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의 이데올로기

빈곤의 이데올로기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에서는 텔레-스크린(Tele-screen)이라는 매체가 나온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일방향 텔레비젼인데, 사람들은 텔레-스크린을 통해 당의 메시지를 시청하고, 당은 사람들에게(개인에게까지) 메시지를 하달한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든, 집에서 쉬든, 직장에서 일을 하든, 거리를 걷고 있든, 심지어 창밖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오세아니아(Oceania) 국민들은 텔레-스크린을 경청해야만 한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텔레-스크린에 새겨진 빅부라더(Big Brother)의 눈이 사람들 각자를 주시하며 현실을 일깨운다. 텔레-스크린은 당 간부외에는 절대로 끄지도 켜지도 못하는 명령 그 자체이다. 그러니 윈스턴(Winston Smith)씨처럼 외화면(off-screen)으로 빠져서 기억에 사로잡히거나 자기만의 퇴폐적인 일기를 쓰거나 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사상범(thought criminal)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텔레-스크린이 실시간으로 보도하는 내용은 주로 반역자들의 처형에 대한 소식이나 오세아니아의 승전보–유라시아(Eurasia) 및 이스트아시아(Eastasia)와 벌이는 전쟁, 그리고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증대하고 있는 재화 생산량이다. 다음주부터 쵸콜릿 배급량이 25그램으로 늘어난다든지, 녹음기 생산량이 14% 증가 했다든지, 기관총과 로켓포가 수백만정 생산되었다든지, 버터나 우유가 20% 더 증가했다든지, 생활수준이 10% 더 나아졌다든지 등등. 사람들은 보도가 나올 때마다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뭔가 일이 되어가고 있구나! 잘살게 될거야!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부강한 나라가 될거야! 더욱 더 충성해야 해! 라고 뿌듯해하며 입술을 치켜 올려(upper lips) 각오를 다진다. 면도날이 없어 일주일째 면도도 제대로 못하면서. 진짜 설탕은 고사하고 그를 대신할 사카린조차 구할 수 없으면서. 진짜 커피나 흰빵은 구경도 못해봤으면서. 최소한 한번만이라도 스크린으로부터 벗어나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거리를 두고 생각했더라면, 텔레-스크린이 반복해서 전달하고 있는 내용이 언제나 실상과는 반대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 기운이 없어서인지,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피로해서인지, 그도 아니면 너무나 영리해서들 그런지, 모두 모여 “2분간의 증오”시간에 “반역자에게 죽음을!” 우렁차게 외치는 힘 외에는, 그 누구도 목청과 핏대를 올릴 힘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그 미래시대인 1984년을 한참이나 지나 더 미래적인 2010년의 SF적 시대를 코 앞에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실상은 어떠한가? 외견상 오웰이 예견했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처럼 보인다. 쏟아지는 재화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현대인들, 길을 나서면 눈에 채이는 상품들, 당장에라도 손을 뻗어 주머니에 넣을수 있을만큼 실질적으로 진열된 식료품이며, 옷이며, 가전제품이며, …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상점과 쇼핑몰, 우리의 나약한 감각을 사정없이 폭격해대고 있는 울긋불긋한 물건들, 그리고 그 광고들, 심지어는 남아도는 식량–사카린이 아니라 진짜 설탕, 진짜 커피–을 주체할 수가 없어 매년 수천 수만톤이 바다에 버려지고, 따로 ‘비용을 들여’ 세운 공장으로 운송되어 분해되고 해체되는 제고품들, 쓰레기 하치장에서 나뒹구는 물건들 조차 윈스턴이 신기하게 바라보던 고물상의 물건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고급스러운 것들이 아닌가? 윈스턴 시대와는 다르게 우리는 질좋은 쓰레기들을 돈을 지불해가며 버리고 있을 정도이다. 텔레스크린이 반복했던 예언이 실현이라도 된 것처럼.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가가호호 붙박혀 있는 우리의 텔레비젼은 텔레스크린과는 정 반대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반복하고 있다. 경제, 실업, 파업, 성장, 민생, 안정, 질서, 교육, … 매일매일 반복되고 있는 그 모든 이슈들 속에 감추어진 한 가지 메시지를 찾으라면, 그것은 바로 궁핍과 빈곤의 미래가 아닌가? 우리는 항상 무언가가 부족하다! 언젠가는 바닥이 날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다 굶어죽을 것이다! (심지어는 음식을 비유하여) 샌드위치가 될 것이다! …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자! 질문하지 말고, 되돌아보지 말고, 쉬지도 말라! 끊임없는 생산! 축적! 성장! 만이 살길이다. 질좋고 고급스러운 쓰레기더미 위에서 흥청망청 허우적거리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이상한 것은, 빈곤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극대화된 우리의 이 미래사회에서, 비만에 대한 공포 또한 이렇게 극대화된 시대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웰의 1984년처럼 피골이 상접한 사람들의 동공 속에 부강하고 풍요로운 국가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뱃살이 오를대로 올라 개기름 좔좔 흐르는 체구에 TV에 중독된 흐리멍텅한 눈동자 속에는 가난과 빈곤의 해골바가지 깃발이 위협적으로 펄럭이고 있는 것이다. INGSOC의 간부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첨단-과학-기술-세계화-자본-무한경쟁-파워-국가 시대에.

