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실상

사진과 실상

우리는 사진 속의 인물이나 사물이 원래부터 거기에 그렇게 존재해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그 대상의 고유한 존재성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치 그의 표정과 포즈를 통해 그 자신도 모르게 그의 정체성이 폭로되고 있는 현장을 바로 지금 목격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포즈를 취하는 그의 앞에서 누가 사진을 찍고 있는지, 카메라를 누가 들고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같은 사진에 대한 환상은 곧 깨져 버린다. 기계매체에 관하여 이러한  니체주의적인 관점에 의해서만 사진 자체의 진정성을 보증해주는 텍스트를 넘어서 텍스트의 외부가 드러난다. 이 때 비로소 우리에겐, 비록 잠깐 동안이지만, 실상에 근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그러나 살아있는 개인의 비밀스러운 실상이 드러나거나, 아직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과거 혹은 시간 전체가 드러난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여기에는, 서로 다른 관점이긴 하지만 바쟁(Andre Bazin)이나 바르뜨(Roland Barthes), 그리고 전후 유럽의 네오리얼리스트(Neo-realist)와 같이 실상에 관한 낙관적인 전망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텍스트 외부로서의 그 실상이란 바로 사회적 실상, 계급적 실상, 즉 그가 거기에서 그러한 표정과 포즈를 취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사회적 강요이다. 예컨대, 바르뜨가 언급했던 “스트디움”(Studium)의 배후가 드러나는 것이다. 텍스트의 외부란 텍스트의 폭력적인 내부이다. 텍스트로서의 사진에는 개인의 이상한 욕망들이나 기괴한 버릇과 습관들이 없다. 즉 우리가 사지에서 보는 것은, 지나치게 밝거나, 지나치게 뜨겁거나, 지나치게 어둡거나, 지나치게 차가워서 텍스트성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러나 그 초과 때문에 텍스트가 언제나 실패하면서도 암시적이나마 내포하지 않을 수 없는, 혹은 바르뜨가 언급했던 것처럼, 그 초과로 인해 텍스트 여기저기의 구멍을 비집고 나와 은은하게 발산하면서 우리를 강요하고 찌르는 고통을 주는 삶의 실재들이 아니다. 사진에서 목격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미디어에 대한 사회적 중독이다. 결국 우리가 사진에서 보는 것은 사회이지 개인은 아니다.

 

사진과 실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