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의 윤리

정동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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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의 정동(affects)에 관한 영화 <시>(Poetry)에서는 실제로 한 시인이 등장하여 시를 배우기 위해 찾아온 수강생들에게 “시가 무엇인지”, 그리고 “시를 잘 쓰는 법”에 관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강의를 한다. 그는 시를 잘 쓰려면 “잘 보아야 한다”고 충고하면서, 사과 하나를 집어 들고는 거의 스토아 철학(Stoicism)을 방불케하는ㅡ심지어 “순수가능성”(pure possibility)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하여ㅡ아름다운 시론(詩論)을 강의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사물을 잘 보지 않는다. 필요할 때만 관심을 두고, 용도에 따라서만, 미리 정해진 어떤 역할과 기능에 따라서만 사물을 취급한다. 사과는 항상 우리의 눈 앞에 있지만, 우리는 사과를 먹을 뿐 보지는 않는다. 사과는 존재한다기 보다는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를 위한, 우리에 대한, 하나의 음식일 뿐이다. 사과가 우리에게 이러한 존재일 뿐이라면, 사과의 시상(詩想)은 우리를 찾아오지 않으며, 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말하는 시상이란 사과가 우리의 “필요”와는 무관하게 그 “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임을 우리가 아는 순간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관심을 두기 이전부터 있어왔던 사과 자신의 역사가 우리 앞에서 펼쳐질 때, 비로소 사과의 시상이 떠오르는 것이다. 따라서 시가 우리를 찾아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찾아 떠나야 한다고 시인은 충고한다. 그 가르침에 따르면, 시는 우리 자신의 “안”이 아니라 “밖”에 있는 무언가이다. 여기에 시의 어려움이 있으며, 이에 대해 할머니-소녀는 시를 찾아 ‘생전처음’ 밖으로 외출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또한 시의 역설이다. 시를 찾아 밖으로의 외출은 가장 깊숙한 내부로 들어가기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서 살아가는 어느 누구보다도 멀리 나가서 가장 깊숙한 어떤 곳으로 들어간다. 자신으로부터 빠져나가 다른 존재의 내부로 들어가기. 혹은 내 안에서가 아니라 그가 있는 바로 거기에서 그의 역사 전체를 바라보기.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은 “하나가 되기”이다(마지막에 할머니-소녀가 남긴 시는 그녀 자신의 시인지 아니면 죽은 소녀의 시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창동 감독이 제시하는 길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기억이 지워져도 남아있는 것, 아니 오히려 자신의 기억과 역사가 지워짐으로써만 더 잘 드러나는 그 무엇.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고, 말해질 수도 없고, 단지 느끼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즉 느껴지는 존재로서의 온전한 한 사과의 현존을 가능케하는, 들뢰즈(Gilles Deleuze)가 어디선가 “선분”이라고 불렀던 것과 다르지 않은 의미에서의 “순수한 비젼”에 도달하기. 이것이 그가 말하는 시이다.

나아가 시는 실천적 비전에까지 이른다. 왜냐하면 이렇게 본다면 시는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내밀하며 가장 친밀한 관계를 가능케하기 때문이다. 시는 살인범을 잡아 처벌 할수는 없지만 살인범의 탄생을 막을 수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본질적이다. 영화든 문학이든, 모든 예술의 토대는 “정동”이다. 나아가 정동은 예술을 윤리적 비전으로 이끄는 출구이다. 정동을 향해있고, 정동을 드러내고, 정동에 사로잡힌 이미지만이 미적인 비전과 실천적 비전의 아상블라주를 드러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동은 주로 “얼굴”과 관계가 있었다. 정동을 추출하는 영화들은 아주 많다. 어떤 감독은 얼굴을 통해 정동을 추출하기도 하고, 어떤 감독은 얼굴을 지움으로써 정동을 추출하기도 하고, 어떤 감독은 부서진 공간 속에서 얼굴을 떠올려 정동을 추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창동은 정동의 추출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논의”한다. 그의 작품 <시>는 정동에 관한 영화, 즉 메타-정동 영화이다. 놀라운 것은 이를 리얼리즘 분위기의 이미지로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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