두 가지의 지배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안심시키는 길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겁을 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둘 모두는 빈곤을 이용해 왔는데, 전자는 “실질적 빈곤”을 감추고, 후자는 “관념적 빈곤”을 부추긴다. 어떤 경우든 둘 모두는 실상과는 전혀 다르며 실상을 왜곡한다. 빈곤을 감출때 사람들은 가난했고, 아무리 빈곤의 공포를 부추기고 떠벌려도 가난은 해결되지 않았다. 작가나 지식인들조차 알게 모르게 이 빈곤 담론에 몸을 실어 가난과 궁핍을 신비화하고 낭만화하여(고역스러운 밥벌이? 힘겨운 민생?), 빈곤의 실상을 혼탁하게 만들어, 그 공포 자체가 지배와 착취의 한 형태일 수 있음을 고스란히 감춘다. 물론 오웰의 1984년에도 불안과 공포는 있었다. 레지스탕스라고 불리는 골드스타인(Emmanuel Goldstein)-공포, 유라시아-공포, 동아시아-공포가 바로 그것이다. 골드스타인-실존이 진정 존재하는지, 전쟁-실존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지는 알수 없지만, 어쨌든 그 공포들 덕분에 모든이들은 단결할 수 있었고(Studs Turkel은 미국인들의 개별주의를 개탄하며 미국의 단결력에 대한 향수로 2차 대전이 가장 훌륭한 전쟁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반역자와 적에 대한 분노 만큼이나 강렬한 충성심과 복종이 가능했다. 우리의 이 미래시대에도 단결과 복종을 부추기는 레지스탕스가 존재한다. 경쟁력이라는 구호 속에 암시된 그 수많은 가상의 적들! 그들과의 전쟁에서 패할 경우 감수해야할 바로 무시무시한 빈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우리를 사로잡는 레지스탕스-공포는 바로 빈곤 그 자체이다.

당 간부인 오브라이언(O’brian)이 윈스턴의 사상범죄를 간파하기 위해 건네 준 책(아이러니하게도 오브라이언 자신이 만든 책)이 있는데, 이 책에서 오웰은 이중사유(double thought)라고 하는 이론을 소개하는 가운데, 전쟁과 빈곤에 관한 가상의 이론을 주장한다. 바따이유(George Bataille)의 일반경제 이론과 약간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 이론에 따르면, 전쟁은 인간이 노동을 통해 생산한 모든 (잉여)생산물의 파괴가 목적이라는 것이다. 외부의 적이 실제로 위협을 가하기 때문도, 적에 맞서 승리를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즉 전쟁은 실제로 벌어지든 벌어지지 않든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 즉 전쟁의 목적은 전쟁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계급사회가 유지되어 지배와 착취가 고착되려면, 실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빈곤과 궁핍 그리고 무지가 뿌리내려야 하는데(윈스턴이 하는 일은 바로 이 무지를 조장하기 위해 과거를 지우고 단어를 줄이는 일이다), 빈곤을 가속화하고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전쟁만큼 훌륭한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오웰의 말을 유추해보면, 전쟁은 적과의 생존 투쟁이 아니라 바로 “빈곤의 창조”이다. 그래서 그것은 지배와 착취의 사회구조를 온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빅부라더-우상을 위시한 지배 세력이 자신들의 국민들과 벌이는 치열한 싸움이다.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 우리는 틀림없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성장과 부의 구호 아래서 실체도 없는 내부 외부의 적과 싸우며, 가난과 빈곤이라고 하는 레지스탕스의 위협에 사로잡혀 막연한 공포를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다. 빈곤은 제도가 되었고, 삶의 조건이 되었고, 신비가 되었다. 물론 빈곤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어떤 형태의 빈곤인지에 대해서는 따져 묻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 빈곤한 것인가? 즉 사회적 총 생산력과 인구의 견지에서 실제로 빈곤한 것인가? 아니면 빈곤이 합법화되고 제도화 되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인가? 누구의 빈곤이고, 누가 만든 빈곤이고, 누가 극복해야할 빈곤이며, 누구의 논리인가? 몇몇 얼빠진 작가나 예술-사기꾼들이 멋도 모르고 낭만화하면서 사기를 치듯이, 우리가 혹시 가난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마치 가난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삶의 굴레인 것처럼 여겨지고, 말해지고, 기억되며,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밥! 밥! 밥! 해가며 모든 것을 송두리채 포기하고 살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오웰이 충고했던 그 빈곤과 무지 덕분에, 짊어지어야 할 책임을 카리스마-우상에게 미루어가며 편안하고 영악하게 살고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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