(vulgar). 그에게 애가는 어울리지 않는다. 파리인으로서, 그는 그렇게 지방색이 강하고 시골스러운 감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는 안토니오니의 형식적 고전주의와도 다르다. 그는 완전히 후기-인상파적이다. 그는 보수주의 안에서 정체된 낡은 관능도 없고, … 고다르는 도덕적 명령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맑스주의적 계명들에 대한 의무도 없고, 아카데미아의 나쁜 신념도 없다. 그의 활력은 억제되지도 않고, 겸손도 없고, 망설임도 없다. 그의 활력은 그 자신 안에서 세계를 재구성. 심지어 자신에 대해 냉소적이기까지. 고다르의 시학은 존재론적(ontological)이다–그것은 cinema라고 불린다. 그의 형식주의는 따라서 내적으로 시적인 하나의 절차(technicality)이다: 움직이는 가운데 카메라에 의해 체포된 모든 것은 아름답다. 그것은 reality의 기술적 재건, 또한 따라서 시적인 재건이다.

물론, 고다르 역시 흔한 게임을 한다; 그도 역시 자신의 기술적 자유를 보증해 줄 주인공의 “지배적 상황”, reality와 관련하여 신경증적이고 수치스러운 지배적 상황을 필요로한다. 따라서 고다르의 주인공들 역시 병들어 있다; 그들은 부르주아지의 예민한 꽃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의학적 치료를 받지 않는다. 그들은 극도로 병들어 있지만, 활력적이다<<대표적인 경우가, 비브르사비에서의 미셀과 미국여자이다. 미셀은 느아르영화를 흉내내며 삶의 공허를 환상으로 치환, 여자 역시 회화적 여주인공에 환상. 그러나 이들은 괴로와하지 않고 활력적이다>>. 그들은 아직 병리적 상황으로 넘어가는 문턱으로 이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새로운 인류학적 유형의 평균을 대변할 뿐이다.<<이 구절은 들뢰즈가 말한 부분과 뉘앙스가 다르다. 파졸리니는 아직 병리적 상황으로 가지 않았을 뿐이라고 한 반면, 들뢰즈는 이것이 병적이지 않기 때문에, 미래의 인간유형의 탄생을 예고한다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강박증 역시 그들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특징짓는다: 세부적인 것 혹은 제스쳐에의 강박적 집착(여기서 영화적 기법이 나오는데, 문학기법보다 더 상황을 강렬하게 한다). 그러나 고다르에게서는 주어진 어떤 개별 대상에 대한 고집스러움이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가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형식으로서의 대상에 대한 숭배(안토니오니처럼)도 없고, 잃어버린 세계의 상징으로서의 대상에 대한 숭배(베르톨루치처럼)도 없다. 고다르는 숭배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은 같은 수준 위에 놓고, 정면으로 놓는다. 그가 구실로 삼는 “자유간접 담론”은 일종의 대립적 배열로서, 세계의 수 많은 세부들간의 차이에 신경을 쓰지 않으며, 연속성 속에서 끊어짐이 없으며, 그 분절되지 않은 언어를 통해 통일성으로 재구성된 분열의 차갑고도 거의 자기-만족적인 강박(그의 초도덕적인 인물에서 전형적인)에 의해 편집된 것이다(His pretextual “free indirect discourse” is a confrontational arrangement which does not differentiate between the thousand details of the world, without a break in continuity, edited with the cold and almost self-satisfied obssession (typical of his amoral protagonist) of a disintegration reconstituted into unity through that inarticulate language). 고다르는 고전주의를 피한다; 아니면, 그와 관련하여 신큐비즘(neocubism)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무조적 신큐비즘(atonal neocubism)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의 영화의 사건들 하에, 그의 주인공의 정신상태를 모방하는 긴 “자유간접 시점 쇼트” 하에서, 기술에 의해 파편이 된 현실을 재건하는 순수쾌락을 위해 만들어지고, 거칠고, 기계적이고, 불협화음의 브라크(Braque)에 의해 재구성되는 영화가 항상 존재한다.

11. 느껴지는 카메라
60년대초까지 고수되었던 “카메라를 느끼게 하지 말라”라는 구호와 반대되는 “카메라가 느껴지게 하라”. => 객관적 내러티브를 통한 영화에의 동화가 아닌, 시적 형식을 통한 주관성의 획득. “같은 얼굴을 다른 렌즈로 번갈아 촬영, 줌을 과대하게 사용, 역광으로 눈부신 빛을 만들어내거나, 들고 찍는 카메라, 이동촬영을 많이 하고, 표현효과를 위해 엉성한 몽타쥬를 만들고, 불안하게 이어붙이고, 이미지를 고정 … 합리적인 자본주의는 그 이데올로기를 논리적인 내러티브 체계로서 정당화해 왔다. 파솔리니는 관객으로 하여금 논리적인 내러티브를 수동적으로 따라가게 만드는 관습적인 영화, 산문적인 영화에 반대. 내러티브의 논리적 기능에서 자유로운 시적인 영화는 내러티브 보다는 이미지 그 자체에 집중하게 만들면서, 질서를 문제시하고 파괴하거나 새로운 질서로 재구성한다.

=> 그가 말하는 “시적Poesia”는 파편적, 비논리적, 꿈, 이미지, 비산문적, 리듬, 이미지, . . 내러티브의 논리적 기능에서 자유로운 시적인영화. 이미지들의 아상블라주. 자본주의 합리주의의 거부.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의 <시적영화 IL Cinema di poesia>(1965)에 관한 몇 가지 발췌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